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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gma Dec 11. 2024

헤어질 결심

우리 삶의 수많은 서래에게, 그리고 서래를 찾아내준 사람들에게


나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며, 해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영화, 문학, 예술 등 우리가 허구로 치부하는 이야기들이 실은 인간의 진실을 가장 우아하게 담아낸 도구임을. 예술은 인간의 금기를 말한다.

때때로 금기시되고, 또 되어야 하는 것들도 존재했다. 인간은 직접적인 누설, 외면하는 진실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실은 때로 터부로 묻히지만, 누군가는 어렵사리 얻은 깨달음을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울림이 역사와, 우리와 언제나 함께했다. 예술은 세련된 방법으로 진실을 물려준다. 은유와 상징으로 꾸며진 픽션 같기에, 빛을 발한다. 무엇이 내재되어 있는지 곱씹는 시간들이, 인간에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 삶의 주요한 지지축이 될 것이다. 허구라고 마냥 간과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약 10년 전, 설국열차를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 혼자 갔다. 타인이 제안한 영화 관람은 거절하기 일쑤였던 내가, 그 작품을 개봉 전부터 고대했으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왠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망스러웠다. 너무 뻔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설국열차는 인간 본성의 가장 단순한 구도를 노골적으로 펼쳐 보였기에, 그 뻔함 자체가 진실이었다. 뻔한 것을 뻔하게 그리기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다음은 친구들에 의해 끌려가 관람했던 비긴어게인이다. 당시, 친구들이 음향에 최적화된 청담 영화관을 방문하겠노라 들뜨며, 필자를 강제로 데려갔다. 그렇게, 본인의 의지 없는 관람, 탐탁지 않은 시청을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에서 손에 꼽는 영화가 되었다.

스크린 밖으로 그레타와 댄의 감정선이 뚫고 나왔다. 그레타는 마룬5(특별출현)을 남자친구로 두었지만, 비즈니스를 함께하는 프로듀서 댄과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각자의 길을 가며, 비즈니스 관계로 처음과 끝을 맞는다. 분명 뭐가 없는데, 분명히 뭐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사실 저 둘의 키스신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삭제했다. 감독의 나이스 초이스이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은유가 가장 강렬해지는 순간은, 스스로 그 빈칸을 채워야 할 때다. 그렇게, 현실과 인간을 직접 첨언하지 않아도, 충분히 드러나는 빈 무언에게  '진짜 잘 만들었다'라는 평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며,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2023년에 보았다. 대한항공에서 시청했으니, 발리 혹은 뉴욕행 비행기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왜 박찬욱 감독이 그렇게 극찬받는지, 감탄이 나왔다.

서래는 형사를 사랑했지만, 사랑이란 이름 아래 그를 떠났다. 보통은, 헤어진다고 하면, 마음의 기울기가 마이너스인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커져,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 그 자체.

你说爱我的瞬间, 你的爱就结束了。 你的爱结束的瞬间, 我的爱就开始了啊。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분명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개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서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욕구의 깊이와 방향이, 흔하디 흔한 일차원적인 애정의 차원이 아니었을 뿐.

그래서 역설적으로, 역행하는 행보를 걷는다. 그러나, 표면적인 그 이름은 동일하게,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욕구가 때로는 희생을, 때로는 역행을 만든다. 서래의 마지막 선택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층위를 보여준다.

예술은 인간의 진실을 담아낸다. 아이러니를.
그러나 허구라는 외피 속에 숨겨야 하기에, 예술 역시 아이러니 속에 위치한다. 그리고 돌아보니, 인생과 세상에서 수많은 서래가 존재했다. 예술은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하지만, 잊혀진 목소리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그려내 주는 선구자들에게 감사를 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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