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담갔다고 차마 자랑을 못하겠다. 한국 사람들이 네이버밴드나 카톡방을 통해 만들어 파는 김치가 제법 먹을만한데, 굳이 타국까지 와서 담가 먹는다니 몹시 까탈스럽게 보인다. 우리집에 김치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김치는 어쩌다 상에 올라오는 메뉴일 뿐이다. 큰 아이는 씻어서 끓인 김치찌개, 김치볶음밥을 먹는 정도이다. 둘째는 무국이나 삼계탕에 밥 말아먹을 때 흰 줄기 부분만 얹어먹는 수준이다. 물론 내 나라의 정체성 덕분에 개운하게 김치가 당기는 날이 있지만, 그 정도 필요로 김치 담글 동기를 부여하기란 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김치를 담갔다고 하면 모두들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눈빛은 '굳이, 유난스럽게'로 비치는 것일까. 나는 왜 김치를 담그는가?
몇 주 전부터 김치가 거의 떨어져갔다. 한인마트를 갈 때마다 실한 배추가 들어왔는지 살펴보지만 영 시원찮다. 다른 물건들만 장을 보고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어느 날 마침내 마음에 드는 배추를 만났다. 그 시각 정확히 오전 10시 29분. 호기롭게 배추 5포기를 카트에 싣고 빠진 부재료가 없는지 살펴본다. 이번이 네 번째 김치 담그기인데도, 어느 블로그의 레시피를 검색해 다시 숙지해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배추를 반으로 갈라본다. 다행히 노릇노릇 속도 괜찮다. 부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스케일이기 때문에 안방 화장실에 커다란 대야를 꺼내놓고 배추를 절인다. 이렇게 소금을 많이 쓸 일인가 싶으면서도 내 김치는 소중하니까 팍팍.
배추 절이기는 '일'이다. 여린 배추 이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살살 물에 씻는 일, 배추를 담을 대량의 소금물을 만드는 일, 그 안에 배추를 적시고 사이사이 소금을 뿌리는 일, 더하기 허리를 굽혔다 폈다 반복하는 일. 무사히 '일'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달래며 쪽파를 다듬고 생강을 까는 시각 12시 48분. 배추는 7시간 정도 절여야하므로 그 사이 육수를 끓이고 찹쌀풀을 만들고 사과, 배, 무, 양파, 마늘 등을 씻어 다듬어 둔다. 틈틈이 소금물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배추 뒤적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오후 4시 03분. 엄마가 오늘 김치를 담근다는 말에 잘 먹지도 않으면서 설레한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처럼 절인 배추에 김치소를 넣고 수육을 올려 보쌈을 먹는 것도 아닌데. 군침 후루룩.)
저녁 7시 11분. 절인 배추를 드디어 헹군다. 레시피대로 시간은 잘 지켰는데 소금의 전투력이 부족했는지 배추에 아직 힘이 남아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투압으로 수분이 분명 빠져나갔음에도 무거워진 배추 몸뚱이를 고이 채반에 받쳐 물기를 뺀다. 4쪽 곱하기 5포기는 모두 20쪽. 김치 넣을 통도 씻어 건조시킨다. (별게 다 '일'이다.) 그 사이 제일 중요한 김치소를 만든다. 믹서로 갈고, 채칼로 밀고, 칼로 자르고, 갖은 양념 넣고 버무린다. 널찍한 곳에 자리깔고 앉아 드디어 배추 사이로 속이 들어간다. 저녁 8시 정각. 구경꾼이던 딸내미들이 자기들도 해보겠다며 비닐장갑을 낀다. 옜다. 두 쪽씩만 해보렴. 김치통에 차곡차곡 김치 주인의 노고가 쌓인다. 맛있어지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결국 뒷정리까지 끝내고 허리를 펴보니 밤 9시 반이다. 하루 종일 김치 담그기에 온 힘을 쏟았다.
사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그랬을까. 과중한 피로와 함께 후회의 파도가 밀려온다. 너무 피곤하니 일단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하자.
다음날 눈을 떴을 때, 환청일까 어디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속닥속닥 속닥속닥" 무언가 살아서 숨쉬는 소리도 들린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누구일까? 뚜껑을 열어보니 일순간 온 집안에 톡 쏘는 매운 향이 퍼진다. 참 복합적인 풍미. 그들은 강렬하면서도 빠르고 신선하면서도 오래된 시간의 공적 같다. 마치 호흡하듯 자신의 가슴을 한껏 부풀어 올리고 있다. 마법사도 아닌데 밤사이 내가 만든 김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김치를 담그고 뚜껑을 꼭꼭 닫아놓았으니 누군가 외부에서 들어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느 조화가 이 과정의 주도자일까. 김치 담그기에 거쳐간 공정을 되짚어 보며 재료의 모둠이 김치가 된 순간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 우리가 김치를 '김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말이다. 도대체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Leuconostoc mesenteroides)', '락토바실러스 플랜타룸(Lactobacillus plantarum)' 같은 어려운 이름의 유산균들은 어디서 온 걸까. 김치를 담그며 이 과정을 경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신비하다.
사실, 검색을 통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과학적 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치를 발효시키는 유산균들은 자연에서 기원하며, 주로 배추, 무,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등 김치의 재료와 주변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합니다. 이 균들은 재료를 씻거나 다듬는 과정에서 이미 표면에 붙어 있으며, 김치를 담글 때 자연스럽게 배추나 무 등에 접촉하게 되어 발효 과정이 시작됩니다. 또한, 소금물에 절이는 과정에서 소금 농도가 적절히 조절되면 유해한 균은 억제되고 유산균이 활성화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발효가 잘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유산균들은 김치 속에 포함된 당분, 젓갈 속의 아미노산, 식이섬유 등을 먹고 삽니다. 유산균들은 이 영양소들을 분해하고 젖산을 만들어내며 발효가 진행되고 특유의 맛과 향이 형성됩니다.(출처: ChatGPT)"
다시 한번 경이롭다.
만들어 본 사람의 입장으로 몹시 까다롭고 예민한 관점에서 굳이 설명하자면, 과정 상 위생에 대한 불신과 재료의 품질에 대한 불만족, 내키지 않는 맛이 김치를 사 먹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나도 한국에서 대기업의 브랜드를 믿고 김치를 종종 사 먹었었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올린 김치 레시피에 포함된 공정의 단순함(배추를 소금에 절인다. → 갖은 양념을 한다. → 절인 배추 속에 소를 넣는다. 끝. 참 쉽죠?)이 매번 '이건 힘든 일이 아니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오차가, 그러니까 안 좋은 배추를 만났다던가, 때깔이 별로인데다 텁텁하기까지 한 고춧가루를 사게 되었다던가, 쿰쿰한 향이 나는 새우젓을 넣게 되었다던가, 소금의 양 조절에 실패했다던가, 구매한 배가 심지 가득박힌 요상한 맛이었다던가, 배추가 절여지는 정도가 적절하지 않았다던가, 적정 온도에서 적정 시간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던가, 한 끗 차이로 김치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김치를 담그겠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담가놓은 김치가 살아 숨쉬기 시작할 때 느끼는 묘한 기분은 표현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치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키우는 것 같은 환희가 있다. 그 맛은 또 얼마나 예술적인지 내가 넣은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적 반응은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김치가 제법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제 김치냉장고 안에 주방장의 분신처럼 언제든 나를 도와줄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 김치는 다른 음식들과 조화로운 반찬이 될 뿐만 아니라 메인 요리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또한 엄마와 내가 그랬듯, 우리 아이들도 엄마의 김치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고 도와주며 정성과 귀함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 속에 기억의 스티커를 붙여놓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음 김치 담그기를 기약하지는 못하겠다. 이것은 진정 사랑과 미움의 총체적 혼돈이니까.
그냥 하는 말: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이라는 유치한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내 대답은 '김치찌개'이다. 그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가장 질리지 않을 음식임에는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