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은 전공이 없는 게 아니라, 전공이 많은 것이다

by Bosu Jeong

돌이켜보면 나는 늘 융합적인 선택을 해왔다.

의도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 가지 전공만으로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대학원 시절에는 ‘T자형 인재’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한 가지 전공은 깊게 파고들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를 넓게 갖춘 사람.

기업과 학교 모두가 이런 인재를 원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T자보다 π(파이)에 가까웠다


나는 주전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전공 하나만으로는 항상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전공을 하나씩 붙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전공’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다.


전자, 기계, 재료, 생명, 의료.

각각의 전공은 따로 보면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현장에서 문제를 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이게 사람에게 안전한가?”

“현실에서 작동하는가?”

“지속 가능한가?”


이 질문은 공학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고,

인문학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T자형보다는

파이(π)형 인재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하나의 깊은 전공 위에,

그와 맞먹는 깊이의 전공이 하나 혹은 둘 더 있는 상태.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교양과 인문학적 감각.


융합은 경계를 넘는 일이다


융합은 멋있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꽤 외로운 선택이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한 문장으로 답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끔은

“이 사람은 뭐가 전공이지?”

라는 시선을 받기도 한다.


융합은 때로

전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융합을 전공으로 삼으려면

단순히 이것저것 건드리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각 분야에서 ‘이 정도는 안다’가 아니라

‘여기까지는 책임질 수 있다’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그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효율적인 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이 맞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의료기기를 만들고 회사를 운영하는 이 일은

융합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술은 기술대로 깊어야 하고,

의료는 의료대로 윤리적이어야 하며,

조직은 조직대로 지속 가능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는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특정 전공 하나로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필요한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인가?”


융합은 방향이다


융합은 하나의 스펙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건 내 전공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

대신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라고 묻는 것.


그 질문을 계속 던지다 보면

어느새 전공의 경계는 흐려지고,

대신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으로 일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 방향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융합은 쉽지 않다.

정체성이 흐릿해 보일 수도 있고,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방식이 가장 솔직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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