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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Sep 11. 2024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습니다(3)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감정이 말에 실릴 때

 진료 예약 시간은 오후 4시 30분, 대기 시간이 1시간 30분이 넘어가는 6시가 다 되어가도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진료실로 호명되는 내원자들의 뒤통수를 보며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다음 순서는 내 차례라고 예상하고 숨을 고르는데 나보다 뒤늦게 온 사람이 먼저 호명되는 상황에 이르자,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정수리가 뜨거워졌다. 보던 책을 가방에 넣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접수대로 가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최대한 감정을 가라 앉혀 직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상담 못 받을 것 같아요. 매번 한 시간은 기본이고 두 시간 좀 안되게 기다려서 진료 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들어가신 분이 오늘 상담 종결이라 십분정도 소요되고 그 다음 들어가실 차례예요.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안될까요?"

 "다른 일정이 있기도 하지만, 없다고 해도 이런 상태로 진료를 받는게 무의미 할 것 같아요. 이런 식이면 예약 시간을  정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원장님께 그대로 전달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직원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려는데 나는 몸을 홱 돌려 병원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 무더운 날씨에 속에서 천불이 났다.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애써 화를 가라 앉히려고 숨을 깊게 몰아 쉬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등에서 목덜미까지 뜨거운 열꽃이 피는 듯 화끈거렸다.

 접수처 직원은 의례적인 인사치레로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카톡 메세지로 보내 왔고, 진료 마감 시간 즈음 원장님이 전화 연락을 드리려는데 괜찮냐는 의사를 물어왔다. 나는 알겠다고 했고,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와 약속된 시간까지 마음을 가라 앉히려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약속과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다. 한 두 번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내 유연함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다 2년이란 시간 동안 계속 반복되는 병원의 진료 대기 시간의 문제에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내원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한 내가 병원 경영에 대한 문제에 가타부타 할 만큼의 심적인 여력은 없었으나, 이날 나와 같은 행동을 하는 몇몇 환자들의 모습이 이전에도 더러 있었기에 객관적으로 보아도 병원쪽의 문제가 없다고 하긴엔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무리다.


 "오늘 기다리시다 돌아가시게 해서 죄송해요. 오전에 긴급 환자도 있었고 상담이 계속 밀리다 보니 대기 시간이 더 길어졌어요. 죄송합니다."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한 원장님은 사과로 말의 서두를 열었다.

 "원장님,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었는데 15분 진료에 짧으면 1시간, 길면 2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대기 시간이 정말 비효율적이고 내원자 입장에서는 예약 시간을 정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생겨요. 상담 시간에 할 말을 정리하면서 기다리다가도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몸도 지치고 화가 나요."

 감정을 분리해 말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내면 체계가 무너져 불안한 심리 상태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있는 내 입장에서 그 간극의 중심을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리고 말끝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긴급으로 환자에게 연락이 오면 제 입장에서는 진료를 볼 수 밖에 없어요. 당장 죽겠다는 사람에게 예약된 날짜와 시간에 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오랜 시간 기다리게 되는 내원자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병원 입장에서도 대기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장님의 단호한 대답은 어쩌면 병원의 대표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나도 개인적으로는 죽을만큼 내적으로 힘든 상태인 내원자의 입장이었으므로 당신보다 급한 환자가 있으면 당신은 후순위일 수 밖에 없다는 날이 선 말로 귀에 꽂혔다.

 사실만을 기반해 보자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고, 내과의도 외과의도 아닌 정신건강 전문의가 자신의 내원자에게 쓸 수 있는 화법은 아닌 듯 했다.

 "그럼 계속 이런 식으로 진료를 받아야 하나요?"

 내 말도 날이 선 채로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날아갔다.

 "대기 시간 없이 진료 받을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어요. 그랬다가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기분이 쉽게 상하실 테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치료에 시간과 마음을 내시라는 것 뿐이에요."

 다분히 감정적인 어투로 되돌아온 말은 내 입에서 짧은 한숨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내가 이 사람의 내원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미묘한 감정이 마음을 헤집었다. 꽤 긴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실까요? 다음 내원 일정 예약을 해 드릴까요?"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생각해 보시고 카톡으로 연락주시면 내원 일정을 조율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각자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이날 오랜시간 어려움을 겪었던 나의 속내를 내 보인 상대에게서 단절을 느꼈다. 친구도 가족도 아닌, 나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서.

 망망대해에 둥둥 떠다니는 부표가 된 듯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담 치료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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