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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Nov 21. 2024

기억력에 관한 짧은 고찰

  오래된 기억은 하나의 장면으로 남기도 한다. 당시 기억의 총량은 최근 기억의 총량보다도 사실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고 딱 그 정도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억은, 아주 짧은 순간이나, 하나의 사물, 혹은 어떤 사람의 표정이나 말이 당시를 온전히 대체해버리는 대체 관계를 형성할 때가 있다. 내심 나는 그걸 바라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대체물을 생성해낸다는 것은 그때의 기억을 잠깐동안 불러들이는 일을 매우 간편하게 만드는 일종의 심리적 기술인 것도 같다. 예를 들면, 나는 언젠가부터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 당시의 이미지를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 있는 작은 벤치 하나만으로 대체해버렸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레 그 벤치 하나를 떠올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벤치 옆으로 나 있는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자습실이 심화반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점심시간마다 그 벤치에 앉아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자동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 공부는 적당히 했어요, 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온다.


  어쩌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까. 총량이 현재만큼이나 지나치게 거대한 과거를 대체물로 빠르고 체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징적인 사물이나 사건으로 대체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세세하게, 그리고 얼마나 추상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지는 각각의 한계가 다를 것이다. 현재의 의식은 한정되어 있고, 과거의 시간을 상징화하고 추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에 성공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


  가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두고 부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글을 읽을 때 그런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다. 픽션류를 읽을 때도,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자세한 상황 설정과 묘사가 현실 속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현실에서 깊게 인상을 받는 감수성과, 그러한 인상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러웠었다. 그런데 감수성이라는 것은 원래 타고나는 경향성이 있어서 어느정도 나는 나의 선천적인 몫에 만족하는 법을 점점 배워가고 있다. 감수성은 MBTI로 따지만 N에 해당하는 심리적 기능인데, 이 N은 직관이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된다. 직관은 말 그대로 현실 세계의 어떤 것을 직접 맞닥뜨리거나,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피상적인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비이성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여기서 ‘비이성적’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본능적이라는 것은 딱히 무엇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유전 시스템으로 각인되어 성장하면서 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노력이라는 요소가 낄 틈이 그다지 없다. 직관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받은 인상을 기억하는 능력은 언제나 그렇듯 노력이라는 요소가 개입한다. 당장 과거의 데이터를 추상화할 때 어떤 상징물을 쓸 지도 결정해야 한다. 물론, 무의식적인 과정이겠지만, 우리는 정신을 위생적이고, 이성을 냉철하게 관리함으로써 더 적절하고 건전한 상징물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좋은 과거를 좋은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더욱 세세한 과거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하지만 명백한 답으로 자주 기억을 떠올리고 기록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이 가진 이야기를 잊지 않도록 노력하기 위해 최근의 이야기들을 자주 말하고 자주 쓰는 것이다.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잊을 때마다 떠올려야 하는 사실들 중 하나이다. 멋진 말을 하지 않아도 좋고, 재밌는 설을 직접 풀지 않아도 좋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거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 만으로 기억의 추상화와 상징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젯밤에 어제 낮에 있었던 일을 한번이라도 떠올린 사람은 오늘 더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기억은 언제나 휘발되고 망각으로 향하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 일은 의미가 있다. 학창시절을 벤치라는 상징물로 떠올리는 것, 직장생활을 점심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 친한 친구를 떠올릴 때 어떤 만화 캐릭터 먼저 생각하는 것. 한 번만 시간을 내어 상기해낸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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