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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인 도깨비 Feb 19. 2024

1860년, 1989년의 열여섯 스물하나

문학과 같은 첫사랑을 꿈꾸다

 문익환과 임수경이 무단입북을 하고 김우빈, 이종석이 태어났던 1989년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부산시 동구에 위치한 중학교였는데 고등학교와도 나란히 붙어 있어서 등하교 시 학생들의 출입으로 상당히 북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교를 경계하는 통로에는 학교 서무실이 있었고, 조직체계 같은 것은 모르지만 서무과장 이하 20대 초 중반의 젊은 여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반 반장과는 정말 친했었다. 일 년을 꿇어서인지 다소 성숙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을 갖추었고 불의에서 만큼은 주먹도 잘 썼던 정말 멋진 녀석이었다. 당연히 여학생에게도 인기가 많아 연애담도 자주 들려주었고, 당시 숫기 없던 나와 친구들의 단체 만남도 가끔 주선해 주었다. 아직도 기억하기로는 첫 미팅은 부산 해변가 근처 롤러스케이트장이었는데 그날 내 짝은 상당히 헌신적인 여자아이였다. 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땀을 흘리면 어디선가 나타나 손수건을, 더워서 그늘 아래에 쉬고 있으면 쏜살같이 뛰어와 제일 비싼 '월드콘'을 불쑥 내밀고는 자기 남자는 자기가 지킨다는 표정으로 매우 흐뭇해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나보다 더 건강?했었고 그땐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나이였기에 이후의 만남에 대해서 벌써부터 회의적이었다. 어쨌든 그 만남의 주선자였던 그 녀석이 어느 날 여자를 어떻게 하면 잘 꼬시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약간은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 커피를 한 잔 뽑아서 여자한테 '커피 한 잔 하세요'하고 말을 걸어!


 나는 학교 서무실의 출납창구 쪽에서 일하던 그녀를 평소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용기가 없어 말을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명목상 납부할 것이 있거나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갈 일이 있길 바랬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왔다. 나는 친구에게 배운 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너스레를 떨며 자판기 커피를 건넸다. 그녀는 잘 마시겠다는 답변과 함께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열여섯 살 어느덧 여드름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하고 까무잡잡했던 중3 소년은 나름 성공했다고 여겼다. 그 후로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과 서무실 창구 앞에서 진지하게 깐족거리거나 하교 후 일부러 퇴근 시간을 기다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곤 했다. 그러다 그녀와 친해진 후에는 편지도 자주 주고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했다는 그녀는 편지를 정말 잘 썼다. 글자체는 프리지어처럼 싱그럽고 가지런했으며 담백한 편지지와 봉투는 받을 때마다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유치환의 '행복'도 편지에 적으며 마치 그 시처럼 따라 살고 싶었다.


 한동안 그런 벚꽃 같은 행복한 사춘기가 일상생활처럼 이어져 나갔다. 분명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작은 실타래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운동회 때 청군백군이 굴리는 큰 공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받았던 편지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뿐만 아니라 꾸었던 꿈까지도 깨알같이 적은 미니 열쇠가 달린 일기장을 건넸다. 그녀는 머뭇거렸지만 잠시 후 작정을 한 듯 황갈색 서류봉투에 든 일기장을 덤덤히 받아 들었다. 난감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어린 내게 매몰차게 거절하는 대신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애써 배려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기억에도 왜 그렇게 나를 대했는지 이해한다. 일기장이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외면의 성장기록이 아닌데 나는 그 원칙을 보기 좋게 바꿔버렸던 것이다.


 그 후 편했던 누나 동생사이가 누군가의 남자이길 원했던 이기적인 착각으로 인해 단숨에 틀어져버렸다. 하교를 하고 퇴근을 기다렸지만 마주친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혔고 나머지 일행과 함께 학교 정문을 나간다기보단 도망가기에 바빴다. 나는 그렇게 가버리는 그녀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달리 다른 방법도 없었고 열여섯이라는 나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집으로 가는 버스를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것뿐이었다.


 절망했고 다 자라지 못한 몸과 마음에 상처가 생겨났다. 그날따라 더욱 집요하던 햇살이 따갑고 미웠다. 집에 와서는 방문을 잠그고 죄 없는 커튼을 뜯어질세라 힘껏 당겼다. 그리고 강제로 캄캄해진 방에서 라디오를 틀고는 사춘기 놀이에 흠뻑 취했다. 희미한 아날로그 계기판 불빛이 유일하게 내 서러움을 받아내고 있었다.




 며칠 후 편지를 받았다. 누군가를 통해 전해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편지에는 그녀의 매우 절제된 냉정함이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세상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었다.


'차라리 평범한 채가 좋구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연두색 한지에 중앙으로 집중된 짤막하고도 날이 선 필체들이 보였다. 스물 한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담담함과 차분함에 차갑기까지 한 편지지가 싱그런 초여름에 일찍 맞이한 소낙비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 조병화 님의 '공존의 이유'가 적혀 있었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 들 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시간이 흘렀고 고등학교를 진학한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문상복에 가까운 검정 교복을 입고 셔츠와 넥타이 매무새를 바로 잡고는 중학교를 다시 찾았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말 반갑게 나를 맞이했고 서로를 응원하며 가끔씩 얼굴 보자는 기약 없는 희망만 주고받았다.


 그렇게 그녀를 본 것이 결국 마지막이었다.


 서무실 그녀였던 누나와 내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내가 더욱 심해진 여드름으로 고생하던 고2 때 결혼하셨다. 같은 고등학교를 간 친구에게서 들었는데 사연은 이러했다. 담임은 평상시에 제자들의 고민을 스스럼없이 들어주시거나 운동도 좋아하셔서, 주말이면 제자들과 축구나 야구도 같이 하셨던 멋진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누나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시기라 당연히 연애상담도 받아주셨다. 그리고 가끔씩 누나에게 내 편지를 대신 전해주시는 메신저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나로 인해 오히려 두 분이 가까워지신 것이다. 보통 이런 얘기를 들으면 막장 드라마의 어이없는 귀싸대기 반전을 느껴야 하지만 오히려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의 소중한 첫사랑이 두 분에게는 마지막 사랑이 된 것이다.


나의 중3이자 나의 첫사랑 [학원출판공사, 1987]

 [첫사랑, 1860]은 내가 그녀를 한참 좋아할 때 읽은 책이다. 딱딱하리만치 웅장하고 보수적인 벽돌색을 내뿜는 세계전집 중에서 감수성에 걸맞은 제목을 발견하고는 바로 집어 들었다. 어린이 명작동화 이후 아마 처음으로 빠져 읽은 문학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열여섯, 첫사랑인 지나이다는 스물한 살이었는데 나와 누나, 그와 그녀도 같은 나이여서 더욱 묘한 동질감이 오버랩되었다. 그래서인지 마치 나를 위한 운명의 지침서라 여겼고, 순식간에 읽어갔다. 하지만 내가 꿈꾸고 바랬던 주인공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나이다를 통한 거대한 감정의 폭풍우를 경험하고 중년의 뚜르게네프(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네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1818-1883)를 통해 소년의 절제된 감성을 성숙한 성장기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뚜르게네프는 이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주 읽었다고 한다.


 문득 두 분이 보고 싶다.

수업시간 칠판에 'If I were a bird I could fly to you'를 쓰시며 연애얘기를 들려주셨던 흰 피부의 잘생긴 담임선생님과, 내가 검은색 리본을 선물할 때 까르륵 웃으며 자주 달고 다니셨던 누나는 여전히 이쁘실 텐데 말이다.

누나에게서 받았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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