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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래 Mar 27. 2024

불면증의 굴레

너 잘자던데 왜?

아동학대조사를 받은 이후로 나는 잠에 푹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동안은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었지만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 약의 힘으로 말이다.


약이란 게 참 신기해서 제때 먹기만 하면 잠이 잘 왔다.

감기라도 걸린 날이면 감기약 기운까지 더해져 나른하고 졸린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 예민해져 있던 나는 나른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병원을 다닌 지 꽤 되었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약의 용량을 조금씩 줄여보자고 권유하셨다. 수면과 관련된 약뿐만 아니라 내가 먹고 있는 모든 약의 용량을 조금씩 줄여가며 상황을 살펴보자고 하셨다.

기쁜 날이었다. '이제 드디어 약을 줄여나가는 때가 왔구나!' 약을 줄여나갈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내 몸의 속도는 조금 다른 듯했다. 약을 줄여가며 견뎌내는 시간이 쉽지만은 않았으니 말이다.

여전히 나는 불규칙하게 잠이 들었고 잠을 잔다 해도 길게 잠들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시간을 보면 초조해질까 봐 시계조차 쉽게 볼 수 없는 내 모습이 때론 처량했다.


의사 선생님과 꾸준히 수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사실 불면증에는 약보다도 인지치치료가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예전에 먹던 약을 다시 먹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나는 요즘 잠을 못 잔 날에 보상심리처럼 일부러 더 많이 누워있었다. '그러면 언젠가 스르륵 잠들지 않을까?? 낮잠이라도 자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누르며 했던 행동인데 역시나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제안을 하셨다.

첫째, 잠을 잘 자고 못 자고를 떠나서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자리에 눕는 연습을 해볼 것.

둘째, 침대는 잠을 자는 용도로만 사용할 것.

셋째,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해서 조바심 내지 않는 마음을 가질 것, 사람은 잠 못 잤다고 그렇게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할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3개월 동안 지내보자고 하셨다.

어딜 가도 꿀잠을 자던 내가 이런 약속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병원에 다녀온 후 처음으로 같이 사는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근데 너 잘자던데? 아니면 낮잠을 좀 자 봐."

언니가 먼저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언니가 깨기 전 알람 소리를 먼저 듣는 날들이 참 많았는데.. 말을 안 하면 가까운 사이에서도 잘 모를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매일같이 밤을 새우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힘든 내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또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다니.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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