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와강 Mar 03. 2024

생즉락(生卽樂)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시내 산책을 했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밥집이 있는 그 동네를 걸었다. 사람 구경도 하고 햇볕도 쬐고, 새로 생긴 치킨집, 꽃집, 서점을 기웃거리다가 다리가 아플 때쯤 맥주 한잔 하는 것, 그것이 나와 내 친구들과의 만남 루틴이다.      


비슷한 연배끼리의 만남은 참 편안하다. 살아온 사회문화적 환경과 경험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읽었던 책도 영화도 노래도, 대부분 겹친다. 그러기에 내가 ‘어!’ 라고 잘못 말해도 그들은 귀신같이 ‘아!’라고 알아듣는다.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외국 영화배우의 이름도 두셋이 머리를 굴리면 바로 기억해 낼 수 있다.      


어제는 어깨가, 오늘은 무릎이 아프다고 궁시렁거리는 친구의 통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온몸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동병(同病)이어서 상련(相憐)할 수 있는 게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런 얘길 한다. 이제 우리는 퍼즐처럼 같이 합체해야 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맥주를 마시며 무슨 시시껄렁한 얘기 끝에 그들 중 한 명이 ‘생즉락(生卽樂)’이란 말을 했다. ‘생즉락??’ ‘생즉고(生卽苦)’는 들어봤어도 ‘생즉락’이라니. 인생이 뭐 그리 재밌나? 부, 명예, 사랑 중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뭐가 재밌냐고요오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 지금 죽어도 억울할 것 없고, 이 세상 자알 살았다~ 하고 갈 것 같다, 이렇게 휴일 오후,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고 산책하고 게다가 맥주까지 한잔 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      


가만! 맞는 말이다. 난 왜 삶의 즐거움을 밖에서 찾으려 했지? 부나 명예가 아닌, 순간순간 내 안에 차오르는 사소하고도 충만한 평화로움, 이거야말로 진정한 ‘낙’ 아닌가!  


예전엔 삶이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타자와의 관계도 전쟁, 내 안의 무수한 나를 통제하는 것도 전쟁, 시험을 통과하고 일자리를 찾는 것도 전쟁. 끝없는 선택과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전쟁. 그러니 삶은 늘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호수 위에 떠있는 오리처럼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내가 갖지 못한 한 개의 물건, 내가 이루지 못한 하나의 목표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웠다. 뒤처지고 낙오된 느낌에 잠을 자지 못했다. ‘생즉고’를 입에 달고 살았고, 고통조차 삶의 징표라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통과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난 내가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만족하거나 고마워할 줄 몰랐던 것 같다. 하긴 그때의 난, 매순간 치열하게 살고 있다 자부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절의 나까지 비난하거나 한심해하지는 말자.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그저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축복이다, 생각하자. 내 곁에 친구들이 있어 그들과 눈맞추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기쁘거나 슬픈 일에 함께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 친구들과 생을 논하며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마지막 건배사는 바로 이거다.  ♣    


생즉~~ 락!!!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책들과 이별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