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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 뚱이 Feb 14. 2024

좋은 시어머니가 되려니  착한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던 곳에서

 곰 같이 살았다.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손위 동서가 주는 밥 첫 술에 쉰 내가 고약하게 나는데 이걸 어쩌나... 큰 눈이 휘둥그레지는 나를 보고 알고나 있었다는 듯  깔깔깔 웃는 시누이를 보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않았다.


 막내 시누이 집들이에 가서 냉면을 먹는데 맹탕 맛이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맛나게 잘 먹고 있다. 뭐지? 그때 깔깔깔 뒤집어지게 웃는 한 여자. 그 집주인이다.

왈 "육수가 모자라 수돗물로 했어"  당장에라도 냉면 사발을 그년의 얼굴에 던지고  싶은데 참았다. 시끄러운 게 싫었다. 어쩌면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었다. 제일 기가 막힌 건 그 와중에 꾸역꾸역 먹고 있는 서방이  더 밉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 집들이에 온 손님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러고 살지?  그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빈 손으로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못 낳은 것도 아니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딱  한 가지 그들의 따돌림이 두려운 것이었다.

살다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개인 간의 일들도 그들 중 어느 누구 한 명과  부딪히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애벌레 몸처럼 동글동글 붙어서 상대방을 징그럽게  괴롭히는 고약한 습성이 있는데 그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내면에선 그 이상의  난타전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굽히지 않는 나와 나를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약 올라하는 시누이들과의 끊임이 없는 갈등과 함께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들의 자격지심이라 생각하고 살자.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은 받아주지 않을 거야  다짐을 한 것은 작은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들이 할머니댁 주방에서 종일 일만 하는 나의 손목을 끌고 나올  때였다.

"엄마 부엌에서 일만 하려고 시집왔어?"

드디어 나에게도 편이 생긴 것이다.


2016년 음력 12월 17일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 아버지가 먼 곳으로 가셨다.

내가 고단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나의 잘못된 결혼 생활을 보시면 가슴 아파하실까 봐. 아버지가 믿고 믿었던 분의 소개로 임씨네 집안의 며느리가 된 게 아닌가. 그런데 그 결혼 생활이 파탄이 나면 "니는 못 믿어도 낙중 (지금의 시외삼촌)이는 믿는다"시던 아버지가 가슴 아파하실까 봐 꾸역꾸역 곰처럼 미련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시댁 장조카가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변호사네 고모네 뭐네 고민이 큰듯했다.

무슨 일이냐는 나의 질문에

"아아.. 걔들이 재산 다 못 준다고 난리가 난 모양이네. 그래서 **이가 변호사 알아본데"

 무슨 일일까? 기가 막힌다.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시기 전의 일이다. 밭을 남편에게 상속해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그 밭을 팔아서 장조카의 집과 차를 사 주셨던 일이 10년이 넘었나 보다. 그때도 나는 서운은 했지만 표현을 하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난 그 땅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입버릇처럼 "나한테 못하는 놈은 재산 하나도 안 줄 거다"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지치기도 했고 재산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유세를 부리는 것도 싫었던 게다. 그런데 새삼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일까?

시댁에 갔다가  손위 동서가 홧김에 내뱉은 말에  왜 그 난리가 났는지 알았다.

김장한다고 모인 자리에서 손위 동서네 땅을 사려는 자가 나타났다는 말이 있었고 그 땅이 팔리면 옛날에 남편에게 주기로 한 땅을 팔아서 장조카를 줬으니 조금 되돌려 주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시누이 세 명이 동시에 들고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엄마 자주 오지도 않는데 왜 줘? 그럴 거면 우리나 줘유"  그래서 조카랑 고모들이 재산 싸움을 하게 된 것이란다. 말하는 모양이 참 예쁘다. 손 위 올케를 **엄마라니... 쯧 많이 부족한 시누이다. 그런 시누이를 내가 상대한다고? 어쩜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는 일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동서네 줄걸"이라는 손위 동서의 말이다.

단 한번 재산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주지 않는다고 서운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 나에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왜 그런 말들을 하는 건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느 누구 하나 오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짓들이지?

 손위 동서에게도 말은 않았지만 보통 괘씸한 것이 아니다. 손위 동서가 결핵에 걸렸을 때 친정어머니는 형님이 가엾다며 몸에 좋다는 개소주를 해서 보냈고 유방암 수술 뒤에도 보약을 지어서 보낸 분이 우리 친정어머니셨다. 어릴 때부터 남의 집살이를 하다 결혼을 해서 또래 시누이들의 도시락이나 쌌던 손위 동서를 늘 가여워했던 것이다. 뿐인가 시부모님께선 버스를 대절해서 친정 쪽으로 여행을 가시면 기어이 친정아버지께 연락을 하셔서 친정아버지께선  대형 버스에 타고 오신 삼십 명이 넘는 아버님의 지인분들께 식사 대접을 하시곤 다. 그런데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손 위 동서는 물론 아무도 조문을 오지 않았으니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서운함이 채 가시지도 않은 나를 두고 재산을 운운하고 그 일과 무관한 나를 빌미로  재산 싸움을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때 처음 남편에게 선언했다.


"이 시간 후로 다시는 자기네 집에 안 갈 거예요.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어요? 돈이 탐나면 그냥 자기네 끼리 타협해서 받을 일이지 아무 상관없는  나를 걸고넘어져요? 내가 서촌을 자주 가지 않는 건 사람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자기 동생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잘 알잖아요. 나한테 그 일들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나도 이젠 안 가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소리도 질렀고 말도 안 되는 남편의 말에 밥상을 엎었다.  나도 놀랐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 그 후로 가지 않은지가 약 7년이 되었나 보다.




그렇게 선포를 했던  내가  시댁 산소에 갔다.

최근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손위 동서가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아니 우리 가족, 남편과 우리 두 아이들의 평안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는 간편하고  자식들 몫이 줄어든다는  생각이었다.

또 한 번은 설날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벌목, 가지치기를  하겠다는 남편의 말에  결혼하고 맞이하는 첫 명절에 며느라기가 한 시간 이상을 산소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맘이 편치 않아서 주말에 남편이랑 가서 벌목과 가지치기를 하고 온 것이다.

어깨야 무릎이야 온몸이 다 아픈데 빙 둘러보니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듯 시원하다.

 나의 예쁜 며느라기가 나처럼 시집살이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가기 싫다던 시댁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벌목을 하고  온 것이다.


나의 냉동고에는 꽁꽁 얼어붙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냉동고가 얼마나 견고한지 고장도 나지 않는데 난 오늘 한 개의 이야기보따리를 해동시켜 내 삶의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좋은 시어머니가 되려고 하다 보니 착한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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