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식도암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장례식에 갔던 기억도 없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명확히 들은 적도 없다. 가끔 아버지가 붉은 피를 토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마다 무서워서 엄마 뒤로 숨곤 했는데, 그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더 이상 집에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가 엄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 집에서 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우리 가족의 불행이 모두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는데도 죽이고 싶다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그가 불쌍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엄마가 아버지를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즐겨보던 옥편에 낙서를 하며 놀았다. 왜 어린 내가 인형이나 그림책 대신 옥편을 가지고 놀았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무언가로 달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저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사실만이 무겁게 다가왔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그 부재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움은 그렇게 내 안에서 천천히 자리를 잡았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졌다.
아버지는 시골집 마당에서 밤을 까서 내게 보여주곤 했다. "이게 밤이란다."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서 옷에 쓱쓱 닦아 내 입에 넣어주었다. 대추의 자연스러운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광주의 어느 거리에서 아버지는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서둘러 걸었다.
내게 아버지는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상실이 아니라 실종이었다. 상실은 포기하게 만들지만, 실종은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을 잃으면 시신이라도 찾기를 바란다. 시신이라도 찾아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입혀 보내줄 수 있다면 고통스럽더라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실종은 그가 어딘가에 여전히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남기며, 그리움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 희망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잔인한 희망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하게 된다.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감정은 마치 몸에 남은 체증처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방해한다. 우리는 모두 소화되지 않은 실종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사람이든, 나 자신에 대한 어떤 부분이든.
아버지가 사라진 지 벌써 36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애도한 시간은 고작 5년에 불과하다. 조금 더 일찍 애도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깊은 그리움과 무가치감, 그리고 어쩌면 내 삶의 어두운 생각들이 모두 이 첫 번째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소화되지 않던 실종은 이제 상실이 되어 소화되고,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단단히 잡았던 그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사는 게 힘들 때마다 그 손길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자신을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단호히 말하는 것 같다. "꼭, 살아야 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