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흑백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맞고 틀림으로 나누는 데 익숙했고, 말끝마다 판단이 붙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건 마치 습관처럼 굳어 있었고, 모든 상황에서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스스로에겐 이유가 있었고, 실수엔 변명이 따랐다. 때로는 실수라는 단어조차 쓰기 싫어 ‘상황이 그랬다’고 말하며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양심은 조용히 속삭였다. 너, 이중적이야. 비겁해. 그 생각이 머무는 날엔 마음이 무거웠다. 진실을 알아도 외면했고, 스스로를 왜곡했다. 나는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탓했지만, 실은 나 자신이 제일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를 드높이기 위해 남을 깎아내렸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더 외로워졌다.
어느 날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또 다른 친구에 대해 험담을 했다. 내 입에선 익숙한 말투였다. 남을 깎아내려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분위기상 가볍게 흘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실은 마음속 깊은 비교와 질투가 만들어낸 문장이었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친구는 짧게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단순한 다섯 글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 친구가 서운했다. 속으로는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억울함이 들었고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다섯 글자가 내 마음을 헐벗게 만들었다. 내가 내 실수를 감쌀 때 자주 쓰던 말, 나를 위해 쓰던 그 말을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꺼내 주었다. 그 순간 그 친구가 자애롭고 멋있어 보였다. 말 한마디였지만 그 말에는 성숙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말을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 작게 실천해보기 시작했다. 말보다 실천이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도 계속 시도했다. 어느 날 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 첫째가 장난을 치다 TV를 망가뜨렸다. 집안이 정적에 휩싸였고,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었고, 목소리가 올라가려는 순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럴 수 있지" 딸아이는 눈치를 보며 내 눈을 피했다. 이상하게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내가 먼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다칠 뻔했네. 그날 오후, 아이는 조용히 내 옆으로 와 말했다. "아빠, 내가 잘못해서 TV가 망가졌어". 그 말 속엔 두려움과 미안함, 그리고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날의 작은 용서가 우리 사이의 공기를 바꾸었다. 이후로 아이는 실수했을 때 숨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솔직함을 배우게 된 건, 나였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동료가 몸이 아프다며 휴가를 냈고, 그의 업무는 내가 모두 떠맡았다. 나는 큰소리 없이 그의 몫까지 일했다. 그런데 며칠 후 SNS에서 여행 사진을 보게 되었다. 속에서 열이 확 올라왔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연락했을 것이다. 이건 아니지 않냐며 따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참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되뇌었다. "그럴 수 있지" 화는 그대로 있었지만 말로 뱉지 않으니 곧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던 듯 지나갔다. 며칠 후,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사실 여행이었다고, 말하기 미안했다고,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그는 나에게 더 많이 마음을 열었다. 관계는 때때로 정의를 따지는 대신 너그러움을 선택할 때 깊어진다.
"그럴 수 있지" 라는 문장은 감정을 다스리는 문장이자 관계를 지켜주는 태도였다. 처음엔 억지로라도 말해야 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 마음이 먼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예전엔 그 말을 몰랐다. 그래서 쉽게 상처를 주었다. 맞고 틀림을 따지는 데는 익숙했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는 참 서툴렀다. 마음을 한 걸음만 늦춰도 상처는 피할 수 있었다. 그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제는 우리 딸들에게도 이 말을 알려주고 싶다. 이 말은 무조건 넘기자는 말이 아니다.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판단을 서두르기 전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여지를 주자는 뜻이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감정을 느껴도 괜찮고, 때로는 나 자신도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한 태도이자, 나를 향한 너그러움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리고 스스로를 탓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해보면 좋겠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 한마디가 우리 모두를 이해로 이끄는, 조용한 시작이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