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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05. 2024

04. 남과 여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명분은 다양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프로젝트가 끝나서, 중간보고가 잘 되어서, 중간보고가 잘 안 되어서,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내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매일 자정 이후에 퇴근하면서도 꼭 주 1회씩 회식을 했다.


나는 회식을 좋아했다. 

회식이 없는 날 칼퇴 후 귀가가 보장되어 있었더라면 회식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지는 회식 아니면 일이었다. 애초에 귀가는 옵션에 존재하지 않았다. 평일 내내 새벽까지 야근하고 일요일에 다시 출근해 월요일 새벽에 퇴근하는 것이 당연한 곳에서 주 1회 있는 회식은 평일에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쉬고 싶은 만큼 회식이 좋을 수밖에. 팀원들도 대체로 회식을 좋아했다. 아니, 너무 좋아했다.


그것 말고도 회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회사 돈으로 먹는 공짜 고기와 술! 회식 자리에 가면 소식좌도 먹방러가 되었다. 우리의 근무 시간을 생각하면 5명이서 20인분을 먹어도 모자라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다들 회사에 금전적인 복수를 꿈꾸며 미친 듯이 먹었다. 빵빵하게 불러오는 배를 무시하고 계속 먹었다. 먹는 게 남는 것이었다.


팀원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젊은 편이었고, 미혼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저녁 7시에 시작한 회식은 자주 12시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원래라면 일을 하고 있었을 시간까지 술을 마시다 보면 결국 다시 일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었다. 이건 이래서 힘들고, 저건 저래서 힘들고, 우리는 왜 젊은 나이에 청춘을 회사에 갖다 바치고 있는지, 주변인들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신랄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집에 갈 때쯤엔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일에 대한 불만이라는 안주가 참 달았다.


덕분에 회식 다음 날에는 남자친구와 싸우는 게 루틴처럼 굳어졌다. 

귀가할 때쯤엔 이미 많이 취한 내가 집에 도착해 연락할 정신도 없이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 화난 남자친구에게 몇 번 미안하다고 하다가 ‘회식한 것도 이해 못 해주냐’라며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던 것이다.


나는 남초회사를 다니고, 남자친구는 여초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근무시간이 살인적으로 길지도, 회식을 자주 하지도, 회식을 좋아하지도 않는 그는 우리 회사의 회식 문화도,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가족도 있고, 하다못해 친구라도 있을 텐데 매번 회사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그것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싶어 해?”

“피곤하지도 않아? 쉴 수 있으면 적당히 먹고 들어가서 쉬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는 매번 인사불성이 되는 내가 괘씸했는지 항상 복수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회사는 모든 회식이 점심에 이루어졌다. 남자친구 회사의 팀원들은 그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였는데, 집에 가면 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워킹맘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퇴근 시간이 되면 1분 1초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가끔, 아주 가끔 저녁 회식이 있어도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대부분 술을 싫어하거나, 못 마시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술 좋아하고 잘 마시는 사람들은 다 우리 회사에 모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신 업무가 좀 일찍 끝나는 날엔 다 같이 피크닉을 갔다. 그의 회사는 한강 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피크닉에서 먹는 것은 주로 치킨, 피자 같은 배달 음식과 콜라, 사이다 같은 논알콜 음료였다. 

나로서는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회식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 피크닉이었다.


“어떻게 여직원들이랑 한강공원 피크닉을 가?”

“회식은 모든 회사에서 다 하는데, 한강공원 피크닉은 너희 회사에서만 하는 거 아냐?”

“한강공원 피크닉은 썸 탈 때 필수 코스잖아. 심지어 나랑 썸 탈 때도 갔었잖아!”


그러면 그는 새벽까지 술 마시는 것보다 대낮에 한강공원에서 하하호호 떠드는 게 훨씬 건전하지 않냐며 억울해했다.


도대체 회식이 건전하지 않을 건 또 뭔가? 남녀가 새벽까지 부대끼며 일하고 술도 마시면 눈 맞을 수도 있다지만 그건 내가 있는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다들 새벽 2시까지 일하며 기름 낀 얼굴에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에서는,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 서로에게 눈길을 줄 에너지 따위는 없었다. 나는 제대로 씻고나 출근하면 다행이었다. 일어나서 머리 감고, 샤워하고, 화장할 시간에 잠을 30분 더 자는 것을 선택했다. 선크림만 바르고, 앞머리만 대충 씻고 머리는 하나로 묶어버리면 감쪽같았다(고 생각한다). 한창 바빴을 때는 출근할 때마다 들었던 소리가 ‘오늘도 머리 안 감았냐?’였으니.


남녀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취기가 오른 채로 서로를 보면 몇 배는 더 예뻐 보인다는데, 일단 공부에 찌든 고3보다 더 한 야근에 찌든 회사원은 해당 사항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잦은 회식과 한강공원 피크닉에 대한 남자친구와 나의 견해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회사 동료들과 회식을, 남자친구는 한강공원 피크닉을 좋아한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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