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티나무 Jan 18. 2024

어머니와 아내 이야기

 결혼한 지 얼마 뒤에 어머니께서 우리 신혼 살림집에 갑자기 찾아 오셨다. 집에 들어서시자 집안을 한번 돌아보시고는, 

  "얘! 좀 치우고 살아라." 

  그런데 아내의 대답이 기상천외다. 

  "어머니, 잔소리 좀 하지 마세요. 보통 때는 얼마나 깨끗한 지 알기나 하세요. 오시자마자 무슨 잔소리세요?" 

  이 뜻하지 않은 도발에 대가 세시다는 어머니께서도 놀라 꼬리를 내리신다. 

  "누가 뭐라니······. 그저 깨끗한 게 좋다는 얘기지." 


  어머니께서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요즘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는 모 재벌의 친척이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가끔 그 재벌이 오게 되면 어머니께서 요리사로 초빙되어 가시는 정도였다. 이런 어머니께서 아내가 미더울 리가 없다. 김치를 늘 담가 오셨는데, 그래도 아내의 자존심을 생각하셨는지, 

  "김치가 떨어졌을 것 같아서······.  아범은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거든······." 

  이러셨다. 

  김치 담그는 일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내는 그 김치를 겉치레 인사만으로 잘 받아 놓았다. 맛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께서 공치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원, 젊은 것이 언제까지 늙은 시에미가 담가 주는 김치만 받아먹고 살 참이냐?" 

  그런데, 그때마다 아내는, 

  "어머니, 아범은 어머니가 담가 주신 김치가 있어야만 밥을 먹는단 말이에요." 

  이런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흐뭇한 표정으로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으시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말짱한 거짓말이다. 어머니께서 간혹 사정이 있어서 제 때에 김치를 못해 오시는 경우가 있으면 자기가 김치를 담그곤 했는데,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인지 그 맛이 결코 어머니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맛있게 먹곤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친구들 사이에도 그 솜씨가 꽤 알려지게 된 정도였다. 그런데도 김치가 떨어졌을까 봐 조바심이 나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시면, 

  "걱정 마세요. 아껴 먹었기 때문에 아직 남았어요. 다음에 오실 때는 꼭 해다 주셔야 해요." 

  이랬다. 그러니 '이 사람이 시어머닐 정말 되게도 부려먹네.' 하는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김치가 어떤 때는 너무 무르고, 또 어떤 때에는 싱겁고, 어떤 때에는 또 지나치게 짜고 하여, 도무지 맛이 나지 않게 된 것이다. 한두 번은 실수이시려니 했는데, 그런 일이 너무 잦아지게 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김치를 새로 담그고, 어머니의 김치는 국으로 또는 찌개로 하여 처리하느라고 고역을 치르고는 했다. 내가 참다 못해서 하루는, 

   "이제 당신이 담그는 김치가 더 맛있어. 그러니 어머니께는 김치 그만 해 오셔도 된다고 말씀 드려. 힘도 꽤 드실 텐데." 

했는데, 아내는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어머니 입맛이 바뀌신 게 틀림없어요. 노인들이 연세가 너무 많아지면 그렇다던데."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서재에 있는데,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왜 김치 안 담가 오세요? 아범이 밥을 못 먹고 있잖아요?"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럼 어떻게 해요? 어머니는 아들을 굶겨 죽이실 참이에요?" 

  어머니께서 예의 그 '원, 이 늙은 에미가 언제까지 김치를 담가다 바쳐야 한단 말이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틀림없었다. 

  울컥 눈물이 솟을 뻔했다.     


  연세가 점점 많아지시면서, 어머니께서도 아내의 음식 솜씨가 결코 당신 전성기 못지않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을 것이다. 일흔 다섯쯤 되셨을 때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 드렸는데, 아내가 많은 손님들의 음식을 혼자 준비하는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시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시더란다. 당신이 해 보시지 않은 음식이 많을 뿐더러, 아시고 있는 음식의 맛도 아내가 훨씬 낫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저 나물이나 채소만 열심히 다듬으셨다고 한다. 


  생신 다음날, 친구들과 술집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무생채를 하고 배추를 절이고 돼지고기를 삶아 안주를 마련하시고 술까지 한 병 받아 놓으시고는 날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술자리를 걷고 친구들과 부랴부랴 달려갈 수밖에. 


  어머니께서 형님 댁으로 돌아가신 뒤에, 아내에게 그날의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께서 무료하셨는지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무생채를 하셨는데, 아내가 돌아와서 맛을 보고는, 

  "어머니, 음식 솜씨가 여전하시네요. 하선정이보다 나을 거예요. 아범이 좋아할 텐데······." 

  이랬다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지시더니 배추를 절이고 고기를 삶고 술을 준비하시고 내게 전화를 걸라고 하시더란다. 


그리고 아내는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어머니 손끝이 많이 무디어지셨어요. 맛도 맛이지만, 당신 그 생채 써신 것 보셨어요? 굵고 가늘고 영 옛날 솜씨가 아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