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와 해악의 원리 사이의 빈틈

대한민국의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며

by 최정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이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추구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누구도 삶의 목적과 방향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 방식이 타인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과 충돌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에 사회는 여론의 압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약하기도 하고, 국가는 공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규제를 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느 경우에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을까? 사회에서의 자유의 제한은 오직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타인에 대한 유해성의 원리”(harm to others principle), 또는 줄여서 “해악의 원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1)


모든 인간의 행위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오직 개인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는 행위이다. 첫 번째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자유로워야 하지만, 두 번째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권한이 생긴다. 그리고 그 간섭이 용인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에 대한 해악이 예측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적절한 통제와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즉 폭행, 절도, 살인 등과 같이 명백히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행위를 법적 강제를 통하여 금지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해악의 원리”만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여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문을 가지게 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주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와 해악의 원리 사이에서 특정 주체에 대한 혐오와 다수자의 전제라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쪽은 ‘자유’를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한쪽은 발언과 표현역시도 인간에게 커다란 해악을 주기 때문에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의 자유와 해악의 원리 사이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든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법적, 도덕적 입장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표현의 자유는 본 목적을 망각한 채 특정 상대를 객체화시키고, 억압하며, 혐오하고 있다. 소수자를 위한 표현이 아니라 다수자의 전횡을 위한 권리이자 수단으로 전락하여 버린 것이다. 다만, 표현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그 해악을 느끼는 정도가 각기 다르고, 신체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혐오표현이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쉽게 규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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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유로운 표현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까? 말속에 담긴 칼날들은 차별과 폭력이 되어 사람을 찌르게 된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학교에서 된장녀, 된장남과 같은 차별적인 언사들이 식사, 술자리에서 농담 식으로 난무할 때 이를 하나하나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거나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이면 “너무 예민하다.”, “농담인데 왜 혼자 유난이냐” 등등의 대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일부러 웃는 척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이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이 지속되다 보면 점차 그런 차별적 언사들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 특정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들, 사람들을 일정한 틀에 가둬놓고 한계를 지우는 표현들은 어느 순간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 나중에 해명하려고 해도 “그때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는 짜증 섞인 무책임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신체적 상처만 없을 뿐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게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기본권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개별성을 거리낌 없이 발휘하는 것일까? 적어도 여기서 '자유'는 무차별적이지 않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취향과 목표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성격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꾸려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남에게 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자유란 곧 각자가 원하는 바를 자기 방식대로 추구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러나 자유가 통제되어야 마땅할 상황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유는 일정한 방향 아래 향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방향이 없는 무원칙한 자유까지도 개별성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결코 개인의 자유를 발휘하고 개별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자유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좋은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을 전제한 ‘표현의 자유’, 이것은 결국 사회적 규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책임의식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박혀 평생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나의 말은 누군가에 귀에 들어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개개인이 상기하고 책임의식을 지니는 것만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의 이점만을 취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1)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책세상, p36.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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