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이야기와 책에 묻은 사연들
오늘 모임은 호스트의 아이디어 덕분에 색다른 독서모임이 됐습니다. 헌 책방에서 고른 책 읽기.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흥건해지는 무더운 날씨입니다. 서점 앞에서 쭈뼛한 자세로 모여,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헌 책방이라고 하기에는 더 정갈하고, 서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정겨운 공간입니다.
땀을 식히며 책장 끝부터 살피기 시작합니다. 생각보다 좋은 퀄리티에 읽어보고 싶었던 책들이 많았습니다. 읽어본 적이 있는 작가들의 책이나, 들어본 적이 있는 책의 제목들이 우선 눈길을 끕니다. 이것저것 꺼내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책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 분은 벌써 서점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기도 하시네요. 저는 두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과 아니 에르노의 <집착>입니다. 오늘의 호스트 분은 무려 세 권을 골랐네요. 계산을 할 때쯤 되자 6명이 나란히 서서 꽤나 긴 줄이 만들어졌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서점 주인 분들께서 한 권 한 권 책을 계산할 때마다 여담을 덧붙여 주십니다. 김연수 작가님을 최근 뵀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집착'은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며 아쉬워하시기도 했습니다. 내 책장에 꽂힐 책을 살 때 '좋은 책이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경험일까요.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구매를 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기쁨입니다.
자리를 옮겨 각자 짧은 소개를 나누고 음료를 시켰습니다. 근처의 카페는 에어컨이 정말 빵빵해서 시간이 지나니 추워질 정도였습니다. 카페 구석의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고 저희는 각자 사 온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 권 중에 고민하다가 김연수 작가님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50분 정도 책을 읽었고, 저는 세 챕터 정도를 읽었습니다. 각자 책을 덮고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만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책장을 펼쳤더니 편지가 한 장 쑥 하고 떨어집니다. 친구에게 선물한 책 속에 편지가 함께 온 것 같습니다. 취준생이었던 친구에서 합격을 기원하는 엽서 속 편지에는 노인의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 대신 별명으로 주고받은 편지가 왜 저희의 독서모임까지 등장하게 됐는지의 사연은 다 알 수 없지만, 중고 서적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라딘에서 샀었다면 편지는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이 책을 고르신 분은 다른 것 보다 준비된 자세에 대해 요즘 느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준비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하셨다고 합니다.
2) 양귀자 <모순>
지난주 제가 읽은 책과 같은 책입니다. 우선 1998년 초판이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문체와 지금도 공감할 만한 내용이 인상 깊었다고 하셨습니다. 미리 읽었던 책이라 결말까지 열심히 읽으셨다고 합니다. 결말과 제목이 이어지면서,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그것을 극복하기 힘든 주인공의 상황이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겪어온 경험으로 인해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선택을 내리기도 하는 모습이 '로맨틱'으로만은 모두 담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작가님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건 아닙니다. 최근에 다시 읽어 기억에 남는 단편작품 하나와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흐릿한 기억 속에 장편작품 하나 정도입니다. 작가님의 에세이는 처음인데, 소설과 다르게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조각들을 훔쳐보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이날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세대와 균질한 경험세계에 대한 이야기, 소설 쓰기와 산문 쓰기의 차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무엇이든 10년만 열심히 한다면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스님의 말과 간절함이 반복적인 행동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4)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평소 법정스님의 작품을 좋아하셨던 분이시네요.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작품들이 절판되면서 중고 서점에 방방문하면 자연스럽게 법정스님의 책을 찾는다고 하십니다. 법정스님이 지난 1990년대 수년간 한 신문에 연재해 온 칼럼 제목과도 같다고 하는데요. 책을 고른 분께서는 최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서 또다시 상기하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오히려 일을 끝내고 쉬는 시간이 충만하게 다가왔는데, 프리랜서가 된 요즘 오히려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고 합니다. '비워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정스님의 책이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5) 조너선 사프란 포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앞부분만 읽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무조건 육식반대! 가 아닌 내가 먹는 고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되는 곡물과 옥수수, 99% 차지하는 공장식 사육의 실태.
자기 개를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은 자기 말을 먹을 때도 있다. 자기 말을 사랑하는 스페인들은 자기네 소를 먹기도 한다. 자기 소를 사랑하는 인도인들은 자기네 개를 먹곤 한다.
소개해주신 앞부분의 일부 내용인데요.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해당 책으로 인해 많은 개인적 경험들이 오고 갔는데요. 산채로 폐기되는 수평아리들과 자주 사 먹는 계란의 가격 차이. 개고기가 줄어든 한국의 최근 상황. 등등 일상생활에 밀접하 이야기들이 등장했습니다.
비닐팩 속에 깔끔히 포장된 살코기 속에도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해 버린 것은 아닐까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조금 고민했습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리 모두 책을 펼치고, 또 책을 덮으며 다짐을 굳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꾸준히 하는 일에 대해 계속해나가라는 용기를 받았고, 또 언제나 조금 더 신중히 소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장바구니를 채우며, 여행지의 사진을 찍고 올리며 기쁨을 느끼는 저입니다. 그럼에도 처음 가보는 중고서점에서 만난 손때 묻은 책과 들고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을 넘어선 울림을 느낍니다. 세상이 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더 기발한 방법으로 기쁨들을 늘려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