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은 유난히 분주했다. 매일 체육복만 입고 다니던 큰 아이가 정말 오랜만에 교복 치마를 꺼내 입었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부루퉁하게 왜 졸업사진을 지금 찍는거냐며 졸업사진은 졸업을 할 때 찍어야 하는 거라고 했다.
작은아이는 아침을 먹으며 밴드에 접속해 시간표를 확인하고는 1교시부터 수학이라며 진짜 싫다고 했다.
모두가 아침을 먹고 각자의 사회적 공간으로 흩어지고 난 후 커피 한잔을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지낸다. 그러니까 집안일을 하는 시간 말고, 아이들의 음식이나 간식을 챙겨주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외출도 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도 없다. 공식적으로 만나야 하는 일도 잘 없다. 술을 좋아하지도 쇼핑을 좋아하지도,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보통 일곱 시간 정도 앉아있는 것 같다. 앉아서 뭘 하느냐면 대부분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도 아니면 엎드려서 잠깐씩 존다.180도로 등을 땅에 대고 눕는 것은 어두워지면 잠을 자기 위해서이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등을 땅에 대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휴일에도 적용된다) 만약 내가 해가 떠 있는데 누워있다면 그것은 몸이 많이 아픈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내가 누워있으면 아픈 줄 안다.
사회적인 관계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므로 만들지 않고 사회적인 활동도 역시 마찬가지다. 때로 고독할 때도 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굳이 만들지 않는다. 보통 그런 말들을 하지 않나. 스님들은 속세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괴롭지 않을 거라는 말. 어떤 누군가는 솔직히 전업주부가 일하는 엄마보다 편하지 않느냐고 하기도 한다.
속세와 단절되어 있는 스님은 괴로움이 없을까?
거의 스님처럼 살아가는 나는 괴로움이 없을까?
전업주부니까, 사람도 만나지 않고 글 쓰고 책 보고 공부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을까?
내 주변의 물리적인 환경에는 자극물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자극물(tv,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는 한 자극이 될 만한 것은 가족들 뿐이다. 가족들이 출근이나 등교를 하게 되면 나는 혼자가 되는데 그때는 자극물이 거의 사라지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렇게 예쁜데도 괴로움이 찾아올 때
묵묵함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안에 괴로움이 생겨날 때가 있다. 좋아하는 공부와 독서를 하는데, 좋아하는 글을 쓰는데. 누굴 만나는 것도 아니고 힘든 운동을 하는 것도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마음 때문이다.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이 너무 힘들고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마음을 살펴봐야 할 일들이 많았다. 오랜 시간을 그러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화면과 자막이 함께 나오는 외국영화처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장면을 해석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또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오면 그 사람으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그 감정의 뿌리는 무엇인지도 자막과 함께 재생된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만났을 때 재생되는 시간과 다섯 사람을 만났을 때 재생되는 시간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람을 잘 안 만난다. 재생이 계속 일어나므로 복잡해지니까. 조절이 되면 좋겠는데 조절이 잘 안 된다. 반사적 재생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재생을 파악하고 평화로워질 때도 있지만 괴로워질 때도 있다. 괴로워질 때는 사십여 년 간 살아오며 사용했던 방식이 또 반복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다.
나를 괴로움으로 이끄는마음은어떤 마음일까? 그것은<무엇이고자 하는 마음>이다.내 괴로움의 근원은 언제나 그 지점에 있었다.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 무엇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절박하게 <무엇이고자>해왔다는 것. 사랑받는 사람이고자 했고, 노력으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고자 했고, 상실을 극복하는 사람이고자 했고, 아픔이나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이고자 했고, 분쟁이나 다툼을 조율해 조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이고자 했고, 등등등...
그 방식의 핵심은 모두 타자가 존재한다는데 있었다. 기준이 있었다. 자꾸만 노예로운 감정을 선택하는 것, 괴로움의 근원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나로 충분하다면 무엇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나인 게 괜찮다면 왜 괴로울까?
토끼는 거북이를 보았다. 거북이보다 빠르기 위해 거북이에게 맞춰서 속도를 조절했다. 그런데도 거북이가 이긴 이유는 부지런함 때문이 아니라 묵묵함 때문이다. 거북이의 길에는 자기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거북이는 그래서 자기만의 승리를 거두었다.
묵묵하다는 것은 외부의 기준이나 판단, 혹은 환경의 메시지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일이다. 뛰어난 실력이나 타고난 재능보다 훨씬 갖추기 어려운 덕목, 빠르게 변하는 토끼 같은 세상에서 어쩌면 묵묵함은 미련함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기술일지도 모르는 일이다.앞으로 아주 많은 여러 날들 동안 내가 묵묵했으면 좋겠다. 묵묵하고 고독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누구를 롤모델 삼지도, 누구를 존경하지도 말고 기꺼이 혼자서 갔으면 좋겠다. 거북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