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둠이 모두 가시지 않은 새벽. 저 멀리 해는 떠오르고 있는지 흐릿하지만 말간 빛을 비춘다. 하천을 따라 난 길을 한 중년 남성이 간편한 복장으로 말없이 걷고 있다. 각진 금테 안경을 썼고, 머리숱이 적어 정수리쪽 머리카락이 약간 비어있다. 짙은 회색의 등산복과 검정색 트레이닝바지 차림이다. 그는 현재 격일로 하고 있는 아파트 경비일을 쉬는 날이면 일터에서 가까운 이곳 하천길을 자주 걷는다. 걷는 내내 답답하고, 얹혀있는 듯한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하염없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가는 그였다.
그는 걸으면서 지난 날에 대한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그런 바보같은 말을 했던 게 진정 나였을까, 그런 종류의 생각들은 노력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억지로 진전시키려고 해도 제자리 걸음이었다. 어느새 습관처럼 머릿속에 지나가고 흘러가는 그런 생각들이 중년인 그를 아주 먼 시간과 공간속의 그에게로 데려갈 때도 있다. 그는 너무 생각이 깊어지고 복잡해지면 두려운 마음에 주머니속 이어폰을 찾는다. 그 무선 이어폰은 하나뿐인 그의 아들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준 것이다. 귀에 꽂고, 십수년 전부터 줄곧 들어왔던 올드팝과 포크송을 재생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 그는 레깅스 차림으로 팔을 흔들며 달리고 있는 머리 긴 여성을 발견한다. 어디서 많이 봤었는데, 그는 아마 그가 관리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바뀌고,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생각은 몇 달 전 일에 대한 기억까지 흘러가 닿게 되었다. 그 여성은 그가 일하는 아파트 경비실에 인사차 방문했었다. 차분한 인상의 그녀는 시루떡 한 접시를 건네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301호에 이사왔는데 잘 부탁드려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녀에게 나중에 각별한 인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며칠 만에 다시 찾아와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줘도 되는지 공손히 물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자기 고양이가 잘 먹지 않는 간식들을 버리기도 아까워서 아파트 주변의 길고양이들에게 줘도 되는지 직접 찾아와 물어보았다. 그는 말했다. "줘도 되는데, 너무 많이 주지는 말아요" 고양이들이 너무 많아지면, 아파트 관리소나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고양이를 처리해 달라는 민원을 받고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하면서 경험상 그런 일들을 몇 번 목격해왔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하나 뿐인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하고 있는 아파트 경비일을 하며, 귀찮은 일은 되도록 피해오고 있었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조금 준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지만, 최대한 민원을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단단히 일러두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고난들을 최대한 경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스무살 무렵부터 군대를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할 때도, 공익근무요원이나 면제 판정을 받기 위한 방법을 고심해봤다. 스무살이었던 그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허리디스크부터 시력검사를 허위로 치르는 일까지 고민해봤던 그였다. 몸 하나는 건강했던 그가 해외에 체류하는 일까지 떠올렸을때 주변에서 만류 한 덕에 현역으로 입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부터 '군대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것'이라는 요즘 청년들의 마인드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의 아들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인 그의 조언에 따라 4급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는 일도 가능할 수 있었다. "너 어릴 때부터 평발이었잖아. 정형외과가서 평발 검사나 한번 해봐" 아버지 말을 듣고 아들은 정형외과에서 진단서를 떼어 왔다. 병무청에 진단서를 제출한 아들은 4급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고 만기 소집 해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이 변변치 않은 학력때문인지 진전을 보이고 있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잘 내색하지 않았다. 오늘은 왠일로, 집 밖으로 나가서 등산을 하고 오겠다는 아들의 말에 기쁘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그는 지금처럼 하천길로 나와 하염없이 걸었다. 그는 아들에게 다녀올 때 꼭 생각을 정리하고 오라고, 맑은 정신으로 취업 준비에 다시 전념하라고 노파심에 잔소리를 조금 늘어놓았다.
그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과장이나 부장의 직급을 달면서 자리에 남아 있을 때에도 일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사 도전하기를 꺼려한 그의 인생은 항상 조금은 외로웠다고 그는 회상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피하려고 노력해도, 인생은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시작되는 식이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중독'의 문제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이 그의 귀에 조심스레 닿는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Sound Of Silence였다. 그는 수없이 많은 중독 문제를 겪었다. 술 중독, 담배 중독, 음란물 중독은 기본이었다. 한때 나라 전역에 광풍이 치듯 유행했던 도박도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돈을 넣고, 슬롯을 작동시키고, 돈을 잃거나 얻는다. 그러한 일에 자동적으로 진행하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던 그가 겨우 도박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 때문이었다.
그는 임원을 달기 이전에는 퇴폐 업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가 했던 것은 쾌락을 사는 것이었고, 쾌락에 흠뻑 취해서 세상 사는 어려움들을 잊고, 억지로 힘을 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양심은 있었으나, 수치심은 점점 옅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에 부조화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아는 것은 그를 가끔 배신하곤 했지만, 감각하는 것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는 나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외도를 하고, 불법적인 성매매에 손을 뻗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를 구한 것은 그의 부도덕을 발각한 주변 사람들의 가차없는 쓴소리와 친지들의 격렬한 항의였고, 그는 정신을 차리는 듯 하다가도 다시 다른 길로 들곤 했다.
그러던 그는 법적 분쟁에 휘말려 감옥에 갈 뻔도 하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뻔도 하다가 결국에는 다시 길을 걸었다. 마치 지금 걷는 길이 한 길로 이어지듯이, 그렇게 그는 자신의 길을 닦으며 한참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그는 재생한다. 후회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결국에는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많이' 외롭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들은 이미 머리가 많이 커버렸고, 아내는 혼자 교회에 다닌다. 그는 이제 혼자라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 아무도 그와 함께하려 하지 않고 연락도 오는 일이 없다. 친구들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인생에 남은 것은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아파트 경비일이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가던 걸음을 그만둔다. 홀연히 몸을 돌려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낮의 쨍쨍한 태양이 그의 몸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