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 변호사 칼럼]법률가에 대한 법적 평가
뉴스를 통해 쟁쟁한 법조계 선배들의 공직 진출 시도 소식을 종종 접한다. 법조인이 공직 후보자 명단에 오르는 순간 어김없이 그가 맡았던 사건들이 문제가 된다. 해당 후보가 진정으로 자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별론으로, 그의 능력, 성품, 리더쉽이 아닌 ‘과거에 맡았던 사건’이 그를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포함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누구를 변호했는가.’ 흉악범 기타 여론의 뭇매를 맞는 자를 변호한 변호사는 확실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부정한 자에게 유리하도록 그를변호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다.’라는 취지의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명제는 참인 명제일까?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의 정의가 무엇인지 철학적인 고찰을 하기 보다는 조금더 직관적으로, 단순하게 다가가 보고자 한다. 적어도 정의라면 ‘공익’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흉악범을 변호해서 약한 처벌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한다면, 그 흉악범은 다시 이 사회에 남아 악행을 반복할 것이기에, 흉악범을 변호하는 일은 공익에 저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형사법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가해를 정당화 하는 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처벌을 받은 모두가 우리나라의 국민이었다. 처벌은 말그대로 ‘국가가 국민에게 가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형사법을 규정할 때 명백히 죄가되는 행위가 무엇인지 한정하고, 법관이 내릴 수 있는 처벌의 정도를 한정하며, 제한적으로 처벌을 허용하고 있다. 국민에 대한 ‘가해’가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엄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유명한 법언에는 “범인 100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히게 처벌받는 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처벌을 면한 100명을 위한 법언이 아니다. 이는 억울한 한 명이 될 수도 있는 나머지 선량한 오천만 국민을 위한 법언이다.
그래서 우리 선량한 오천만 국민 중 그 누구든지 ‘엄격하게 제한된’형사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행위가 명확하게 금지되는 행위인지 판단받아야 하고, 그 사람이 잘못한 만큼만 처벌받아야 한다. 누구도 피고인의 입을 막아서는 안되고, 피고인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과도한 처벌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 처벌을 받음에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원칙을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판단받는 순간에 나에게도 이러한 원칙들이 적용될 수 있다. 이를 위해 흉악범에게도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설령 그것이 국민감정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럴수록 더더욱 원칙은 지켜져야만 한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나처럼 선량한 살마은 법정에 설일이 없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확언하건데, 충분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법정에 설 가능성이 있다. 변호사 일을 하다보면 실수로 또는 몰라서 범죄를 저지른 살마들이 부지기수이다.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증거가 없어서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고 처벌에 이르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정 영역에서는 유난히 입증책임이 검사가 아닌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입증책임 역전현상이 벌어지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런 와중에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장담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흉악범이 처벌을 면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죄를 지은 자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흉악범이 분명히 처벌을 받기 위해서는 입법부가 해당 행위를, 충분한 만큼 처벌할 수 있도록 법에 규정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수사기관이 그 흉악범의 죄를 적법한 절차를 통해 명백히 입증해 내야 한다. 따라서 흉악범이 처벌을 면했다면 범행 입증을 실패한 수사기관을 질책해야 한다. 흉악범이 법정형이 낮아서 국민감정에 어긋나는 약한 처벌을 받았다면 입법부를 질책해야 한다. 그렇게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