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을 자긴 잤나.’
새벽 4시, 울리는 알람소리에 눈을 뜨며 생각한다. 분명 잠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 잔 것 같은 개운치 못한 잠을 잤다. 부리나케 씻고 어제저녁에 미처 다 쌓지 못한 짐을 마저 싸기 시작했다.
‘기름은 풀로 채워가야지.’
제주는 육지보다 기름값이 비싸다. 그래서 육지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가는 것이 좋다. 주유소에 들리기 위해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지워야지, 지워야 봄기운이 내 가슴에 들어오지.’
‘오상아’
주유소로 향하는 길에 강신주 강연에서 들었던 문구를 되새긴다. 강신주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다. 최근 ebs에서 장자수업이라는 주제로 20개의 강연을 하였다. 현재 11강까지 들었다. 그중 10강에서 나온 문구이다.
10강의 제목은 ‘바람이야기’이다. 구멍이 있으면 거기로 바람이 맴돌아 소리가 난다. 고로 소리를 내려면 구멍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자의식으로 꽉 차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타인이라는 바람을 온전히 맞아 소리 낼 수가 없다. ‘오상아’란 자의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비워야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소리를 낼 수 있다.
‘기름은 꽉 채우되 나는 좀 비우자.’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일어날 온갖 사건들에 대한 상상,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 채웠던 내 머리를 비우기로 다짐한다. 그래야 순간순간에 맞춰 소리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렇게 작은 순간순간들의 리듬에 맞춰 소리 내고 싶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제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제주까지는 약 5시간 정도 걸린다. 배에 타자 마자 식당의 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한 2시간 동안 글을 썼다. 글을 마치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반가운 잠이다. 배에선 잠으로 시간을 때우는 게 가장 최상이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칸으로 향했다. 눈을 뜨니 도착 30분 전이다.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며 제주에 내릴 마음의 준비를 한다.
“숙소에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
“저 도착해서 지금 짐정리 중입니다.”
“네, 그럼 짐정리 하시고 펍으로 잠깐 오세요. 같이 인사 나누시게요. “
“네 정리하고 바로 갈게요.”
나는 제주에 있을 한 달 동안 k와인펍에서 무급 스탭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제주에 약 오후 2시쯤 도착해서 시내에서 이것저것 볼일을 보니 한 오후 5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푸는 중에 사장님께 연락을 받았다.
나와 방을 같이 쓰는 스탭은 이미 출근을 한 뒤였다. 방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실제가 더 넓었다. 어떤 공간을 사진 찍으면 대게는 실제보다 작아 보이게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인물사진을 찍을 땐 실제보다 얼굴이 더 크게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은 짐 정리를 마쳤다.
“저 지금 출발해요.”
직원카톡방에 메시지를 남긴 후 서둘러 가게로 출발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k와인펍의 상호명에 담긴 뜻이다. 펍의 간판을 발견하곤 펍을 향해 걸어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더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회상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순간은 그만큼 행복하진 않다는 것과 동의어인 까닭에 잠시의 씁쓸함을 머금은 채 펍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그 스탭분? 반가워요. 와서 앉아요.”
사장님의 안내에 따라 나는 바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은 여사장님과 직원분의 근무일이다. 남사장님은 나와 방을 함께 쓸 룸메스텝과 함께 바테이블에 앉아 계셨다.
k와인펍엔 사장님 부부 2명, 나를 포함한 여스탭 2명, 여직원 1명이 근무한다.
사장님 내외분은 원래 부산분이시다. 결혼 후 부산에 거주하시다가 제주로 이주하신 후 가게를 오픈하셨다고 한다. 두 분은 와인과 위스키에 조예가 깊으시다.
여직원으로 상주하는 혜진이도 부산사람이다. 부산에 있는 바에서 일을 하다가 이곳에서 스텝생활을 하게 되었고, 일을 제대로 배워보려고 1년 동안 직원으로 근무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직접 바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의 룸메인 스탭 지효는 고향은 부산, 사는 곳은 서울이다. 법률사무소에서 일을 하다가 퇴사를 하고 잠시 제주에 내려왔다고 한다. 지효는 나중에 와인펍을 운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일도 배우고 여행도 할 겸 스텝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사장님, 배고파요.“
혜진이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사장님께 말했다.
“뭐 시키라, 시켜.”
그렇게 마감시간이 다되어, 우리의 회식 아닌 회식이 시작되었다. 안주는 족발, 주종은 와인이다. 안 어울릴 듯 잘 어울린다.
나도 이 가게에 안 어울릴 듯 잘 어울리길 바란다.
‘자, 이제 비운공간에 이야기를 채워보자.’
뱃속에 기름을 채우며 목포에서 했던 다짐을 되새겼다.
다 함께 잔을 부딪혔다.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