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해설과 감상

- 시로 읽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by 한현수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의 생각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의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눈 내린 겨울 아침의 숲길

화자는 눈 내린 숲길을 걷다가, 거기서 멈춰 선 행인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화자의 시선은 그 눈과 숲, ‘지금 여기의 풍경’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화자는 눈과 숲을 보며 상상을 펼쳐 나갑니다. 원시림이 석탄으로 변하는 오랜 시간, 그 석탄이 스토브 안에서 타오르며 불과 기운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기운이 은빛 날개를 가진 작은 새로 형상화되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화자에게 겨울 아침의 맑은 공기와 은빛 눈은 원시림에서부터 이어져 온 에너지와 순수가 변모하여 응축된 결과물인 것입니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눈 덮인 숲, 귀가 트이는 행인들

화자는 나뭇가지에 맺힌 눈의 반짝임을 ‘순은의 손끝’에 비유합니다. 하얀 눈의 반짝임이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라 정제된, 순도 높은 은빛과 같다는 말입니다.

출근길 혹은 이동 중인 행인들은, 눈 덮인 숲 속에서 발을 옮기다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섭니다. 감각이 맑아지며 마음이 열리는 순간입니다(귀가 맑게 트인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원시림이 석탄으로, 그리고 삶속으로

갑자기 화자의 '맑게 트인 귀'에 원시림 → 석탄으로 이어지는 긴 변성의 과정이 ‘소리’로 들립니다. 눈 내린 숲을 밟고 있는 이 순간에도, 땅 밑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을 소리입니다.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에너지의 사슬

이제 그 석탄은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타오릅니다.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은, 석탄이 타는 소리, 불꽃의 움직임을 하나의 의지와 목소리를 가진 존재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 불에서 나온 뜨거운 기운은 연통을 빠져나와 한없이 넓은 세상 밖으로(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려 가고, 그 기운은 은빛 날개의 작은 새(눈)가 되어 나무에 앉습니다. 방 안을 덥혔던 그 불의 기운이 아침 숲 은빛의 눈으로 연결된다는 상상입니다.

'원시림의 나무 → 석탄 → 스토브 불 → 뜨거운 기운 → 은빛 눈'

이렇게 이어지는 변성의 사슬은, 에너지가 자연과 인간을 오가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관점을 보여줍니다. 원시림의 생명이 지금 겨울 아침 숲에서 눈으로, 그리고 행인들의 눈과 귀의 감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두끈을 매는 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의 생각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의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귀와 생각이 비워지는 순간

화자의 시선은 다시 행인들 쪽으로 돌아옵니다. 일상을 잠시(구두끈 매는 시가) 멈춘 행인들은, 눈 내린 숲과 석탄의 변성(지난 밤의 생각과 소리) 소리에 생각이 미치자, 계장 이름, 버스 정류장, 급행 번호 같은 일상의 정보들을 하나둘 잊어버립니다. 일상적 삶의 정보가 잠시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흩어지는 눈가루(새들의 날개짓)에 실려 반짝이는 햇빛(분배된 해)을 보며, 숲, 석탄, 눈의 변성 과정을 생각합니다. 행인들이 차가운 겨울 아침 숲에서 내뿜는 하얀 입김(불씨를 분다)을 내뿜으며, 자연이 준 순수한 감동으로 가슴 속 깊은 곳의 생명력과 희망이 다시 뜨겁게 지펴 올려지는 순간입니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원시림의 아득한 시간이 행인에게 느껴지고, 행인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순수한 감수성이 눈 내린 숲으로 인해 열립니다. 이제 행인들은 골치 아픈 현실의 걱정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오직 자연이 주는 맑고 거대한 생명력이 내 안으로 밀려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립니다.

주체(행인)와 객체(숲)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의 순수성이 교류하는 '물아일체'의 경지입니다. 그렇게 햇빛에 반짝이며 눈가루가 날릴 때, 행인들에게는 아침의 희망, 삶의 의지(불싸)가 되살아납니다.



흑(석탄)과 백(눈)의 선명한 대비와 그 조화가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땅속 깊이 묻힌 검은 석탄과 온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은 색채로는 대조적이지만, 화자는 이들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검은 석탄이 타올라 하늘로 오르고, 그것이 정화되어 다시 하얀 눈으로 내려온다는 '순환의 논리'를 통해 흑과 백이 결국 하나의 연결된 생명력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상징인 석탄이 자연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문명을 배척하지 않고 자연과의 화해를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땅의 울림(청각)이 눈(시각)이 되고 다시 따뜻한 불씨(촉각)로 변하는 공감각적 묘사를 통해, 겨울 숲의 풍경을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기교도 눈에 뜨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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