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성탄제(聖誕祭)' 해설과 감상

- 서러운 서른 살, 아버지의 기억

by 한현수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피 속에 붉게 흐르는 아버지의 사랑

가난했던 시절 시골집, 죽음의 문턱을 오가던 아이와 눈 속을 헤치고 약을 구해 오신 아버지.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도시에서 성탄을 맞으며 그날을 회상하는 서른 살의 ‘나’.

이 작품은 이렇게 이 두 시공간을 차분히 이어 붙이며, 한 사람의 몸과 기억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여기서 제목 ‘성탄제’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라기보다는, 그 헌신적인 사랑을 체험했던 거룩한 시간, 그리고 ‘성탄’이 품은 구원과 사랑의 의미를 빗댄 것으로 보입니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어둠 속의 위기 - 꺼져 가는 어린 생명

전기도 없는 시골의 어두운 겨울밤입니다. 방 안에는 숯불 하나가 겨우 빛과 온기를 유지하고 있고,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어린아이가 누워 있습니다. 그 곁을 지키는 건 늙으신 할머니뿐입니다.

‘어두운 방’, ‘숯불’, ‘할머니’, ‘어린 목숨’이라는 최소한의 이미지만으로도 당시의 가난과 고립,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는 절박한 위기 상황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눈 속을 뚫고 온 구원 - 붉은 산수유 열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옵니다. ‘눈 속’, ‘눈을 헤치고’라는 짧은 시어 속에, 발이 푹푹 빠지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산속을 헤맸을 아버지의 숨 가쁜 사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얀 눈과 대비되는 산수유의 붉은빛은 단순한 색채 대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추위와 죽음의 기운(눈) 속에서 아버지가 몸을 던져 가까스로 건져 올린 생명력(붉은 열매)의 상징입니다. ‘아’라는 탄식과 말 줄임표(―)에는 그 붉은 열매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는 화자의 사무치는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과 어린 짐승

화자는 당시의 자신을 ‘한 마리 어린 짐생(짐승)’이라 부릅니다. 이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에게 기대어야만 살 수 있었던 미숙하고 연약한 존재였음을 의미합니다.

눈 속을 헤치고 온 아버지의 옷자락은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는 그 서느런 옷자락에 뜨거운 볼을 비빕니다. 약효보다 더 아이를 살게 한 것은, 아버지가 다시 곁에 왔다는 안도감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부비는 것이었다'라는 객관적인 서술어는, 마치 그날 밤의 기억을 한 장의 사진처럼 영원히 박제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도시에서 다시 만난 성탄제의 눈

세월이 흘러 화자는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배경은 성탄제 무렵의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옛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옛것’을 거창한 전통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헌신, 그리고 그 사랑이 가득했던 그날 밤의 정경’입니다.

도시는 화려하지만, 정작 내 생명을 지탱해 주었던 그 따뜻한 사랑의 실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근원적인 고독 속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인 ‘눈(그 옛날의 것)’이 내립니다.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혈액 속에 흐르는 붉은 사랑

화자는 자신을 ‘서러운 서른 살’이라고 합니다. 기댈 곳 없는 삭막한 도시에서 홀로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고달픔이자, 자신이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희생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회한(悔恨)과 그리움의 표현일 것입니다.

눈 내리는 도시에서 화자는 이마에 스치는 차가운 감각을 통해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다시 느낍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눈 속에서 따오신 붉은 산수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몸속의 붉은 혈액이 되어 흐르고 있음을 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과거의 추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깊이 자리 잡은 아버지의 사랑

이 작품은 차가운 눈과 붉은 산수유, 서느런 옷자락과 뜨거운 혈액 같은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표현으로 감동을 줍니다.

화려한 도시의 성탄 장식 속에서, 화자는 문득 서러운 서른 살의 이마 위에 스치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기 안을 흐르는 피 속에, 눈 속에서 산수유를 따 오던 그 젊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직도 녹아 흐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삭막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뜨거운 ‘생명의 근원’을 확인시켜 주는 시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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