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고생스럽게 왜 공부를 열심히 하냐고요? PART 2
저번에 하려던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자면, Andrea와 만나 저녁 식사 중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 집 아들이 진로를 정할 때가 되었는데 의대를 가고 싶어 한단다. 나는 이럴 땐 또 전형적 한국 아주미 스타일로, "어머, 공부 잘하나 보네. 잘됐다! 멋지다! 스고이! " 기뻐해줬는데 친구가 표정이 좀 안 좋은 거다. 그래서 좋은 거 아냐? 물었더니,
"모르겠어. 너무 힘들잖아.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책임도 많고, 그렇게 힘든 거 안 했으면 좋겠어."(의사 3D 업종설)
'응........? 뭐라고요?' Wie Bitte? 여기서 이해하는데 잠깐 몇 초가 걸렸다.
오랜만에 문화충격 또 한 번 세게 받네. 한국 같으면 우리 애가 의대 간다 하면 '아이고, 동네사람들!' (최소 플래카드) 개천에서, 아니지 요즘엔 대치동에서 용이 났네 마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축하해 줄일인데 정말 스위스답다.
자주 느끼지만, 이곳은 잘 사는 사회주의 국가. 공부도 일도 너무 아등바등하는 걸 "뭘 그렇게까지 사나, 안 그래도 잘 살 수 있는데." 하는 마인드다. 실제로 뭐든지 잘하려고, 이루어내려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Streb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좋은 의미인데 사회적 의미가 첨가되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로 쓰인다. 우리말로 의역하면 "억척녀"정도인데, 이쯤 되면 K-단골멘트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발하고 다녔다간 왕따 될 각! ㅎㅎ
이쯤에서 스위스 초등3학년 윤라헬 양의 일주일을 살펴보자. 라헬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7시 30분에 집에서 씽씽이를 타고 1km 떨어진 학교에 간다. 오전 수업을 하고 점심시간인 11시 30분에 집으로 점심 먹으러 출발하거나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다시 13시 30분부터 오후 수업이 시작해서 오전 수업만 있는 수요일만 제외 어떤 날은 3시, 어떤 날은 4시까지 학교 수업이 진행된다.
여기까지는 여느 한국 3학년 어린이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제 방과 후 생활이 다를 것인데 3학년 초등학생 윤라헬 양은 방과 후에 논다. 뽀로로마냥 노는 게 제일 좋을 나이, 숙제를 일주일에 하루쯤 하는 걸 제외하곤 계속, 쭉 논다.
특히 수요일은 스위스 초딩들 국민 노는 날로 이집저집 다니며 노는 날로, 우리 아이들도 이날은 친구를 집에 데려오거나, 다른 친구집에 가서 오후에 같이 논다. 다른 날도 쭉 계속 놀면서 이날은 좀 더 각 잡고 노는 날 같은 느낌?
나는 한국에서 아이를 안 키워봐서 한국의 현실을 모르겠지만 왠지 느낌에 한국 아이들은 이 나이에 벌써 수학, 영어 학원을 섭렵하고 있을 것만 같다.
라헬도 학원을 가기는 간다. 테니스 학원, 어린이 중창단 음악학원, 수영 교실도 때때로.. 겨울 되면 스키 강습도 받고...ㅎㅎ 보시다시피 사교육이라고 하기 민망한 뽀로로 생활을 업그레이드시켜 줄 취미생활 학원이다.
한국인 엄마는 자꾸 이렇게 애들을 놀려도 되나? 뭔가 수학이나 영어를 좀 집에서 심층 있게 잡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두유노 선행학습?) 수학 학원, 영어 학원(이 있긴 해도 회화 위주라 거기 가서는 영어로 또 논다)이 없기도 하거니와 다들 그렇게 학교에서 하는 공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라 점점 에라 모르겠다 손을 놓게 된다. 어쩌면 학원 알아봐서 데리러 다니는 걸 안 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편하다!
저번에 한국 방문했을 때 나의 애정하는 친구들과 애들 이야기 중에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에 여러 학원을 다니고 있어 저녁 먹을 시간도 없다는 아이를 둔 친구와 뽀로로를 딸로 둔 나는 서로를 신기해하며 또 둘 다 이래도 되나 현타가 오기도 했었다. 뭐가 맞는지 정답은 없다. 각자 주어진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하는 게 답일 뿐.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노는데? 중, 고등학교 진학은 할꺼아냐."라고 물으신다면 맞다. 계속 노는 건 아닌 것 같다. 스위스는 5, 6학년의 학교 내신 성적으로 중, 고등학교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 고등학교 방향을 어떻게 잡는데? 학교 등급이 나뉘나?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한국인의 합리적 의문) 그건 아니고 인문계를 가느냐 직업학교로 가느냐가 이때 결정된다는 얘기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대학진학 할 아이들과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직업전선으로 뛰어들 아이들을 나누는 과정이다.
5,6 학년의 성적의 평균을 내서 특정 점수 이상이 되어야 인문계로 진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직업학교로 진학하는데, 여기서 한국인 엄마 허걱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성적이 된다고 모두가 인문계로 진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는 보통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확고한 장래희망이 있는데 그 직업군이 대학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경우, 혹은 실무위주의 교육이 더 각광받는 분야일 경우이고, 두 번째 부류는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학교 카페테리아 밥이 맛이 없어서(응...?) 등등 공부를 잘하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뭘 또 공부냐, 계속 책만 붙잡고 있으면 뭐 하나, 빨리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학생과 부모들 부류이다.
처음 스위스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적응이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내 생각에는 (물론, 이 내 생각이라 함은 90년대 한국 학교에서 입시를 치르며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쭉쭉 나아가던, 그것도 한국을 떠나 유럽에 산지 20년이 넘은, 격변하는 한국 사회에 무지한 X세대 어느 유럽 아줌마의 생각임) 공부 잘하는 애면 바짝 공부시켜서 인문계 보내고, 6년 더 바짝 시켜서 유서 깊은 대학의 전망 좋은 학과에 진학시켜야 하는 거 아녀유? 라고 묻고 싶지만, 이들의 대답 또한 확고할게 뻔하다.
그런데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스위스인들이 한국인들처럼 더 좋은 직업, 더 높은 직책, 높은 곳을 향하여 으쌰으쌰! 하자는 멘탈리티가 없기도 하고(그런 걸 창피해하기도 함, 아까 말한 streber) 그렇게 공부 오래 안 해도, 대학 굳이 가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너네 월급은 비슷한 수준으로 줄 건데, 일단 하고 싶은 거 뒤에 줄 서봐"라고 하면 일단은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직업 뒤에 줄 서지 않을까? 월급을 비슷하게 준대잖아. 개이득!
돈도 많이 안 주는데 굳이 힘든 일,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 안 하고 싶은 거 맞잖아. 예를 들면 의사, 3D 맞네!
그런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으니 굳이 인문계 학교에 가서 6년, 대학 가서 또 최소 4년 공부하지 않아도 3년 직업학교 졸업 후 일자리 찾아서 경제활동 시작하면 대학 가는 아이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잡을 때쯤엔 경력도 쌓여서 임금도 오를 테니 공부에, 아니 정확히는 대학에 목을 매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가방끈이 긴 이들이, 대학 가고 대학원 가고, 유학 가서 MBA 따고 결정권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내가 겪은 다수의 여론은 '그거 아등바등해서 뭐 해, 안 그래도 살 만한데. 룰루랄라. 저 먼산을 봐. 아름답지 않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곳은 잘 사는 사회주의 국가.
실제로 내 주위에 있는 대학을 가지 않는 직업군들, 예를 들면 금융업, IT업계 종사자, 엔지니어 등등 실무로 시작해서 경력 쌓고 고임금으로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여기는 아이에게 적성 맞는 일을 찾아서 일찍부터 진로를 그에 맞게 정하는데, 공부로만 평가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한국보다는 공부의 중요성이 덜 부각된다.
얼마 전에 있었던 라헬의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때의 일이다. 한 번씩 "엄마, 수요일에 영어시험 봐.", "내일 수학 시험 봐."이렇게 통보만 해주고 시험공부는 안 하시는 뽀로로양이 걱정돼 "그럼 공부 좀 해 가야 하는 거 아냐?"라고 물었다가 극혐 표정을 지으며 "아니? 아무도 안 해 그런 거." (너 지금 '그런 거'라고 했냐?)하는 라헬을 설득할 (협박할) 목적으로 그럼 선생님과 면담 시에 그 얘기를 꺼내야겠다 생각했다.
스위스는 학부모 면담도 담임 선생님, 부모, 학생 본인, 그리고 가끔 미처 어딘가에 맡기지 못한 동생까지 껴서 모든 과목과 학교 생활 전반을 하나씩 짚어가며 선생님의 생각, 학생의 생각, 그리고 부모의 생각까지 토론식으로 조목조목 살펴본다. 마지막에는 이 삼자대면(ㅎㅎ)을 입증하는 종이에 날짜 이름 쓰고 모든 이가 사인을 하는 아주 아름답고 민주적인 풍경이다. 마지막에 선생님이 뭐 다른 궁금한 사항은 없냐기에 이때다! 왕찬스!
"시험을 앞두고 집에 교과서를 가져와서 공부를 하도록 우리가 집에서 unterstützen(support이라는 의미의 독일어로 '강요'를 미화해서 아주미가 자주 쓰는 말)하면 좋지 않을까?"
" 그래도 좋겠지만 내가 봤을 때 라헬은 지금으로선 필요가 없어. 혹시라도 보충이 필요하면 학교에서 연락이 갈 거야."
아놔. 작전 대실패.
라헬이 므흣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웃는다.
"즙으그스브즈...(집에 가서 보자)..."
아오, 한국인 엄마는 갈등이 많다.
'그래도 애들 대학은 보내야지.' (특히, 외할머니들의 입김이 사하라 사막 모래바람 타고 스위스에까지 불어오기도 함)하는 생각과 '그래, 적성 맞는 일 찾아서 잘 살 텐데, 뭐' 하는 두 개의 자아가 내 안에서 싸운다. 내가 백날 고민해 봤자 어차피 결론은 우리 딸들이 내주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답정너 이미 답은 내 안에 있는듯하지만 오늘도 나는 "내일 시험 본대매. 교과서 한번 같이 볼까?"와 나의 이 질문에 "왠열, 선생님이 안 해도 된댔거든?" (선생님 미워요)하는 아이 사이에서 왔다 갔다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직은 진화 중인 스위스아주미 앞으로 어느 쪽으로 밀어붙일지 나도 나 자신이 궁금하다. 이제 저녁 하러 가야겠다. 이만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