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가 독일어 정식 명칭이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영어식 표기입니다-글쓴이)을 34년간 쥐락펴락했던 카라얀이 사망하였다. 그러자 마치 이를 기다렸다는 듯 언론에서는 연일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쏟아졌다. 이는 그의 음악적 성과보다는 미디어 저장 기술에만 베를린 필을 기계적으로 훈련시켰다는 비난이었다.
실제로 카라얀이 재임한 기간 동안에 베를린 필의 음악적 질적 성과보다는 녹음 및 영상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상업적인 성장에만 치우쳤던 것은 사실이었다. 1989년 7월 16일 일요일 낮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한 카라얀은 그날도 소니SONY사장 오가 노리오(おおがのりお, 1930-2011. 1982년 콤팩트디스크 디지털 오디오 CDDA를 최초로 발매하였다)와 자신의 연주 영상을 상품화하기 위한 상담을 하고 있었다.
베를린 필과 촬영 중인 카라얀. 음악뿐만 아니라 제작에 관한 한 모든 일까지 참여할 정도로 그의 완벽주의는 다른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카라얀은 47세인 1955년부터 베를린 필의 수석 지휘자가 된다.
처음엔 미국에서 열릴 순회공연에 전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폐렴으로 사망하게 되자 당시 베를린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였던 카라얀이 베를린 필상임위원회로부터 만장일치로 차기 수석지휘자가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 3일부터 22일까지는 일본 투어를 하게 되는데, 이는 유럽에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극동지역을 카라얀만이 잠재적 시장으로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1953년도에 설립된 일본 소니의 영상, 음반매체와도 특별한 인연을 암시한 것이었다.
카라얀은 미디어 저장 작업에 관해 극도로 까다롭고 철저했다. 홍보용 사진 촬영까지도 옆에서만 찍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EMI, DG(Deutsche Grammophon), DECCA, RCA 등과 같은 여러 메이저 레이블의 판매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당시에는 장르를 통틀어 비틀즈The Beatles가 모든 음반시장의 선두에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클래식이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상업화는커녕 특정 계층의 문화로 치부된 클래식이 대중적인 상업화로 빛을 본 것은 카라얀이 등장한 이후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확실히 방대한 레퍼토리를 녹음하여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독보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라는 베를린 필의 음악적 성장보다는 잘 팔리는 곡만 연주하는, 철저히 녹음위주로 기술적인 발전에만 치우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반면에 시장에서는 비디오테잎이나 레이저 디스크 같은 새로운 신기술 시스템의 출시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후 소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CD라고 부르는 CDDA(Compact Disc Digital Audio)를 출시하게 된다.1)
그리고 1982년, 카라얀은 직접 텔레몬디알Telemondial S.A.M이라는 독자적인 음악제작회사를 설립하였다(이 시기에는 영상물의 비중이 더 높았다-글쓴이). 이로써 순수 음악적 요소 외에 카라얀이 촬영에서부터 제작에까지 모든 것을 관여하였다. 결국 음악의 본질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 것이다.
1982년 세계 최초로 CDDA가 출시되었을 때의 카라얀. 사진 속의 CD는 하노버의 도이췌 그라모폰사 것이다
카라얀의 이러한 신기술 매체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기술적인 목마름은 욕심을 넘어 차라리 집착에 가까웠다.
비행기를 중독되다시피 조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미국에서 제트기 비행기술까지 배우고 있었으며, 요트와 스포츠카를 잘 다루는 그를 보더라도 얼마나 기술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확고한지 알 수 있다.
여러 대의 스포츠카도 모자라 비행기까지 조정했던 카라얀. 실제 스피드 광이었던 그는 그야말로 미디어 기술에서도 폭주하였다
카라얀과 드라이브 중인 프랑스 모델 출신의 29세 연하 엘리에테Eliette Mouret.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그는 동일한 레퍼토리를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더욱 완벽한 기술적 보존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차라리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만도 60, 70, 80년대에 저장 기술이 한 단계씩 발전할 때마다 새로이 녹음하였다. 이런 '베를린 필의 상업화'로 단원들의 음악 활동이 단순히 녹음 대가로 먹고사는 돈벌이로 전락해 버리자 악단 내에서도 잡음이 많았다. 그럼에도 다수의 실력 있는 객원 지휘자들은 고전에서 현대 음악, 그리고 당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의 레퍼토리도 종종 무대에 올리면서 음악적 성장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베를린 필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베를린 필 이외에 객원으로 참여한 악단까지 자신의 끊임없는 욕구를 채우고자 하였다.
혹시 알까.
카라얀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클래식 계의 가장 핫한 골드 버튼 유튜버가 되었을지.
1)당시 CD 개발사는 필립스와 소니로 현 CD 규격의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CD가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총 연주시간인 74분 2초의 규격화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