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 둘과 막 개업한 족발집에서 쫀득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때마침 매장 안에선 방문객을 대상으로 추억의 뽑기 게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1등 상품은 족발 완제품 한 접시였고 꼴등인 5등도 캔음료수를 공짜로 준다고 한다. 참가비가 따로 없는 공짜 서비스인지라 우리로선 밑질 것 없는 장사였다. 잘만 하면 족발 한 접시를 공짜로 하나 더 얻을 수 있을 거라는 1+1 욕망을 손가락 끝에 모아 박음쇠로 박힌 종이 세 장을 각자 신중하게 뽑았다. 몇 분후 우리 테이블 위엔 캔음료수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어렸을 적 즐겨 먹었고 지금도 여전히 출시되고 있는 치토스 과자. 요즘에야 고급 요리에 버금갈 정도의 다양한 맛의 과자(하다 못해 트러플 맛 과자도 있으니 원...)들이 범람하고 있지만, 치토스가 막 출시되었을 때의 바비큐맛이란 가히 혁명적이었다. 아마 그 시절엔 바비큐 자체가 흔한 먹거리가 아니었던 탓에 바비큐맛 과자를 통해서라도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심리가 과자 부스러기처럼 깔렸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시절의 치토스는 정말 맛있었고 중독적이었다.(PPL은 아닙니다... 지금은 치토스 안 먹습니다. 칼로리가 높아서...)
"아줌마, 치토스 한 봉지 더 주세요."
맛도 맛이지만 치토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과자 봉지 안에 숨어 있는 경품 딱지였다. 즉석 복권을 긁듯 딱지에 붙어 있는 스크래치 스티커를 동전으로 조심조심 문지르면 높은 확률로 '꽝! 다음 기회에'라는 멘트가 날 조롱하듯 등장했다. 하지만 간혹 '한 봉지 더'라는 멘트가 명절에 상봉하는 오랜 고향친구처럼 반갑게 얼굴을 내민 적도 꽤 있었다. '한 봉지 더'는 요즘 개념으로 따지면 1+1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눈빛을 장착한 뒤 가게 아주머니에게 '한 봉지 더' 경품 딱지를 거만하게 건네고 치토스 한 봉지를 더 받아온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멋지게 쓴 치타 한 마리가 그동안 꽝만 뽑아댔던 내 똥손에 치토스 한 봉지를 쥐어주는 듯한 넉넉한 행복이 그날 하루를 그득히 채워주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본인이 한 번 해보겠다며 껌칼로 껌자국을 떼는 것처럼 다소 거칠게 스크래치 스티커를 긁으신 적이 있었다. 스크래치 안에 숨어 있는 글자도 덩달아 긁혀나갈 만큼의 강력한 파워였다. 어차피 꽝일 거라 확신하고 어머니께 너덜너덜해진 딱지를 건네받았는데... 스크래치 안에 적힌 내용은 '꽝! 다음 기회에'도 아닌, '한 봉지 더'도 아닌, 당시 1등 상품이었던 '야구배트와 글러브'였다. 안타깝게도 몇 안 되는 글자들만이 생존해 있었고 나머지 글자들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본사로 당첨 딱지를 우편으로 보내봤자 상품 수령이 가능은 한지 미심쩍었다. 결국 당첨인듯 당첨 아닌 경품 딱지는 우체통이 아닌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때 본사로 보내봤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똥손이실까, 금손이실까...
우리의 삶은 그저 주어진 게 아니라 높은 확률을 뚫고 운 좋게 주어진 경품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린 창조주 혹은 조물주의 금손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뽑은 것이기에 우리의 인생은 '꽝! 다음 기회에'가 아니라 '한 봉지 더'에 가깝다. 과자 봉지 안에서 '한 봉지 더'가 나왔을 때의 떨림과 두근거림으로 우리의 삶을 설레게 채워나가야 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나버렸다는 식의 자학적 감정 소비가 가득한 자책만 늘어놓는다면 경품처럼 주어진 삶의 고귀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망했다고 끝이 아니라 망해 봐야 성공할 수 있다. '꽝! 다음 기회에'는 말 그대로 끝이 아닌 다음 기회를 노려보라는 의미이다. '한 봉지 더'와 같이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성공의 예감을 가슴 안에 은밀히 품고 인생을 설계하면 어떨까. 우리의 마음 상태가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오늘 퇴근길에는 아들들이 좋아하는 치토스 한 봉지를 사가야겠다. 인생의 참맛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매콤 달콤한 맛으로다가 사가야지. 삶이란 매콤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어찌 됐든 맛있는 인생 아니겠는가. 언젠간 먹고 말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