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언니가 결혼을 하는 동시에 쩌~~기 멀고 먼 경상도 봉화를 지나 석포라는 곳에 1년여 거주하던 시절이었다.
형부가 ㅇㅇ제련소 근무하면서 회사 사택에 사는 동안 우리 자매들에게도 많은 추억이 쌓이던 때였다.
2호 언니와 나, 5호가 틈만 나면 껀수 만들어 수시로
밤 기차를 타고 그곳을 드나들었다.
청량리에서 11시 경. 출발하는 열차에 오르노라면 콩나물시루는 쨉도 안되게 미어터졌고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지루함을 달래며 컴컴한 동굴같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순간도 간혹 있았지만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이기지는 못 했다. 두어 시간 넘게 달리고 달리다 대전역엔가 잠깐 정차할 때면 후다닥 화장실을 다녀오기 무섭게 퉁퉁 불어 터진 우동을 들이마시듯 먹었다, 더 이상 불을 것도 없이 툭툭 끊어지던 면발이 면 인지 모시 긴 지 생소하기만 했다.
새벽이라기엔 좀 이르고 귀신이 출몰하는 시간대인 젤 깊은 어둠이 마중한다는 1~2 시 경에 깜빡깜빡 졸던 잠 쫓아내며 마시던 우동국물은몸 속 깊은 곳까지 따뜻함을 선사해 주었다.
부시시한 눈 비벼가며 다시 기차에 올라 거기서 또
두어 시간을 달리고 달려 석포역에 내릴때면
새벽 4~5시인 듯한 기억...
어스름한 새벽시간 , 언니와 형부 역시 반가움이 가득한 함박웃음으로 눈 비비며 마중을 나왔고
기차 도착시간에 맞춰 콧구멍만 한 간이역이 잠깐동안 인산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부분 우리 자매들처럼 사택에 상주하는 친 인척
방문이 대다수였다. 주말을 이용해 밤기차로 오르내리는 급박한 시간이었지만 젊음이 무기였던 때라 힘들고 고단함보다는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았다.
졸업 후 잠깐 시간이 널널하던 내가 한달 여 혼자 내려 간 적이 있었는데 사택도 직급별로 달랐던지 대기하는 기간에 잠시 마당 넓은 독채에 거주하기도 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눈에 뜨이게 제법 큰 규모였던
그 집은 무슨 방석집인지,기생집인지, 술집이었다던가 그런 쓰임새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부분 객지 사람이 바글대는 동네에서 노상 열려있는 커다란 양철대문을 들어서면 기억자 형태의 대여섯 개 방이 쪽마루와 연결되어있었다.
본체 인 듯한 큰방에 거주하던 1호네 부엌 옆으로 올망졸망 사 남매가 살았는데 코찔찔이에 더벅머리에
전형적인 시골아이들 다웠다.
그 애들 아버지는 없는 듯 했고 엄마가 다른 지방에서 무슨 장사를 하는지 수시로 집을 비우는 상황이었다.
대청마루를 지나 끄트머리방에 내가 기거했는데
으스스한 시골 분위기에 아무나 오이소, 어서 오이소 ~~늘상 열려있는 대문이 영 께름직했다
.다 낡아 톡 건들기만 해도 녹슨 양철이 후두두둑 부서져 떨어질 것만 같은 대문을 커다란 막대기로 고정시켜 놓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손 대지도 말고 닫지도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미닫이 창호지 문이며 활짝 열린 대문이며 도저히 무서워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엣날 옛적 네모난 쇠모양에 구멍만 동그랗게 만들어진 잠금쇠 같지도 않은 고리에 숟가락을 푹 꽃아 잠궈 보기도 했지만 불안하긴 매 한 가지였다.
다른 건 다 간댕이 큰 년 소리 들어가며 거칠 것이 없었지만 낯선 시골 동네의 컴컴한 어둠은 간댕이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20대 처자가 신혼방에 낑겨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밤이 오는 것이 무서운 악몽이었다.
불침번도 아니고 자다 깨다 두려움에 떠는것이 안 되겠다 싶어 이 삼일 지나 머리를 굴린 결과가 남매네 방에 가 껴 자기로 혼자 맘먹었다.
1호한테만 대충 말을 흘리고 내 맘대로 그 방에 무대뽀로 처 들어갔다.. 젤 큰 아이가 열한 살이었고
그 밑으로 두세 살 터울에 막내가 네 살이었다.
1호한테. 이미 전해 들었던 터라 어린아이들만 남기고 며칠씩 집을 비우는 그 집주인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 엄마가 있었다면 그 좁은 방에 내가 껴 잘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머리를 들었다. 염치도 없이 불쑥 처 들어 가 니네랑 같이 좀 잘께...하는데 네 녀석이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저건 뭐지? 외계인 보듯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언 니가 무서워서....저 방에서 잘 수가 없더라.
쫄보 마음과는 달리 하나도 안무서운 것 처럼 떳떳하고 당당하게 얘기를 꺼내니 그나마 맏이가 너풀너풀 얘기도 잘하고 배시시 웃으며 받아주었다.
추레한 환경과는 달리 이목구비마저 또렷하니 이뻤다.
언니가 이 집 너~무 무서워서 잠이 안 오더라..
귀신 나올 거 같어...하니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지들끼리만 있다 보니 첨엔 엄청 무서웠다고 , ..
진짜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 밤이 오는 것이 싫었다고 했다. 바람소리만 들어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벌 벌 떨었는데 이젠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다며 새 아줌마가(1호) 이사와 훨씬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흉흉하고 덩그러니 집채만 커다란 곳에서 방 하나에 의지하고 지냈을 아이들이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도 좀 지나면 안 무서울꺼에요, 하는데 어린 아이틀 공간으로 피신해 있는 내 모습이 웃기고 한심스러웠다.
얘야, 익숙해질 무렵이면 언닌 이미 가고 없단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이 더럽든, 냄새 나든 어쨌든 낑겨 잘 곳이 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았다.
안된다고 하면 어쩌나 은근 걱정했는데 내치지 않고 받아 주는 꼬마주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때에 쩔은 이불에 퀘퀘한 냄새며 네 아이의 씻지 않은 체취까지 곁들였지만 근심 걱정 싹 날리고 맘 편히 단잠, 꿀잠에 퐁당 빠져들었다.
오랫만에 꿈 길을 거니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다 집어 삼킬듯 한 거센 바람에 덜컹거리는 대문 삐그덕 소리나 뉘엿뉘엿 일찌감치 해 떨어지기 무섭게 내려앉는 첩첩산중 칡흙 같은 어둠도 거뜬히 비껴갈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열한 살 똘똘한
시골 소녀의 이름은 선영이었다.
그 애 나이 따블 숫자였던 내게 스스럼없이 조잘조잘 얘기도 잘 하고 눈치도 안 주었던 기억 속의 어여쁜 아이! 어떤 중년의 모습으로 변했을지 한 번씩 떠오를 때마다 그 시절의 겁쟁이 내 모습을 클로즈업 해 본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석포에서의 첫 봄을 맞는 1호와 네 자매가 봄 나들이 겸 다시 뭉쳤다.
금욜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하니 만삭의 배를 내밀며 1호가 모든 준비를 해 놨고 우리가 먼저 가 자리 잡으면 형부가 퇴근하는 대로 합류 할계획이었다.
극성 네 자매가 고기 구워 먹을 짐을 꾸려 산에 오르니 경치도 좋고 공기는 더 좋고...한적하고 조용했다.
자리를 펴다 보니 사방 여기저기 낯설지 않은 것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온 천지가 깻잎 밭이었다.
아이구 이게 왠 떡이냐 싶어 팔 걷어붙이고 셋이서 닥치는 대로 따기 시작했다;
배부른 1호는 앉아서 따다 주는 걸 차곡차곡 정리 하느라 바빴고 2. 3. 5호는 눈 보다 더 빠른 손을 쉴 새 없이 혹사시켰다.
이거 봐라 깻잎 장사해도 되겠다.
이거 다 팔면 한 몫 두둑이 건지겠는데..
근데 이렇게 많이 자라도록 왜 하나도 안 따 가지?
혹 누가 심어 놓은 건 아닐까?
에이, 이 깊은 산속에 누가 심었겠냐.
씨가 떨어져 지들끼리 이리 실하게 자랐을 거야...
깻잎 속에 파 묻혀 씩뚝꺽뚝 농담 따먹기도 해 가며
빠른 손놀림으로 한 무더기씩 따 모으니 꽤 수북했다.
얼마나 많은지 따고 또 따도 지천에 널린 채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것이 깻잎이었다.
셋이서 땀 흘려 이룬 수확이 뻥 좀 보태 작은 산을 이룰 무렵 헐레벌떡 형부가 올라왔다.
네 자매가 자랑삼아 큰 일을 해치운 것처럼 깻잎이 이렇게 많더라고,.
장에 내다 팔아도 될 정도라고 수다를 이어갔다.
따고 또 따도 깻잎이 온 산에 널려 있더란 얘길 하니 형부가 단칼에 싹둑 잘라 찬물을 끼얹었다.
에이.. 이거 깻잎 아니야. 딱 보면 몰라?
봐, 깻잎 향도 없잖아....깻잎 향이 얼마나 진한데.
,두둥...이게 대체 머선 일이고!
그제서야 넷이 킁킁대며 깻잎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맡아보니 정말 깻잎향이 나질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땀 찔찔 흘려가며 몬 바보짓을 한 건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리 서울 토박이 촌년들이라지만 딱 봐도 모를 깻잎도 구분 못하는 얼뜨기들 일 줄이야.
누가 우리 자매들 좀 말려줘유~~~
작은 산골 동네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앞 다투어 일어나던 그 때 그 시절!
춘향이 뺨 칠 만큼의 어느 집 아이가 그네를 얼마나
요란하게 탔던지 너무 앞으로 달려 나가 변소에 풍덩 빠졌다가 똥독이 올라 굿을 했다던가 수소문 해 약을 썼다던가 하는 소문도 있었고,
사택마다 돌아다니며 보따리상 모냥 물건을 팔던 할매가 있었는데 낡고 닳아 꼬질한 수첩에 나름 구분해 정리하는 것이 신기해 보이기도 했었다.
글씨도 모르는데 알파벳 순의 사택을 돌며 물건을 팔고 월급날이면 결제를 받고 한 치의 오차도,없이
일사천리였다.
1호가 살던 F사택을 거침없이 기억해 내길래 까막눈
이라며 어찌 F 를 찾는겨..의아해 물으니 각 동의 사택 앞에 나름 돌멩이를 얹어 표시를 해 둔 모양이라고 했다. 살아남기 위한 작은 생존의 몸부림을 하던 꼬부랑
할매의 지혜가 커다란 바위처럼 보이던 순간이었다.
남매의 엄마가 아이들만 남긴 채 사택사람들과 떼 지어 영주로 장을 보러 가던 날, 그 날 따라 새로 산 두둑한 잠바를 입히며 잘 놀고 있으라고, 동생 잘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단다.
아이들과 어울려 썰매놀이를 하던 중 대여섯 살 사내아이가 어설프게 언 웅덩이로 미끄러지듯 빠졌고
나마지 아이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구경꾼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퇴근길 사택의 아빠들이 그제서야 사태파악을 했지만 아이의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도 귀동냥으로 듣던 시절이었다.
1호네 바로 옆 E동에 살던 신혼부부는 Y대를 나온 커플이라고 했는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새 신랑은 집에만 오면 한복으로 갈아입고 말투도
여보/ 당신이 아니라 부인 나 왔소... 하며 들어서기 무섭게 어서 오세요 서방님. 하며 곱게 치장한 한복차림의 아내가 맞아준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젊은 사람들이 참 희한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밉지 않아 보였고 오히려 신선한 느낌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는 부부였다.
대부분 인서울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단기간에 스쳐가던 그 시절의 사택풍경은 근거리의 탄광촌과 더불어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큰 언니네의 타향살이 덕분에 밤기차도. 원 없이 타 보고 산골에서의 소소한 추억도 나름 쌓이던 내 20대의 몽글몽글한 추억이었다.
그곳에서 첫 조카가 태어나고 형부는 짧은사택생활을 거쳐 대기업 본사로 입성을 했다.,
안성 갑부의 장남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해 J 대 화공과 출신인 형부는 총 학생회장도 역임하는 수재였는데 이력서 심부름을 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우편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 시절이라 근무하는
형부대신 밤 기차 벗 삼아 수시로 드나들던 내가 형부 이력서를 직접 들고 본사에 접수 할 때 살짝 열어보며 알게 된 특급 비밀이었다.
반듯하고 성실하고 딸부잣집의 맏사위로 아들 노릇까지 톡톡히 하던 형부는 늘 한결같고 변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파릇파릇한 시절을 거치며 살아온 날 들보다 남은 날이 더 가까운 어느 날 문득 주변단지에 널브러진 요 깻잎 비스므리한 것을 보며 새삼 떠올랐던 석포시절 ~~
딱 봐도 모르냐던 요 아이의 이름은 깻잎인 듯 깻잎 아닌 깻잎 같은 바로오~~~수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