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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13. 2024

바보 그건 신포도라고

쫓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바야흐로 대불안의 시대. 육아, 교육, 자기 계발, 취직... 어느 하나 가리지 않고 불안이 다 숨어들어 있는 지금. 그 기저에는 확실하게 높아진 평균값이 있는 듯합니다. 다들 어떻게든 자신이 생각하는 평균은 넘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평균집착의 시대라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불안과 평균집착 큰 차이는 없는 말이니까요. 

  남들이 가지고 있는 걸 가지지 못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꽉 채우고 있는 ‘생필품’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네요. 집에 냉장고가 없으면 세탁기가 없으면 에어컨이 없으면…. 매우 고통스럽고 또 누군가 찾아왔을 때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과거에는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 지금은 없으면 큰일 나는 것들이 되어버렸네요. 

  소파, 헤어드라이어, 컴퓨터, 청소기…. 진짜 넓게는 김치 냉장고까지. 이제는 생필품으로만 집안을 가득 채우는 시대가 왔습니다. 저 중에 하나라도 없는 집이면…. 확실히 주변의 다른 집보다 좀 못 살아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불편할 것만 같네요. 세상이 발전할수록 평균치는 하늘을 뚫는 것만 같습니다. 저 모든 생필품이 모두 있는 집이 ‘평균’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생필품으로 받아들여진 순간. 하나라도 없다면 그 집은 평균 이하의 집이 되어버리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짜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워.’ 삶의 질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고 기술 또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로 인해 평균치가 더더욱 높아져 버린 듯합니다. 취직해서 결혼하고 애 낳고 잘 키워서 별 탈 없이 늙은 뒤 편안하게 가는 것. 이것이 여태껏 선조들이 해온 ‘평범’이라면…. 지금은 왜 이렇게 멀어 보이는 걸까요?

  이 숨 막힐 듯 높은 평균의 벽을 보고 이젠 그냥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등바등 기어서 높은 벽 위에 있는 열매에 닿기보다는... 차라리 그 열매가 가치가 없는 신포도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죠. 그 열매가 사실은 좋은 것이든 실제로 별로이든 상관없습니다. 단지 시다고 생각하고 빨리 포기하는 게 더 편해지는 길이니까요.

 

  나온 지는 좀 오래된 말이네요. N포세대. 처음엔 삼포(결혼, 취직, 주택) 나중에 가면 뭐 연애. 취미, 건강, 자기 계발... 뭐 수도 없이 붙어서 결국엔 몇 개를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N포세대로 굳어졌습니다. 차라리 너무 힘든 길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좀 더 행복하고 나은 길을 찾아가려 몸부림을 치는 것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놓을 건 다 빨리 놓아놓고 더 의미 있는 다른 것이 있나 뒤적거리고 있네요. 사람이 너무 많은 지금 몰리는 레드오션 역시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돈 좀 안되고 힘든 길이라도 입에 풀칠만 된다면 재밌는 걸 하려 합니다. 

물론 이 모든 다른 길을 찾는 선택들이…. 남들 다하는 걸 못할까 봐, 남들이 다하니까 해야 한다는 불안의 해소 혹은 해방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불안으로 가득 차서 너무 힘든 사람들이 하는 회피에 가까우니까요. 선택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고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배제하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라면... 이러한 회피는 불안을 내적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여서 하나가 되어버린 괴적인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균의 벽은 높은 게 확실합니다. 너무 나 많아진 ‘생필품’이 그것을 하루하루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꼭 물건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성취나 행복마저도 어느 정도는 ‘생필품’화 된 듯합니다. 실패한 사람은 이젠 사람 취급도 받질 못하니까요. 그것도 하나의 과정일 수 있지만 다들 두려워하고 회피하려고만 하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노력해도 평균에 닿지 못하고 자꾸 미끄러지기만 한다면 그것만큼 힘들고 자괴감 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대다수의 남보다 못하다는 감각. 저는 너무 싫네요. 

  타인도 세상도 점점 믿기 힘들어지는 지금 차라리 신포도라 생각하고 빨리 벽을 떠나는 여우가 더 영리한 선택을 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버둥 치지 않고 금방 떠난 여우는…. 최소한 아프진 않을 것이며 운이 좋다면 땅굴이라도 하나 더 팠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물론 벽 위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 먹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건 좀 비겁하기도 하고 바보 같은 행위긴 합니다. 그 열매를 포기하면…. 평생 엄마 아빠를 이해하는 건 어려워 질 거고... ‘니 같은 애 낳아봐라. 내 맘 알지.’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눈물 흘릴 일도 없겠죠. 또 사랑하는 연인을 붙잡을 명분조차 없고 날 닮은 생명체를 보며 새로운 걸 깨닫는 순간도 없을 겁니다. 단지 신포도라면서 포기하기만 한다면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기 전에는 모르는 것으로 간주해야 저는 그게 좀 더 정의로운 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생각을 가져봐도…. 이미 세상과 사람에 지친 피곤한 젊은 여우인 제가 항상 느끼는 감각은. 벽은 너무 높고 열매는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네요. 저는 자연스러운 동물적 감각에 이끌려 높은 벽 위의 맛없어 보이는 열매를 포기하고 다른 걸 자꾸 찾는 수밖엔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맛있는 열매가 있진 않을까 하고 땅을 파듯 자꾸 글을 쓸 수밖에요. 물론 그러면서도 벽 위를 아등바등 올라가는 여우들을 보며 ‘바보 그건 신포도라고’조롱하겠지만. 속으로는 매우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들은 확실히 겁 없는 탐험가들이니까. 그들이 실패하길 바라면서도 속으론 존경할 수밖에 없는 슬픈 삶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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