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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Feb 11. 2024

제7화 형이 없는, 이상형

“이상형이 뭐예요?”


 바에 앉아 다른 손님들과 지난 연애 이야기를 한참 나누던 어떤 한 손님이 내게 질문을 내던졌다. 나는 하던 설거지를 잠시 멈추고 답했다.


“음…”


 나는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재빨리 답하지 못한다. 내 이상형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상형을 정해두고 그에 걸맞은 사람을 좋아하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마음이 진동하면 그 사람이 이상형이 되곤 했다. 내 이상형을 제대로 정의하려면 마음이 진동한 까닭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명확히 찾기가 어렵다.


 외모나 직업 또는 벌이 등 명확히 보이는 걸 중요시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이상형을 규정하기도 쉬웠다.

 눈에 보이는 게 기준이 되면 그에 걸맞은 사람을 찾는 건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해본 적도 썸을 타본 적도 있다. 그 경험들을 한데 모아 비추어봤을 때 나라는 사람은 마음이 진동하지 않으면 외모도, 직업도, 벌이도 그 가치가 무색해진다.


“의식? 생각이 멋있는 사람?”

최대한 빠르게 배회하는 수많은 생각을 정리해서 답했다. 내가 말해놓고도 응? 싶었다. 세상 추상적이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외모는요? 호감이 가는 외모가 있을 거 아니에요.”

손님은 눈에 보이는 답을 원했다.


 호감이 가는 외모라. 그건 차라리 답하기 쉽다. 호감이 가는 외모가 있다. 잘생긴 외모를 보면 눈길이 간다. 그런데 이상형이라는 용어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되는 호감의 마음을 내포하는 용어가 아닌가. 문제는 마음의 진동 없이는 잘생긴 외모로부터 오는 호감은 짧게는 10분 길게는 하루 정도 가는 것 같다. 이걸 이상형이라고 말할 수 있나.


“웃는 게 예쁜 사람이요.”

내적인 논박을 의식적으로 잠시 멈추고 주문받은 메뉴를 건네듯, 손님의 질문에 표면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아”

내 답변이 크게 성에 차진 않은 표정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을 땐, 그 질문에 대해 오래 고심하곤 한다. 형태가 희미한 생각을 선명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늘 내 안에 크게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이상형. 사랑하고 싶은 사람. 나는 어떤 사람과 사랑하고 싶지?’


“언니, 치즈플레이트 작은 접시랑 제임슨 하이볼이요.”

 다른 손님에게 주문을 받은 혜진이가 포스기에 주문을 입력하며 말했다.


 나는 손님과의 대화를 멈추고 치즈 플레이트를 디피할 작은 접시를 꺼내 선반 위 도마에 올려둔다. 제각기 다른 모양과 맛을 가진 몇 개의 치즈가 들어있는 통을 냉장고에서 꺼낸다. 어떤 치즈는 삼각형 모양으로 어떤 치즈는 네모난 모양으로 자르며 놓인 접시에 보기 좋게 디피 한다. 어느새 빨라진 손에 스스로 느끼는 뿌듯함을 티 나지 않게 곱씹으며 플레이트를 완성하는데 집중한다. 이제는 안주 메뉴도 칵테일도 무리 없이 곧잘 만든다. 치즈가 풍기는 냄새와 마음의 뿌듯함을 한 데 섞어 찰나의 행복을 맛봐본다.


 처음 바에 왔을 때 메뉴에 있는 갖가지 칵테일과 핑거푸드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치즈플레이트였다. 한 데 섞이지 않는 것들이라 어려웠다. 치즈별로 잘라져야 하는 크기와 모양이 정해져 있고, 놓여야 하는 위치도 고정되어 있다. 반면 칵테일은 각각의 술을 용랑만큼 잔에 따라 섞어버리면 내가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어떤 색과 형태를 잡는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컵에 맞게 형태가 맞춰지는 부분이 내게 상대적인 편안함을 주었다.


 ‘칵테일. 사랑을 한다면 치즈플레이트 같은 사랑보단 칵테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답이 내려지지 않은 질문에게 다시 돌아갔다.


 사랑을 한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만의 공간을 그려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색을 지키되, 그 색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어떤 색이 또 하나 만들어지는 것.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고유한 색이 없어지지는 않는.

 

 칵테일은 다양한 종류의 술들이 한 데 섞여 있다. 각각의 술들이 가진 고유의 맛과 향은 사라지지 않은 채 섞인 다른 술들과 어우러진다. 이 어우러짐은 그 칵테일만의 고유한 새로운 맛과 향을 창조한다.


 치즈플레이트처럼 각자의 맛과 향을 지킨 채 고정된 자리에 위치하는 것, 그런 것 또한 사랑이라 정의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지만,  나는 사랑이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단한 사람 곁에 있으면, 나는 어렵다.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아서이다. 무색무취의 사람 곁에 있으면 심심하다. 새로운 색이 칠해질 거라 기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색이 든, 어떤 향이든 유색 유취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분명 내 취향의 색과 향이 있다. 그 취향이 마음이 진동하는 사람이란 게 보이지 않는 걸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 내 자아를 괴롭게 한다.

 

 술에 있어서는 위스키를 좋아한다. 위스키 중에서도 버번캐스크와 셰리캐스크에서 교차 숙성된 위스키를 좋아한다. 향은 달콤한데 ‘달콤’ 이라고만 말하기엔 수많은 향을 가지고 있다. 맛 또한 복합적으로 달콤한데 설탕처럼 직관적으로 달진 않다. 그래서 자극적이지 않아 매력적이다. 반면 같은 위스키라도 피트 위스키는 취향이 아니다.

 위스키 취향은 이렇게나 구체적인데, 어떤 색과 어떤 향의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정의 내려지지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이 가진 색과 향은 시시각각 변하고, 내가 좋아하는 색과 향도 시시각각 변하는 까닭에 ‘취향’ 이라는 박스 속에 담을 만한 고정적인 형태가 한눈에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 부분은 꽤나 오랫동안 고심해봐야 할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그럼 일단 내 이상형은 ‘내 마음이 진동하는 색과 향을 가진 액체같이 유동적인 형이 될 수  있는 사람’ 인 건가.

 

 젠장. 더 추상적이다.


 내 삶에 존재하는 무형의 것들은 이러듯 자주 내 생각의 시간을 앗아가는데, 변하지 않는 사실은 무형의 것들은 결국 무형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무형의 것들을 조금이나마 규정하여 유형의 것들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내 욕구를 존중하기에 나는 자꾸만 숨 쉬듯 고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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