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파괴를 바라는가 - 2

헛소리 모으기 12. 은밀한 파괴 욕구 - 2

by 모두다
(1부에서 계속)


우리가 폭력과 파괴를 즐기는 것은 비단 게임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미디어에서도 파괴가 전달해주는 쾌감은 매우 강렬하다.

이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를 들 수 있다.


jake-hills-23LET4Hxj_U-unsplash.jpg Copyright 2017. Jake Hills

영상은 다양한 면에서 우리에게 감정을 선사해준다. 인물에 몰입하게 만들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호기심을 품게 만들거나, 음악과 장면의 조화로 깊은 인상을 안겨주는 등 시청자를 완전히 그 매체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4D라는 특수 기술이 등장하며 시청각을 넘어 오감을 사로잡는 수준으로까지 발전됐다.

덕분에 영상 매체는 등장 이래 지금까지 대중매체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만큼 그 장르와 형식 역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영화라는 매체는 현재 가장 큰 시장 규모¹를 형성하며 영상 매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스트리밍 서비스, OTT 등 새로운 서비스에 의해 영화관 산업이 위협받고 있지만, 이들도 영화를 서비스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위상은 여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Auguste and Louis Lumière)가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 1895)을 시초로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00년 하고 조금 더 넘는 기간 동안 막대하게 성장하며 오늘의 영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꾸준히 사랑받은 장르가 있다. 전쟁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MV5BOWEwYzU0ZmMtM2E5ZS00NmFlLTg0OTgtNDFmOGY3NjM0NDNjXkEyXkFqcGdeQXVyNjQzNDI3NzY@._V1_.jpg Combat naval en Grèce, 1897, Georges Méliès

가장 오래된 전쟁 영화는 1897년 촬영된 프랑스 영화 'Combat naval en Grèce'(1897) 로 알려져있다. 이 영화는 1897년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 간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짧은 무성영화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발명된 후 2년 만에 세트장과 특수효과, 각본, 분장 등을 이용해 전쟁에 관한 영화를 찍은 것이다. 그 후 20세기에 접어들며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며 더욱 다양한 전쟁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 영화는 때로는 프로파간다를 위해 자국 군대의 멋진 모습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각본과 배우를 동원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의 참상을 재현하여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전쟁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일단은 수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쥐여 줄 무기와 복장이 필요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수용할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그 공간을 꽉 채울 다양한 장치와 특수효과도 동원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돈이 많이 드는 영화다.

촬영과정에서 동반되는 사고와 기상환경, 자본 등의 리스크 역시 막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사와 투자사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만큼 전쟁 영화는 돈이 많이 들면서도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장르인 셈이다.

21세기에도 전쟁 영화는 많은 자원이 동원됨과 동시에 많은 관심을 받는 장르이다. 스트리밍과 OTT 서비스를 이용해서 영화를 보는 게 일상적이 된 오늘날에도, 전쟁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며 극장행을 고집하는 관객이 존재할 정도다.

그런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영화관에선 더 넓은 스크린, 더 웅장한 음향 시스템을 제공하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마련해두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전쟁 영화를 만끽하고자, 이 프리미엄 상영관 예매를 앞다투기도 한다.

chris-chow-cvM6BHn2cAE-unsplash.jpg Copyright 2021. Chris Chow

전쟁 영화라는 장르는 어찌 보면 참 기구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이 기대하는 바가 다른 장르의 영화에 비해 다양하고 그 기대치도 높기 때문이다.

전쟁 영화는 단순히 재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영화 속에 담긴 전쟁 장면은 재미있는 동시에 완성도가 높으면서 사실적이어야 한다. 스크린 속 구석에 있는 작고 사소한 것 마저도 사실적이라면 관객들은 그 전쟁영화에 찬사를 보내곤 한다.


이의 대표적인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59~)가 연출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다. 이 영화는 그 이전에 나온 전쟁 영화와 다르게, 거칠고 현장감 넘치는 촬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과장됨 없이 실제 전장 속 군인의 모습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모습, 폭발이 일으키는 굉음, 피격된 병사에게서 솟구치는 혈흔과 절단된 신체 등 영화에 연출되는 갖가지 요소들은 전쟁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

특히 영화 초반부 그려진 오하마 해변 상륙 작전의 시퀀스는 그 완성도와 구현도면에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Youtube 등지에선 이 시퀀스 속 사소한 디테일도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보여주며 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명작인지를 설명해주는 동영상이 존재할 정도다.

물론 이 영화는 매우 재밌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이 영화에서 그린 전쟁이 얼마나 사실적인지에 대해 감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영화에 나온 복장과 무기들도 얼마나 고증에 맞게 나왔는지 일일이 짚어주는 밀리터리 매니아들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며 영화에 찬사를 보내기 바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공 이후 전쟁 영화에는 엄밀한 리얼리즘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영화의 모든 것은 사실의 그것과 유사해야만 했다. 소품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 등장하는 전술과 배우들의 자세, 엑스트라들의 동작 하나하나도 꼼꼼하게 분석 당하게 되었다. 다른 장르들에 비하면 그 요구수준이 꽤나 가혹할 정도다.

그만큼 관객들은 전쟁 영화를 통해 자신이 실제 전장 속에 떨어진 것과 같은 사실적인 느낌을 받고 싶어한다. 영화 속 요소들이 고증이나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이 몰입이 깨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비사실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대체 관객들은 왜 그러한 사실적인 전쟁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들이 실제로 전쟁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충분히 학습받아왔고, 끔찍한 부상자와 시체로부터는 자연스럽게 눈을 돌리게 되니까. 그럼 그런 인식을 지니게 되었음에도, 왜 우리는 전쟁 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혹자는 말한다. 우리는 전쟁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고 반성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전쟁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러닝 타임 내내 참혹한 심정만을 느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단 한 장면에서도 통쾌함이나 놀라움이나 감탄과 같은, 쾌감의 범위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있는 그러한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멋진 사격솜씨로 적군을 소탕하거나 아군의 지원 폭격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도,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고통과 애통함을 느꼈을까?

영화관에서 전쟁 영화를 직접 본 나 자신의 경험, 그리고 주변 관객들에게서 느껴진 반응을 통해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해보자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론 우리가 전쟁 영화를 보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전쟁 영화를 보며 쾌감을 느낀다는 것 역시 마냥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전쟁 영화를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실 이런 특성은 전쟁 영화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 영화가 아닌 영화에서도, 파괴를 통해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Oppenheimer-Christopher-Nolan-0-1.width-1024_Kh9HV7C.jpg 오펜하이머 티저 포스터

2023년 8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1989~)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가 국내에도 개봉했다. 당시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일단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유명세부터 해서, 그 영화에 들어간 노력과 자본, 배우들의 열연 등은 관객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많은 세일즈 요소가 있었지만, 제작사와 배급사에서 적극적으로 마케팅하던 것은 꽤 생소한 요소였다. 이 영화에 나오는 핵폭발 장면이 실제 폭발을 촬영했다는 것이 주된 마케팅 요소 중 하나였다. CG를 사용하지 않고 핵폭발을 연출했다고? 이 짧은 한 문장은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탁월했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 180분 중 그 핵폭발 장면이 나오는 것은 2분가량에 불과하다. 단순히 백분율로만 따져도 1% 남짓하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 2분의 폭발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며, 많은 관객들도 이 폭발 장면에 큰 기대를 걸고 영화관을 찾았다. 개중에는 다른 이유보다도 이 폭발 장면을 보기 위해 찾아온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속 폭발 장면은 정말 웅장하다. 슬로우 모션 효과도 활용하며 거대한 스크린 속을 폭발로만 꽉 채웠다. 관객이 폭발로 일어난 화염 한 줄기마저도 볼 수 있도록 매우 가까이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촬영했다.

물론 이 영화를 본 관객 중 대다수는 핵폭발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북한의 핵위협에 실시간으로 노출된 대한민국의 국민들 아닌가? 핵폭발의 위험성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을 관객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에서 핵폭발을 재현한 장면을 보면서 공포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감탄과도 같은 감정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다.

관객 중 직접 눈앞에서 핵폭발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있어도 극히 소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겐, 핵폭발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욕망이 그들을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도록 이끌지는 않았을까?

영화 속 핵폭발은 위험하지 않다. 내가 그 열기와 방사능에 노출될 일은 없다. 그러기에 관객은 그 핵폭발을 보면서 안전하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런 논리는 다른 액션 영화에서도 작동한다. 세 편 연속 천만 관객이라는 기록을 세운 '범죄도시' 시리즈가 특히나 그러하다. 강력계 형사 역의 마동석(1971~) 배우를 주연으로 하는 이 시리즈는, 주인공 형사와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들의 대결을 그린 영화이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영화 내내 거구의 근육질 형사가 범죄자들과 싸우는 장면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제작사와 배급사 역시 이런 요소를 영화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다. 사악한 범죄자를 상대로 형사가 직접 자신의 주먹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 간단명료한 이야기다. 그리고 배급사는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고 홍보한다.

특히 악당과 형사의 1:1 격투 장면은 이 시리즈의 하이라이트와도 같다. 관객 역시 이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덕에, 세 편 연속 천만 관객의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


43f5d313-6664-412e-8aad-0cbad9d7435e.jpg 범죄도시4 흥행 감사 쇼케이스, 2024년 5월 16일

관객들은 왜 이 영화에 그렇게 열광한 걸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주인공이 악당들을 처단하는 장면을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악당들을 직접 검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선 거세게 저항하는 범죄자에 맞서고자 폭력이 동반되게 된다. 거한의 주인공이 주먹을 휘둘러 악당을 때린다. 주먹에 두들겨 맞고 기절한 악당은 결국 체포되고 만다.

한가지 묘한 점은 시리즈의 모든 영화가 여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그 악당이 어떻게 재판을 받는지, 어떤 형벌을 통해 죗값을 치르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나쁜 놈이 두들겨 맞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면서 정의가 구현되었다고들 한다.

어떻게 정의가 구현되었다는 거지? 영화에 나오는 것은 범죄자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그가 어떤 형벌을 사는지와 범죄 피해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날려버리고는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환호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다.


관객과 영화 관계자들이 말하는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 범죄자에게 내려진 형벌,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구호, 안전해진 사회 같은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 정의란 그저 악당이 매를 맞는 것이다. 법치주의 국가의 사법 시스템과 별개로, 악당이 무력으로 제압되었으면 그것으로 정의가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라는 것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이를 기술한다면 그것을 정의 구현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몇 년의 징역을 살았을지를 물어볼 것이다.

결국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범죄자가 어떻게 죄를 치렀고 그 사회에 어떻게 정의가 구현됐는지가 아니다. 그저 악당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쾌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는 2010년 이후 유행한 히어로 영화 장르에도 적용된다. 히어로 영화는 누가 보더라도 악당임이 명백한 빌런과, 이 빌런에 대적하는 정의로운 히어로 간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장르의 하이라이트는 히어로와 빌런의 싸움에 있다. 서로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며 싸우는 장면은 화려한 시각 효과와 함께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결국 히어로가 승리한다.

물론 히어로는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조하고, 경찰과 소방관이 수습할 수 없는 사고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사태를 수습한다. 이를 통해 영화 속 시민들은 히어로를 좋아하게 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그에게서 존경심과 친밀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전투 장면 없이 러닝 타임 내내 히어로가 시민들을 돕는 내용만 넣어도 히어로 장르라는 테두리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영화관을 나서며 혹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게 무슨 히어로 영화냐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정직하게 히어로가 정의를 실천한 것을 보여줬을 뿐인데,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싫어하는 걸까?

하지만 여기에 이야기를 조금만 비틀어도 평가는 달라진다. 시민을 위험하게 만든 것은 악당이다. 그리고 이 악당은 오직 히어로만이 대적할 수 있다. 결국 이 둘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전투를 벌이고... 결국에는 히어로가 승리하며 시민들은 다시 안전을 되찾는다! 정석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관객이 만족하게 될 것이다.


actor-marvel-cinematic-universe-397002_large.jpg 히어로 장르 영화를 선도하는 Marvel Studio의 영화들

그렇다면 과연 관객들이 정말로 보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히어로의 정의로운 모습? 히어로의 슈퍼 파워? 히어로의 일상? 아마도 그들은 히어로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도 악당을 상대로 치열하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게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화 제작사는 막대한 돈을 들여 CGI와 VFX에 공을 들인다.


우리가 느끼는 이상한 쾌감은 화려한 액션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공포라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쾌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것을 꺼리고 거부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포 영화라는 장르에는 열광하곤 한다.

영화 산업에서 공포 영화는 가성비가 좋은 장르인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의 제작비는 많이 들지 않지만, 그 수익은 다른 장르의 영화 못지않게 높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는 열약한 촬영 장비와 소수의 배우들로도 한 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수만 명의 인원과 많은 장비가 동원되어야 하는 전쟁 영화와 비교해보면, 공포 영화는 주인공 한 명과 카메라 한 대만 있어도 충분히 연출이 가능하니 말이다.

제작비 대비 가장 큰 흥행 수익을 얻은 영화도 공포 영화다. 기네스북 세계기록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Paranomal Activity(2009)이다. 이 영화는 마케팅 비용 포함 21만 달러라는 제작비로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얻어냈다.² 단순 수치만 계산해도 무려 1만 배의 수익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영화의 경우로 보긴 어렵다. 피터 잭슨(Peter Jackson, 1961~), 샘 레이미(Sam Raimi, 1959~) 같은 거장 감독들도 공포 영화를 통해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유명세를 얻었다. 한국에서도 공포 영화는 신인 배우의 등용문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많은 속편이 나올 만큼 타이틀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 공포 영화 시리즈들도 많다. 공포 영화가 인기 있는 장르라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russell-ferrer-8CFfmk4me_Q-unsplash.jpg Copyright 2021, Russell Ferrer

그만큼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즐긴다. 그런데 왜 즐기는 것일까?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본다는 것은 알겠지만... 왜 굳이 스스로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꽤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회피하지 않는가?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공포 영화를 즐겨 보진 않는다. 공포 영화를 보고 나면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몇 년 전, 극장에서 '큐어'(1997)를 본 날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화는 참 재밌고 흥미진진했지만, 그것이 남겨놓은 불쾌감은 하루 종일 나를 지배했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치밀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마치 그 영화가 내게 최면을 걸어 감정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썩 기분 나쁜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공포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당당하게 들이미는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왜 그럴까?

무슨 이유에서 나는 영화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또 타인에게까지 퍼트리려고 하는 걸까? 나 스스로도 이 질문에 대해선 무어라 명확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도 이 공포 영화를 즐겼다는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나는 이 신선한 불쾌감 속에서도 희미한 쾌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공포는 스릴도 안겨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 신경이 곤두서있다가, 한 번에 찾아오는 일종의 해방감이야말로 공포 영화를 즐기는 원동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일순의 스릴을 위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1부의 서두에서 말한 도미노 놀이의 특성과 닮은 것도 같다. 이 스릴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스크린 안팎이 아닌 실제 현실세계에서도 표출되곤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위험을 대가로 우리에게 극한의 스릴을 선사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세계에선 골절로 끝나면 운이 좋은 거고 사망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곤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은 줄 하나에 의존해서 몇십 미터의 빙벽과 암벽을 오르고, 강풍이 불지 않고 낙하산이 잘 펴지기를 바라며 몇만 피트의 상공에서 뛰어내리며, 심지어는 맨몸으로 깊은 수심에 들어간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다. 물론 그 위험성 때문에 대중적이진 않지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산업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스포츠로도 불리는 윙슈트(Wingsuit)의 경우를 살펴보자. 윙슈트는 특수 슈트를 입고 공중에서 활강해 내려오는 스포츠다. 기본적인 원리는 패더글라이딩과도 비슷하지만, 양력을 발생시키는 장치는 입고 있는 슈트에 달린 몇 미터짜리 날개뿐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다.


jonathan-francis-U1OdQbMi6ys-unsplash.jpg Copyright 2018, Jonathan Francis

윙슈트는 활강시 최고 속도가 200km/h를 훌쩍 넘는다고 한다.³ 인간이 공중에서 자유 낙하할 때의 종단속도 이상이다. 윙슈트 선수는 그 속도를 오직 헬멧 하나만 착용한 채 자신의 온 몸으로 견뎌야만 한다. 물론 낙하산이 있긴 하지만, 횡으로 가로지르는 윙슈트 스포츠의 특성 상 낙하산이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아챘겠지만 윙슈트는 극단적으로 위험한 스포츠다. 한 연구에 따르면 총 500번의 점프 중 한번 꼴로 심각한 중상이 발생한다고 한다.⁴ 여기에는 사망도 포함된다. 윙슈트의 개발자도 윙슈트를 즐기다가 사망한 전력이 있다. 부상이 일어날 상황에 처하면 높은 확률로 사망한다는 점에서 ‘부상자가 없는 스포츠’라는 끔찍한 농담도 존재할 정도다.

그런 윙슈트를 누군가 당신에게 권유한다면 선뜻 입문할 수 있겠는가? 0.2% 확률로 최소 중상에 처하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알고도?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여러 방면에서 고려해봐도 너무 위험한 스포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윙슈트를 즐기는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⁵ 그 사람들도 윙슈트는 위험하다는 것을 질리도록 들었을 텐데, 어째서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으면서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걸까?


혹자는 미디어가 익스트림 스포츠의 보편화에 앞장서며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한다. 아슬아슬하게 기술을 선보이는 모습들만을 노출시켜 멋지고 쿨한 스포츠라는 인식을 만든다는 것이다. 에너지 드링크 회사인 Redbull의 사례를 보면 이 역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도 같다.

Redbull은 음료 업계에서 그 입지가 견고하지만, 다양한 스포츠의 후원사로도 유명하다. 특히 모터스포츠에선 종목을 불문하고 레드불의 붉은 황소 로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Redbull은 익스트림 스포츠에도 후원을 하며, 자사의 Youtube 채널을 통해 이 스포츠들을 홍보하기도 한다.

Redbull의 Youtube 채널에서 인기 있는 동영상들은 주로 익스트림 스포츠와 관련된 것들이다. 누가 보더라도 위험해 보이는 도전을 성공하는 모습을 업로드하면 그 반응도 매우 뜨겁다. 개중엔 이런 부류의 농담이 댓글로 달리기도 한다.


Redbull : 더 이상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 : 네.
Redbull : 채용되셨습니다. 여기 서명하시죠.


그만큼 Redbull의 동영상을 시청하는 이들도 동영상 속 스포츠의 위험성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Redbull의 Youtube 채널 구독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업로드되는 동영상의 조회수도 상승하는 추세이다. 시청자들은 그것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한다.

나 역시 그런 위험한 스포츠를 직접 즐기고 싶어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흥미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Redbull이 익스트림 스포츠의 저변 확대에 어느 정도는 기여하는 바가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Redbull의 기여도, 어디까지나 익스트림 스포츠를 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tim-gouw-He9WQV8e7Kk-unsplash.jpg Copyright 2016, Tim Gouw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위험하고 스릴 넘치는 것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것을 단순히 미디어의 책임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형집행은 민중들이 볼 수 있는 최대의 쇼이지 않았는가? 목이 달아나고 목이 매달리는 광경은 분명 끔찍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사형대 앞에 운집했고, 한 사람의 목숨이 소멸하는 순간엔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과연 그들은 순전히 죄인이 지은 죄악이 단죄되는 것을 보기 위해 모이고, 정의가 실현것에 감격하여 기뻐한 것일까?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물론 현대인은 그러지 않는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확실히 오늘날 사형제도가 축소되고 있으며 최대한 인도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 과거와 차이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느 국가에서 총기 난사 사고와 같은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특히나 화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총기규제를 해야 하는지 등의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사건 현장을 촬영한 기록들이 그 화제의 대상이다.


지난 2022년 미국의 뉴욕 주의 버팔로 시(Buffalo)에선 18세의 청년이 총기 난사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0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⁶

이 총기 난사 사건이 특히나 언론의 주목받게 된 점은, 범인이 Twitch라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이용해 자신의 범죄를 직접 생중계했다는 것이다. Twitch 측에선 범행이 스트리밍 된지 2분만에 범인의 계정을 정지시키고 생중계된 영상도 삭제하였지만, 그 짧은 순간에 영상을 다운로드하고 퍼트린 사람들이 있었다.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고 언론을 통해서도 그 사실이 공표되었다.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런 끔찍한 범죄를 담은 영상을 기피하고 혐오했을까? 누군가 그 영상을 업로드하면 신고하는 등의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을까? 오히려 반대였다. 사람들은 그 영상을 찾아 나섰다.


SSI_20220519183404_O2.jpg 버팔로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페이튼 젠드론(Payton Gendron, 2003~)과 스트리밍 된 장면


사람들은 그런 범죄 영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다녔고, 누군가 업로드했다면 그 링크를 공유하기도 하고, 시청 후엔 그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직접 영상을 시청하고 ‘혐오스럽다, 끔찍하다.’등의 감상을 남기는 것은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보긴 어려운 행위이다.

살인, 더군다나 살상무기를 동원한 대량 학살이 나쁘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나쁜 것의 기록을 굳이 찾아 나서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영역에서는 벗어난 행위이지 않을까?


오늘 날의 사회는 스마트폰 보급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다른 총기 난사 사건과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의 경우도 영상 기록물이 남곤 한다. 그것이 가해자가 찍은 것이든 피해자가 찍은 것이든, 제3자가 찍은 것이든 말이다. 그리고 언론들은 그 기록물을 자료로 사용하며 사건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데 앞장선다.

알권리를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시청자들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런 뉴스들을 접하는 것일까? 적어도 100%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의 공급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그것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존재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린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은 충격적이고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공포스럽고 파괴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 이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분명 존재한다.

몇천 년의 역사동안 쌓아 올린 도덕과 법이 이러한 것들을 배척하고자 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인간은 그러한 행위도 행하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하다. 살인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살인죄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philippe-oursel-pWhx6q22d_I-unsplash.jpg Copyright 2021, Philippe Oursel

이러한 사회의 도덕규범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파괴적인 것을 멀리할 것을 요구한다. 아직 말을 떼지 못한 시점의 갓난아이도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니 말이다. 그렇게 학습된 우리는 파괴와 폭력을 기피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선망하기도 하는, 조금은 모순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다.


“나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밝히고 다닐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부적절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들에 강한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에 재미를 느끼고 난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에둘러 화려하다거나 멋지다는 식의 수식어를 동원해 그 감정을 대변하고자 한다.

물론 인간에겐 여러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폭력적인 것을 즐기긴 하지만, 동시에 폭력을 가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지 않겠다고 보장하더라도 선뜻 누군가를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법과 도덕에 의해 학습된 것도 있긴 하겠지만, 아무 이유도 없는 살인을 꺼리는 것 역시 우리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 어쩌면 그게 나 자신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게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안엔 그것을 선망하는 위험한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 제아무리 스스로가 부정하더라도, 우리의 소비와 역사는 우리가 그것에 끌린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파괴와 폭력을 즐기면서 살아가야 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도덕과 법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우린 파괴와 폭력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을 멀리하는, 양가감정의 상태를 지닌 동물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눈을 돌린다면,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시스템도 비정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우린 스스로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의 이 본성이 우리 자신을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각주


¹. 2023년 전세계 영화 산업은 339억 달러의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https://gower.st/articles/gower-street-analytics-estimates-2023-global-box-office-hit-33-9-billion/

². https://www.the-numbers.com/movie/Paranormal-Activity#tab=summary

³. https://wnyskydiving.com/blog/wingsuit-speed-how-fast-can-you-go-in-a-wingsuit/

⁴. Mei-Den, Omer. The epidemiology of severe and catastrophic injuries in BASE jumping, Clinical Journal of Sport Medicine 22

⁵. https://www.uspa.org/about-uspa/uspa-news/the-future-of-wingsuits

⁶. https://edition.cnn.com/us/live-news/buffalo-supermarket-mass-shooting#h_a91977d2e5023d7786018e78902731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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