내가 부자인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나의 측근 대문자 T 부자언니와 취리히 데이트를 즐기고 집에 가는 길. 기차 안에는 나를 포함, 5명의 유색인종과 3명의 백인이 앉아있다. 검표원이 다가와 스위스 독어로 표 검사를 하겠다 한다. 동양인임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스위스 독어로 말을 붙이는 건 나에게서 유럽에 오래 산 아주미의 포쓰가 느껴져서도 있겠지만 스위스가 외국인 비율이 25%가 넘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민의 배경이 있는 사람은 40%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위스에서 나는 흔한 동양인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혹은 Expat(주재원)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 파견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Expat은 아니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이민자라고 불리길 거부하는 이들이 본인 소개를 Expat으로 많이들 하길래 한번 덧붙여 보았다.
외국인이 흔하고 익숙해도, 미국에 비해서 이민 역사가 짧은 유럽에서 유색인종은 사회의 저~기 변두리에서 쓰윽 묻어가는, 결코 주류가 될 수는 없는 소수의 부류이다.
10여 년 전에 스위스 사회가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취리히의 명품 편집샵 Trois Pommes (Three apples)에서 쇼핑하다가 굴욕을 당한 사건이다. 점원에게 38,000 달러짜리 가방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가
"이 가방은 네가 사기엔 비싸니 다른 가방을 보여주겠다."는 대답을 들었던 것.
그 후 이 일이 심심하던 차에 개꿀 가십 하나 잡은 전 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며칠간 장식했고, 그 Trois Pommes의 사장과 점원 인터뷰는 물론(점원의 심경고백, 못다 말한 그녀의 속사정.. 등등), 결국은 스위스 관광청에서 공식 사과를 하면서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미국인들의 특성과 스위스인들의 특성을 둘 다 아는 저 강 건너 팝콘 먹으며 구경하던 어떤 한국 아주미(저요)가 느끼기엔 그냥 미국인이 미국 했고, 스위스인이 스위스 했네 하는 정도?
일단 유럽의 상점 점원들은 미국처럼 친절하지가 않다. 가게에 들어갔을 뿐인데 이미 베프, "Hi! How are you today?!" 빵긋빵긋 윙크 찡긋찡긋, 우리 오늘부터 1일 스타일로 훅 들어오는 미국인들에 익숙한 Oprah언니는 상점에 들어오든지 말든지 손님에게 "안녕" 한마디 날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유러피언의 첫인상에서 이미 '뭐야, 쟤 지금 나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하는 언짢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것이다.
그나마 스위스는 사람들이 쑥스러워 다가오지 못함이, 눈 마주치면 씩 웃어주는 경우 느껴진다. 예전에 살던 독일에서는 억센 독일인들의 말투에 '나한테 왜 그래. 뿌앵!!' 쇼핑 나갔다 기분 잡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Oprah언니는 언짢은 와중에 이거 보여달라, 저거 보여달라 했을 테고 그 점원이 '저건 너 비싸서 못사' 비스므레한 뉘앙스의 말을 하자마자 미국인 특유의 오버스러운 "오 마이갓! 너 지금 인종차별이야? 고소한다 고소미!" 한 것이다.
이쯤에서 스위스의 인종차별의 현주소는 어떠하냐면,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험에서 하는 말인데, '인종차별'이 무엇인지조차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회이다. 그만큼 생소하고 그만큼 더 어렵고 무거운 주제이다.
툭하면 "오 마이갓! 인종차별! "운운하고 동양인에게 "너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from?"을 묻는 것조차 인종차별로 여겨지는 미국과는 달리(요즘에는 Where are you from 보다는 What is your ethnicity라고 물어야 한단다) 아직은 어떤 행동과 발언이 인종차별적인 것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한 단계가 유럽이다. 그만큼 유색인종들과 원주민(?)들이 서로 낯가리고 있는 중이라는 뜻일 수도.
다시 Oprah언니 얘기로 돌아가서, 그 이후에 Oprah Winfrey가 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오프라는 당시 미니스커트와 샌들을 신고 있었다 했다. 미국 헐리웃 스타일로 화려하게 멋 부리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곳 유럽의 재력가들은 그리 화려하게 옷을 입지 않는다. 아마도 화려한 모습의 영어 쓰는 그녀를 본 점원은 '흥, 웬 날라리.' 쯤의 생각을 했을 수도.
오늘 만난 대문자 T 부자언니를 잠시 소환해 그녀의 이야기를 인용해 보면,
언젠가 개인들이 어떤 단체를 후원하는 행사가 있어 참석했었는데, 그곳에 참석한 이들이 스위스 상위 몇 프로 쯤되는 그런 이벤트였단다. 그런데 그들의 옷차림에서 그 흔한 명품가방 하나 안 보이더라며 얼마나 평범하던지 놀랍더라며 혀를 내두른다. "아, 진짜요?" 나는 그저 신기하면서도 또 그때가 마침 어느 브랜드의 명품 가방에 꽂혀 밤마다 검색하던 때라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저런 돈 많으신 분들도 명품 안 드는데 내가 그 값비싼 가방 들고 다니면서 우쭐댔을 생각(물론 우쭐댈 생각은 없었다. 무심한 듯 툭 걸치고 다닐 생각이었음)을 하니 이부진 언니 앞에서 돈자랑하는 꼴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저들은 왜 이러는 걸까?
돈도 많은데 드레스룸에 버킨백쯤 깔별로 구비해 두고 신발도 촤르륵 진열해 줘야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의 이미지인데 왜 유럽 부자들은 티를 안내는 걸까?
그날 이후에 그것은 나의 최애 화두로 만나는 스위스인마다 붙잡고 함께 논의해 보았다. 뭐 하나 던져주면 논의하는 거 좋아라 하는 스위스인들 이게 웬 떡 신나서 함께 고민해 주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한국인 스위스 아주미가 값비싼 가방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 참 열심히도 함께 찾았다. 우리 남편한테 물었으면 1초 만에 알려줬을 텐데..ㅎㅎ
우리가 찾아낸 가장 유력한 이유로는, 칼뱅의 직업소명설이다. 이게 뭐라고 참 멀리도 갔다.
칼뱅은 Zwingli와 함께 스위스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인데, 칼뱅의 직업소명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해서 그 일에서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일을 열. 심. 히 해서 부를 축적하고, 또 축적한 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으니 겸. 손.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유교사상에서 파생된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듯이 유럽도 종교에서 파생된 것인 건가. 납득이 가는 얘기다.
그 와중에 한 프랑스인 동료가 말하길, 프랑스는 시민혁명 때 부르주아들 잡아 족치던 게 남아있어서, 부자 같아 보이면 다들 끌어내리려 혈안이 되어 달려드니, 부자들이 다 허름하게 하고 다닌단다. 헉, 역시 프랑스는 평범하길 거부함. ㅎㅎ
그럼, 우리 동네의 평범한 이들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 동네는 루체른 주에서도 세금이 적은 편인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부유층부터 중산층까지 골고루 모여 사는 곳이다. 우리 애들 학교에서 사귄 부모들의 직업은 대부분이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전문직, 금융업에 종사하는 이들로 열심히 일하고 때 되면 여행 가는 평범하지만, 누구나 영위할 수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중 끄트머리에 묻어가는 쪽을 택해서(용의 꼬리가 되리라!) 이곳으로 5년 전에 이사 왔는데, 이곳에 와서 사귄 이웃들, 학부모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아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런 아이들 학교에 가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번에 언급했던 대로 등산복, 등산화가 디폴트에 국민 아동복 H&M, 국민 신발가게 Dosenbach의 비교적 저렴한 옷과 신발을 입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애한테 메이커 옷을 입히는 것은 이미 튀는 행동이거니와 명품 딱지 나와있는 옷이라도 입혀 보내는 날에는 그 집 엄마 오바쟁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할 게 뻔하다.
한국인 엄마 입장에서는 좀 심심할 때도 있지만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편한 면도 없지 않다.
견물생심이라고, 뭐 예쁜 걸 봐야 갖고 싶어 침 흘리지 이거는 보는 게 없으니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아오! 집 나간 내 물욕 찾습니다!
몇 년간 관찰한 이들의 돈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철저하다'이다. 물가가 비싸고 우리나라처럼 공짜로 서비스로 제공되는 경우가 드물어서(심지어 장을 보러 간 쇼핑몰에서도 주차비를 야무지게 다 받는다 *&*&**&%%$&*&#@(**@(@(!!... 이상 심한 말이었음). 아껴 써야 하기도 하지만 지불하는 돈에 대한 상품, 서비스의 질 또는 대가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기대에 못 미쳤을 시에 항의도 꽤 능동적으로 하며 '비싸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처음에 스위스 와서 '비싸다, 비싸다' 주위에서 자주 들려오길래 '부자 나라 애들이 찌질하게 왜 그럴까'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겪어보니, 퀄리티에 비해 내가 지불하는 금액이 납득이 안 갈 때 하는 소리였다.
며칠 전에 유럽 생활 20년 만에 나 자신이 창피하면서도 동시에 자랑스러웠던 사건이 있었는데,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장을 보러 갔다가 평소보다 세일하는 우리 애들 최애 사과 pink lady 종이 맛있어 보여 장바구니에 20개가량 담았다. 분명히 pink lady, 킬로당 4.15프랑인걸 2.75프랑으로 할인하는 걸 봤기에 맛있는 거 할인할 때 사자는 주부 9단의 논리로 많이 넣고 장을 다 보고 계산하려는데, 물건들 다 정리 후 받아 든 영수증에 사과가 킬로당 4.15로 계산된 것이 아닌가?
이때 내 마음속에 잠시 갈등이 오갔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거 얼마 된다고 다시 다 꺼내서 바로잡니?'로 시작했던 마음이, '아니지, 저들이 일을 잘못해서 입력을 안 시켜놨으니, 불편해도 바로잡아 주길 요구하는 건 내 권리지.'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얼마 전에 한숨 푹푹 쉬면서 세금 정산 후 (우리 기준) 거금을 나라에 건네주면서 숨만 쉬어도 돈이네 어쨌네 불평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일이라 더 오기가 발동했을 수도( 내 귀중한 3프랑 내가 지킨다!!@(*#%)(**^&)@(*#)@($*&% 또다시 잠시 더 심한 말..).
그리하여 계산대의 점원에게
"이거 잘못된 것 같은데?"라고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확인하러 갔다 오겠다던 그녀가 돌아와서는 다른 사과 종류를 대면서
"그 가격이 맞아. 더 낮은 가격의 사과는 없어."라는 것이다.
"아니야, 내가 아까 분명히 봤는데 pink lady 가격이 이게 아니야." 하니 같이 확인하러 가자는 그녀.
.....
'아놔, 귀찮아졌네..'
내 뒤에는 앞에서 왜 이리 진도가 안 나가나 목을 빼고 째려보는 이들과, 그들보다 더 강적 나의 9살, 5살 딸들이 "엄마, 왜 안 가." 징징거림 장전을 단단히 하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근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마무리는 지어야겠다 싶었다.
"그래. 가자" 하고 그녀와 가서 내가 아까 본 가격세일 팻말을 가리켰다.
"아, 이거! 맞네! 가격 정정 해줄게!:"
점원의 표정이 갑자기 친절해지더니 선뜻해주겠다고 사과를 가져간다.
계산대로 돌아와 가격을 정정하고 계산하자마자 나는 "고마워."라고 상냥하게 얘기하고, 점원은 나의 느낌이었을까? 뭔가 존경의 눈초리로 (저 동양인 보통 아닌데?) 바라보며 생긋 웃어준다.
내 기준 진상짓이 이들에겐 내 권리, 내 돈 내가 챙기는 똘똘한 행위였을까? 딴 건 모르겠고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나 유러피언 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