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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백양 Jan 26. 2024

기억되거나 기억이 되어야 할



사람을 볼 때 손을 먼저 본다. 사실은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얼마나 잘났는지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그게 더 예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쉽지 않다. 손을 먼저 보는 것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얼굴을 악수보다 자주 상대방에게 내밀기 때문이다.
 
 손은 솔직해서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모두 쥐고 있다. 한 번 자신의 손을 바라보자. 손톱의 깎인 정도, 관절 부위의 주름,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의 시작 부분까지. 형태적인 차이를 넘어서 손은 우리만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미묘한 감정을 닮아 있다. 이를테면 화가 난 사람의 손을 생각해보자. 차분한 말과 표정에 비해 힘껏 힘이 들어간 주먹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못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화났니-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 손에 그득한 감정들이 질문보다 앞서서 우리에게 휘둘러지고 있으므로.
 
 손이 정말 예뻤던 사람을 기억한다. 그, 혹은 그녀와는 좋지 않았다. 자주 싸웠고, 자주 서로를 밀쳤으며, 자주 밤새워 감정을 쏟아내곤 했다. 어떤 통화는 끊어진 후에도 이어져서, 나는 연신 하릴없이 손끝만 보는 채로 지냈었다. 좋은 사이였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감정은 대단히 미묘한 것이어서 하룻밤 만에도 순식간에 안색이 바뀌는 텃밭의 꽃들처럼 사람과의 관계를 알 수 없는 것으로만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손이 기억난다. 그, 혹은 그녀의 손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손톱 주변의 물어뜯은 흔적마다 피가 배어 있었다. 과도하게 장식된 손톱 또한 곳곳에 잔금이 가 있었고, 뭔가를 만지기엔 불편한 길이로 뻗은 손톱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옷의 실밥을 그에게 빼앗기곤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대개는 아픈) 그는 또 입에 손을 가져갔고, 안그래도 깡마른 손은 조금씩 질량을 잃어갔다. 나는 그가 손을 다 뜯어먹기 전에 대화를 멈춰야 했다. 그 다음에는 항상 그의 손을 세게, 무척 세게 붙잡았다. 끈끈한 피가 묻어있던 손은 내 손 속에서 조금 일그러진 채, 그러나 벗어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손이 무척 예쁜 사람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오래된 시집의 낱장들처럼 펄럭였고, 대화의 격렬함과 상관없이 사람을 쓸어내리는 버릇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사람과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한동안 사람들의 손만을 보고 살았다. 잘 정돈된 손부터 굳은살의 질감이 그득했던 투박한 손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손을 찾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잔뜩 물어뜯긴 자국이 봄날의 진창처럼 또렷했던, 그와 다시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많은 손들을 거쳐왔지만 정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긴, 손을 보았을 뿐 정답을 찾아다닌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정답이 아직도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은 게 정상이겠지. 어쩌면 내 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지금 한 번 흘낏댄 내 손은 대단히 손 같다. 손가락도 손톱도 도드라진 핏줄도 약간은 거무데데한 피부까지 손의 범주를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손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어도 나는 내 손이 퍽 재미가 없다. 다만, 이토록 재미없는 손을 누군가는 힘껏 붙잡았었다는 기억이 남아서,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내 손을 보게 된다. 쥐었다가 놓은 모든 맥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금의 움푹한 그늘 속에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가 선명해졌다가 이내 흐려진다. 이내 손은 무거워진다. 손의 자세와 달리 손의 맥락은 아무것도 놓지 않았구나. 그러므로.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입에 갖다댄다. 따뜻하고 약간은 짠, 살갗이 앞니 사이에서 투둑, 하고 끊어진다. 아픔과 별도로 침에 젖은 손가락은 기묘하게 반짝인다. 때로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의 눈빛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것처럼 또렷해지는 내 기억의 한복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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