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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Jun 17. 2024

엄마들의 주제파악


첫째 아이가 돌이 지났을 때쯤..

문자가 왔다.

“언니! 닭소?”

“콜!”

“9시 반!”

“예~쓰!!!”

답문자를 보내고 아이를 안고 재우고 있는데

마음이 콩당콩당 급하다.

빨리 잤으면.. 바라는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진 걸까?

이제 돌을 넘긴 아이는 조금만 움직여도

엥~하는 센서가 작동했다.

난 누워서 가슴 위에 올린 뒤 꼼짝도 안 하고

아니 숨도 쉬지 않고 20분을 참은듯했다.

드디어 잠든 아이를 이불로 둘둘 말아 안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12층)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6층)

문 열고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만나

곧장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옆방에는 그녀의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우리는 소곤소곤하며 낄낄거리며

닭발과 소주를 먹을 준비를 했다.

드디어 닭발이 문 앞에 노크와 함께 도착했다.

그녀도 나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어서

둘이 한 병이면 마시고도 남았으며

기분 역시 너끈히 취하고도 남았다.

능력 있는 남편들을 둔 덕에

밤늦게까지 회사와 공유하는 날에는

그들이 모르는 우리의 탈출구를

잠시 열어두는 시간을 가졌다.

결혼 전, 책임감의 무게를 느끼기 전의 시대로 돌아가..

다시 미스가 된 것 것 마냥

조그맣게 깔깔거리며 웃고 마시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결혼을 하고 낯선 동네에서 낯선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동네에서 사귄 6층 엄마.

그녀는 나보다 3년 결혼 생활을 먼저 시작한

결혼 선배였지만 두 살 아래의 두 아이의 엄마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사귄 그녀!

그녀는 단아하지만 밝고 환하게 웃는

세련된 외모의 대구출신 미인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오전 시간에는

그녀와 요가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시장을 같이 보기도 하였으며

엘리베이터를 통해 무나 양파를 빌리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할 때는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가정생활이 공유되었다.

처음 하는 결혼, 처음 알게 되는 남편의 모든 것.

아마 신혼 초 누구나 겪는 일인데

그때의 나는 나만 겪는 줄 알았나 보다.


동생이지만 그녀에게 남편 흉을 봤다.

“어제 남편이.. (어쩌고 저쩌고).. 정말 너무 하지 않냐? 나 어제 화가 나서 잠도 못 잤어.” 하는 내게

“언니! 내가 형부 만나면 똥궁뎅이를 발로 뻥~ 차줄까?”

듣는 순간 상상이 되면서

바로 “어!”라고 대답하고

둘이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꼭 그렇게 해달라며 재차 약속을 받으며..ㅋㅋ


한 번은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늦게 들어와 싸운 적이 있다.

처음 하는 육아에 지친 나는 또 가까운 그녀에게

남편 흉을 봤다.

“도대체 그 사람 무슨 생각인 걸까?

아~ 나~ 정말~ 짜증 나서..”라며 투덜대자

“언니! 아직 눈치 못 챘구나?

형부랑 나… 아니다.

언니 참 눈치 없다~

형부가 먼저.. 고백하더라고..

아무래도.. 내 매력에 빠진 것 같아..

우리 만나~”

아주 어설픈 연기였다.

난 빵~ 터져서 이렇게 대답해 줬다.

“아주 쑈를 해요~

제발~! 꼬셔 주세요~

아예 가지시던가~

내가 포장해 줄까?

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또 둘이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

“언니~ 우리만 처음이야? 그들도 처음이야!

그들도 힘들 거야.

물론 주기적인 바가지는 해 줘야지!

이런 거 못 느끼면 그들도 재미없을 거야~

그래야 가장으로 즐겁게 살아. ㅋㅋㅋ”

현명하고 재치 있는 그녀 덕분에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지혜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남편 욕을 할 때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기도하듯 읊조렸다.

“도대체 그 시절.. 경상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같은 한국에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나는 아주 딸에게 유언하려고..

흑인은 돼도 경상도는 아니 된다! “

그렇게 맹세하듯 서로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인생의 나이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젠 안다~

같이 살기 편한 경상도 남자의 장점을.

결혼 10년 만에 알았다.

상보성의 원리를.

신혼 초의 부부싸움은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이라는 것을..


그녀와 그렇게 스트레스를 즐겁게 풀어내며

한 동네에서 2년을 함께하고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지역에서

이번엔 두 살 많은 언니를

가까운 이웃으로 두게 되었다.

가까이 지내며 삶을 공유하게 되니

또 일상의 얘기를 하다가

예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남편의 흉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언니라는 사람의 대답은..

“그러니까 왜 그렇게 결혼을 빨리 결정했어?

쯧쯧.. 내 말은.. 자긴 더 결혼 잘할 수 있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

갑자기 훅 들어온 말들은 당황 그 자체였다.

물론 나를 더 생각하고 나를 높이 평가해 줘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가족을 내 남편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은

밤새 날 가두었다.

정확히 이 언니 남편의 직업, 연봉, 나이,

학벌, 가사의 도움 정도, 기타 등등..

모든 것이 내 남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누가보나

저울이 내 남편 쪽으로 기우는데..신기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하는 말은

“난 남편 인성 하나 보고 결혼했어”였다.

남편들도 서로 합석해서 본 적도 두어 번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물었다.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었지만..

별다른 점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뭐일까?

두 살 어린 동생과 이 언니의 다른 점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정확히 다른 자존감을 보였다.

유년시절 사랑받고 자란 두 살 어린 동생.

나만 만나면,

불우한 어린 시절을 얘기하며 눈물짓던 언니.


같은 말에 다른 상황을 마주해 봄으로써

나는 이제 대화를 통해 자존감을 느낀다.

드러내려는 자존감과

단단한 자존감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에서의 경계도

내 나름 설정하게 되었다.


삶이란 게 경험을 통해서만 성숙해져 간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40대 시절을 보내는 오늘.

50대 선배가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난 아무것도 모르던 20대나

돈 모으기 바빴던 30대보다

인생이 어떤 건지 알아가는 40대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지나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지천명을 더 기대해 본다.







영화야~!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나의 암소식을 들었을 때

두 시간을 한달음에 와 줘서..

나의 지혜가 되어준 소중한 추억을 함께해 줘서..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해~



사진: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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