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의 경우 -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by 쿼카의 하루

그녀의 하루는 고요함 속에서 시작된다. 아침은 창문 너머로 비치는 하얀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몽롱한 정신에도 깨어있으려는 의지만큼은 활짝 열린 그녀의 두 눈에 담긴 듯하다. 얼른 머리맡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7시 50분. 늦지 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침 운동은 할 수 없는 시간대이다. 얼른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침대 옆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머리를 푹 숙이는 그녀는 긴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그대로 눈을 감고 10분정도를 졸기 시작한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는 살짝 벌린 입 사이로 고인 침을 순간 삼킨다. 그리고는 그제야 지면에 발을 딛는다.


이른 아침에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침실을 나온다. 그리고는 연결된 작은 부엌의 냉장고 문을 연다. 반찬통, 먹다 남은 배달 음식, 맥주캔과 여러가지 식재료들 가운데 작은 우유팩을 꺼낸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고 팩을 열어서 그대로 마시기 시작한다. 우유를 한번에 모두 들이킨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루는 시작되었고, 운동은 하지 못했으며, 회사까지 서둘러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쉰다. 집에 나가기 전에 샴 고양이 슈미에게 줄 사료를 점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밖을 나섰다.

"네 알겠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하는 말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문장이다. 짧고 빠르게 말하기도 하고, 곱씹듯 천천히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사의 눈을 살피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며 주저하듯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용은 그 몇 음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하루에 몇 번은 상사에게 자신이 처리해온 업무를 보고하는 일도 한다. 나긋하지만 간결하고 적확한 단어들로 자신의 업무에 대해 중간 보고를 하고, 구두 결재를 요청하는 그녀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해야 하는 말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 말이 자신의 다양한 심경과 의도를 가차없이 담아내는 대단한 문장이라고 느꼈다.


점심 시간이 되면 구내 식당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팀원들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도 그들에게 거리를 두지만 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의 팀원인 두 사람과 함께 회사 안의 최근 이슈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자신보다 선배였던 남직원 한 명은 특히 그녀와 말이 잘 통했다. 팀원들이 드라마나 최근 하는 취미 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를 두서 없이 나누다보면 점심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간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함께 앉아서 시간을 보낼 때, 요즘 방영하는 ‘영재발전소’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말이 나왔다. 남직원이 지나가는 화제처럼 말을 꺼내다가, 다들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들을 한 마디 한다. 영재는 역시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의견으로 모아질 무렵, 남직원이 그녀에게 물었다. “서영씨는 학창시절에 어떤 과목 잘했어요?” 그녀는 망설임없이 수학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요? 의외네. 서영씨는 국어 같은 과목 잘했을 줄 알았어요” 남직원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생각보다 말수는 적은데, 말을 명쾌하게 잘 한다고 말했다. 핵심만 딱 집어서 요목조목 잘 말하는 걸 보고, 첫인상에서 야무진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그녀는 부담스러운 칭찬에 어색한 듯 웃으며, 자신은 문과인데도 수학을 좋아해서, 아직도 삼각함수나 근의 공식을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 거라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 차분했던 분위기가 반전되며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하나씩 말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중학생 때 야구 선수였고, 한자를 잘 알아서 한자능력검정시험을 3급까지 본 사람, 누구는 입사 면접에서 면접관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화를 다시 꺼내기도 한다. 남직원은 자신이 국어를 잘 했다고 말했다. 특히 국문법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은 글을 써도 문법 때문에, 고민한 적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혼동되는 문법을 잘 구분할 수 있는 팁들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가롭고 맥락없는 잡담을 하다보면,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은 끝이 난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느긋하게 걷는다. 에어팟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집에 도착한다. 그녀는 고요한 방 안에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켠다. 슈미가 마중을 나와있었고, 그녀는 말 없이 슈미를 바라본다. 그녀는 슈미에게 살갑게 안부를 물으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고양이의 푸른빛 눈을 바라본다. 머리를 부비는 슈미의 털은 부드럽다못해 말랑거리는 듯 했다. 응석을 받아주듯이 두 볼을 쓰다듬으며 예뻐해주면 그녀는 금방 하루의 긴장이 풀리고 녹는 듯 했다. 무릎을 쪼그려 앉아있던 그녀는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슈미는 그녀의 품 안에 파고든다. 회색털이 그녀의 까만색 티셔츠에 약간 묻어버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스름한 조명을 켠다. 자기 전에 시작되는 루틴은 그녀에게 있어서 필수로 지켜야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요즘 읽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침대에 누워서 파자마 차림으로 읽는다. 슈미는 야옹거리며 조금 울다가 자기 집으로 갔다. 아마 이제는 눈을 붙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책에 집중하는 중에 눈꺼풀이 살짝 떨린다. 까만색 금테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써보았다. 그렇게 책에 집중하며 30분 넘게 시간을 보낸다. 그녀의 눈은 기분 좋게 까끌거린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명을 끄고 이내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꼭 아침에 운동을 해야지. 그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여러 번 뒤척거리는 내내 슈미의 털의 감촉을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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