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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Mar 05. 2024

17. 일 말고 사랑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6년을 꽉 채웠고,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벗어던진 것도 1년이 다 되어간다. 과거에 썼던 글을 다시 들춰보고 다듬으며 잊고 있던 모습들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도파민의 세계에 살았었다. 

컨설팅 업계의 일하는 방식과 살아남는 과정 모두가 도파민 그 자체였다. 덕분에 재밌었지만 사람을 피폐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맷집이 강하다고 믿고 살았는데 생각보다 유약한 인간이라 쉽게, 그리고 빨리 피폐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강했다면 더 오래, 더 굳건하게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버텼을지도.


나는 바뀌었다. 

새벽 운동을 가는 대신, 숙면을 취하기 위해 최대한 늦게까지 잔다. 퇴근 후에도 일 생각으로 스트레스 받는 대신, 서핑, 독서, 여행 뿐만 아니라 요가와 축가까지, 하고 싶었던 취미들을 마음껏 즐긴다. 한 때는 주말 오후 서핑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회사의 호출로 서핑용 쫄쫄이(웻슈트)를 입고 비대면 미팅에 참여한 적도 있으나, 다 옛날 이야기다. 이제는 주말에 서핑을 가도 전전긍긍하며 30분마다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는다. 의사가 위염이니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충고해도 안 아픈 것보다 깨어있는 게 더 중요해서 커피를 마셔대다가 위궤양 직전까지 몸을 혹사하지 않는다. 요즘은 조금만 아픈 것 같아도 병원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연차를 쓰고 몸을 먼저 돌본다. 엄마와, 연인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1시간 후에 어떤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쓰는 시간에 집중한다.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5할은 스스로 자각한 덕분이지만 5할은 사랑 덕분이다. 

사랑이라니! 얼마나 간지러운 말인지.


어린 시절 ‘사랑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다녔다. 연애는 즐거웠으나, 사랑, 그리고 수반되는 결혼과 그 외의 것들이 꿈을 방해할 것이라 믿었다. 평생 혼자 살아도 좋으니 인정받고 싶었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이성과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랑을 그렇게 대했다. 인정, 재미, 성공, 이런 것들을 사랑과 배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다니, 돌이켜보면 참 편협한 시각이다. 그렇게 사랑에 소홀하던 때에도 곁에는 사랑이 있었다.


태어나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는 우리 엄마.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믿고 지지해줬던 엄마는 내가 또 쓰러져서 응급실에 간 날, 집으로 돌아와서 내게 물었다.


“그 일, 계속해야겠니?”


그 때만 해도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하고 싶다'고 대답했던 나는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엄마의 마음을 절반쯤 이해한다. ‘하고 싶은 일' 때문에 다른 모든 것, 그러니까 자신의 건강까지 모른 척하던 딸이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결국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은 대학교 졸업 전부터 지금까지 곁을 지켜준 남자친구 S였다. 


S는 태생적으로 나와 다른 인간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반대로 설명하면 S가 된다. 나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S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서 오는 여유를 좋아한다. 나는 주어진 일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한다. S는 어떤 일이 주어져도 진심을 다해 일한다. 나의 꿈은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는 것이다. S의 꿈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S는 나를, 그리고 컨설팅 업계 시스템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탓에 우리는 끊임 없이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렇게까지 일해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지, 꿈은 무엇인지, 인생의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주 아플 무렵부터 나는 S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일이 잦아졌다. 6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물어봐준 그 질문들 덕분에, 답하지 못하겠다면 바뀌어야 할 때라고 자각할 수 있었다.


변화를 결심하자 친구들은 자기 일처럼 응원해주었다. 


일 때문에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적도, 슬프고 기쁠 때에 함께해주지 못한 적도 많은데도 그랬다. 잘 생각했다고, 일하다 죽는 줄 알았다며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느낀 사랑이 나를 얼마나 많이 바꾸었는지는 3일 밤낮을 설명해도 모자란다. 서핑, 독서, 여행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나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엄마가, S가, 친구들이 주는 사랑이 큰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나를 돌보는 힘도, 열심히 살게 하는 힘도, 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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