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치니 Mar 08. 2024

당신에게 4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크게 여유롭진 않지만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제 일을 스스로 할 만큼 컸다. 집안일은 끝이 없지만 대충하고 살기로 마음 먹었다.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많으며 즐기는 인생 보다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인생이고 싶다. 당신에게 그런 소중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감사하게도 4년의 시간을 얻었다. 단언하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에 그런 기회는 없었다. 늘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했고 무언가를 이뤄야했고 아이를 키워야했고 일을 해야했고 시간과 돈에 쪼들리거나 바빠야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멈췄다. 내가 입고 있던 허물을 그대로 벗어둔 채 다른 행성으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어쩌면 허물들은 잘 못해도 괜찮다는 좋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시간은 온전한 내 몫이 되었다.


 노력하며 산 인생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도 될 것을 참 유난스럽고 거창하다. 하지만 4년은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서 다시 '대학'에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대학을 두 번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적당한 성적에 맞추어 관심 분야대로 경영학과를 갔다. 취업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운 좋게 가고 싶었던 회사에 갔지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관계로 그만두었다. 터무니없이 미대에 가고 싶었으나 현실과 타협을 잘하는 나는 결국 수능을 보고 교대에 들어갔다. 그 이후 선생님이 되었다. 8년 이상의 대학 생활 동안 분명히 성장했고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꽤 즐거웠지만 학문의 깊이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는 핑계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다시 대학에 가고 싶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까다로운 입시 전형 따위는 없다. 나의 자격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등록금은 무료이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공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좋아하는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저명한 학자들의 책을 전공서적으로 탐독할 수 있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인문 무엇이든 다 좋다. 스펀지처럼 그것들을 빨아들이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못 되어도 세상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고 싶다.


 나는 밀레니엄과 함께 스무살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함께 경험한 세대이다. (그건 참 복 받은 일이다.) 그리고 한창 활용도가 높은 나이에 시공을 초월하는 기술들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 그게 자연스러워졌고 덕분에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모든 일을 밤낮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나의 스승님들이 계시다. 줌으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져오지 못한 책은 밀리의 서재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엠티도 동아리 술자리도 없는 건 좀 아쉽다. 청춘이었다면 가슴 먹먹한 연애도 다시 해보았을텐데. 지금 1학년이니 새내기나 마찬가지이다. 교양 과목으로 이것저것 들어보며 더 공부할 것들을 찾고 싶다. 처음부터 빡빡하게 20학점을 채울 필요는 없다. 나는 어떤 분야에서 식견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며 전공을 찾아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4학년을 마치기 전에 멋진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기를. 다시 나의 행성으로 돌아갔을 때 살아갈 삶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기를.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보는 힘을 기르기를. 

작가의 이전글 이름 붙인 것들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