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 아이스 음료와 따뜻한 책
무더웠던 여름. 쨍하던 여름의 푸른 기세가 옅어지고 완연한 가을입니다. 여름에 대한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지난 모임 이야기를 꺼내 들고 왔습니다.
원래는 부모님들이 젊은 시절 찾곤 했다는 오래된 음악 감상실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두운 조명에 책을 읽을 수는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자리를 한 번 옮겨야 할지 등등 많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날 음악다방은 늦게까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영업시간이 들쑥날쑥한 것은 알았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금 거리가 있는 카페에서 모임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으로 흠뻑 젖는 더위가 책만큼이나 기억에 남습니다.
각자 음료를 시키고 열기를 식혀 봅니다. 처음 뵙는 분과의 약간의 어색함 덕분에 더위가 한걸음 물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개의 책이 만났습니다. 짧게나마 책 이야기를 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열심히 필기를 하긴 했지만 저의 기억력과 손의 속도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1.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릭 루빈
창의성에 대한 고찰을 하고 계신 분이 들고 오신 책은 회색 빛의 꽤나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콘크리트 벽돌을 연상시키는 책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 책의 저자는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라고 합니다. 그는 예술을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예술을 만들 수밖에 없는 멋진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데요. 그런 상태, 그러니까 존재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모임에 참여해 주신 분은 동기나 결과에 대한 집착 혹은 두려움에서 벗어난 순수한 열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이 어린아이의 시선인데요. 저도 항상 가장 예술적인 창조성이 빛나는 인간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마음을 환기시켜 주는 일이 창조적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알기 쉬운 불교>, BBS 불교방송 엮음
스스로를 불교신자라고 밝히는 모임원분이 스스로 불교가 뭔지 물으면 명쾌히 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날 모임에서 앞부분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는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실까요? 현대의 우리에게도 종교는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일까요? 생각만 해도 이야기할 거리가 한가득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임에서도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저희가 했던 종교적 경험은 특정 종교와 관련된 조금은 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진실된 종교적인 경험은 조금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사라진 것들>, 앤드류 포터
앤드류 포터 작가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감명 깊게 읽고 신작인 <사라진 것들>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작품은 건조하면서도 섬세하다고 하는데요. 주로 40대 중반 남성의 상실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더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하시는데요. 공통적인 키워드는 상실 혹은 기억인데 특유의 담담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다고 하십니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일은 항상 이야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데요. 줄거리로 전해 들은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세상을 만나보고 싶어 집니다.
4.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고전문학을 즐겨 읽으시고 좋아하시는 분이 선택한 책입니다. 다가오는 모임의 지정도서이기도 한 단편소설 모음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입니다. 고전과는 다른 느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고전이 마치 스승을 만나는 기분이라면 이 책은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동시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책을 완독 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중에서는 '보편교양'이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으셨다고 합니다. 다가오는 모임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제가 가져온 책입니다. 단순한 열정이라는 제목이 주는 인상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수한 불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책 속의 주인공은 전 남자친구의 미스터리한 새 여인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유치하고 선을 넘기도 하는 여자의 감정과 생각을 매우 디테일하게 쫓아갑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누구나 이렇게 못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인스타의 피드나 유튜브 클립에서 보는 영상미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의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운 여름 아이스 음료 다섯 잔과 다섯 권의 책, 그리고 뜨거웠던 대화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다시 정리하기 전에는 대화의 에너지가 여름의 증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쌀쌀한 날씨가 되어 글로 쓰고 보니 다시 꺼낸 이야기가 조금 더 농익은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