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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lySummer Feb 01. 2024

신촌, 그 거리. 그리고 너.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서울 신촌에 산 적이 있다. 정확히는 이화여대 후문 쪽 원룸촌이었는데 내가 여태 살았던 곳 중 가장 이쁜 가옥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살짜기 오르막을 오르다 숨이 차고 막 지칠 때쯤 닿을 수 있었던 언덕 위의 그 집은 흔하고 밋밋한 직사각형의 원룸 건물이 아니라 이쁜 정원을 가운데 품고 3,4개의 단층과 2층 건물들이 사방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주택이었다. 처음 그곳을 보러 갔을 때 느꼈던 딱 한 단어. 비밀의 정원.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정말 멋들어진 녹음과 붉음을 보여주는 곳이었고 집주인 여사님도 그 집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여러 채 중 가장 작은 1층의 방-신기하게도 똑같은 평수가 거의 없고 크기와 형태가 다양했다.-을 계약해 살았는데 침대하나와 작은 책상과 선반으로도 꽉 차는 사이즈여서 만약 조금만 방이 더 컸다면 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었던 곳이었다. 정원만큼 밝고 멋진 여사님은 종종 세입자들을 모두 모아 바비큐 가든파티도 열어주곤 했다. 신박한 자취 생활이었다! 뭔가 나와 맞기도 한 독특한 경험이었달까. 사회 신입생에게 그 정도의 이쁘고 아담한 원룸은 호사였고 특별하기도 해서 참 좋았다. 계약이 만료되어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해 말씀드렸을 때, 여사님은 매우 아쉬워하며 월세를 깎아줄 테니 계속 살으라 하실 정도로 우리의 관계는 건강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내게 이대후문과 신촌은 살기 좋고 갖춰진 게 많은 멋진 구역이었다. 홍대입구의 감당하기 힘든 열기는 적었고 강남보다는 덜 북적이며 종로보다는 생동감이 넘치는 젊은 거리. 그곳에서 나의 청춘도 나의 사랑도 아름다웠었다. 그래서 생각난 그때의 연애담을 말해 보고 싶어졌다.


 그 시절 남자친구는 나와 동갑으로 고시를 준비하는 취준생이었다. 집에서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이전 알바비나 군에서 모은 돈으로 취준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원비, 식비, 교통비를 제외하곤 넉넉히 쓸 돈이 거의 없었고 나 역시 이제 막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1년 차 직장인이긴 했지만 정말 타이니한 월급을 받던 꼬꼬마 초년생 시절이라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가난한 연인이었고 그에 맞는 데이트를 했다. 어제 일도 잘 기억 못 하는 사람이라 그때 뭘 주로 했었는지 많은 부분을 잊긴 했지만 기억을 꾸역꾸역 끄집어 내본다. 노선이 긴 버스를 타고 마치 시외버스를 타고 랜덤 뽑기처럼 마음이 내키는 정거장에 내려서 돌아다니거나 그냥 무작정 종점까지 가서 새로운 곳을 탐험했다. 늘 뜻밖의 여정이 기다리는 데이트 코스들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남자친구 동네에 가면 늘 사 먹었던 가성비는 물론이고 맛까지 환상이었던 시장표 치킨을 사서 남자 친구 집에서 영화를 보며 오물오물 먹었던 기억도 난다. 다양한 쇼핑몰에 가서 하염없이 수다를 떨며 돌아다니며 남아도는 체력으로 돈을 대신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기도 했다. 보통 서울의 여기저기를 버스나 지하철로 다니며 남들이 다 아는 핫플이 아닌 우리만의 장소들을 마치 영역표시를 하듯 부지런히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것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취업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래식 사진기들을 중고로 구매해 실제로 들고 다니며 우리들만의 거리들을 찍기 시작했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작은 골목. 그렇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있어 오래 머물고 싶던 그런 거리들을 모두 남기고 추억하기도 했다. 기타를 좋아하고 사진기에 관심이 많은 조용하고 감성적이었던 그는 그런 멋진 사진들뿐 아니라 직접 만든 노래들을 내게 선물해 주기도 했다. 동갑의 우리는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렇게 슴슴하지만 질리지 않는 무해한 연애를 했다.


 그의 이런 섬세하고 따스한 부분이 드러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 따로 좀 더 자세히 써 보려 한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 만나 어른 of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한 베프인 친구가 있는데 그 당시 신촌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직장이 명동에 있음에도 신촌을 거주지로 선택하게 된 이유에는 친구 학교 근처에 살면 더 자주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점도 꽤 큰 요인이었다. 정말로 우리는 그 시절 지겹게 만났다. 내가 기록하고자 하는 ‘그날’은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퇴근하고 온 시간이었음에도 굉장히 낮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기에. 아마 특별한 일로 토요일에 잠시 나가 근무를 하고 주말이니 친구를 만나 우리 집에서 수다를 떨 계획이었다. 남자친구에게도 오늘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신촌 오거리에서 oo이 만나서 집에 가서 놀 거야.”

“아, 그래? 몇 시쯤?”

“3,4시쯤? 퇴근하고 나가면서 다시 연락할게!”

“알았어.”


“이제 회사 나와서 버스 정류장 가는 길~”

 버스를 타고 계속 문자를 주고받으며 신촌을 향해 갔다.

“차 막혀?”

그가 물었다.

“아무래도 주말이라 좀 막히네. 늦으면 안 되는데.”

“저녁 뭐 먹을 거야?”

“글쎄. 친구한테 물어보고 근처에서 먹고 들어갈까 해. 집엔 먹을 게 없어. ㅎㅎ“

“ㅎㅎ 맛난 거 먹어. 조심해서 오고.”

“응~”

그렇게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신촌 오거리 버스 정거장에서 내린 나는 친구가 혹시 벌써 오지 않았는지 보려고 바삐 눈으로 주변을 스캔했다.

그런데...... 음?

저건 남자친구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어?!! 뭐야? 왜 여깄어? “

 진짜 놀라 뭔가에 홀린 듯이 그에게 다가가는 나에게 그는 말 대신 날 놀래키는데 성공했다는 기쁨과 나를 무계획으로 보게 된 것에 대한 행복감을 두 눈에 한껏 드러내며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이거.”

그의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 있었다. 아직도 얘가 내 앞에 있다는 걸 믿지 못한 상태였지만 손은 자동팔처럼 나가 그 가방을 받아 들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좋은 냄새.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따뜻한 그의 동네 시장 치킨. 그리고  콜라 2캔. 앞서 언급했던 남자친구 동네에 갈 때마다 사 먹었다고 할 정도로 내가 너무나 애정한 시장표 치킨. 그걸… 시간에 맞춰 바로 포장해서 버스를 타고 와 날 기다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내 베프 친구와 먹으라고.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따듯한 물보라 같은 게 가슴에 이는 거 같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생각한 이벤트였을 것이다. 취준생 남자친구가 자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내 친구에게 무례하지 않게 방해하지 않고 대접하고픈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싶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치킨을 떠올리고 그걸 몸소 배달할 생각을 한 것이다. 늦지 않게, 치킨이 식을까, 나를 놓칠까 별별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와서 저렇게 사람 좋은 표정으로 여유 있게 전해주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고 고마웠다. 일반적인 선물과는 뭔가 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아직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으니. 그날만은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센스 넘치고 멋진 남자친구다 인정해 주고 싶었다. 마주 보고 선 시간이 2분이나 되었을까. 친구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 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잘 만나고 맛있게 먹어. 나 간다. 친구랑 헤어지고 연락해.”

“고마워. 잘 먹을게. 조심해서 가. 도착하면 연락해. 잘 가~~~~”

 친구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나는 아마 그 치킨이 든 가방을 룰루랄라 깡총깡총 뛰는 모양으로 들고 갔을 것이다. 콜라 따위 신경도 안 쓰고 말이다. 넘치는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게 틀림없다. 아마 만면에 “사람들, 제 남자친구 센스 좀 보세요. 너무 사랑스럽지 않나요?” 이런 표정으로 거의 날아가는듯한 걸음으로 갔을 것이 분명하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나는 치킨을 들어 보이며 xx가 자기 동네에서 바로 사서 신촌 버스 정류장까지 와서 주고 집에 다시 갔다고 말해 주었다. 완전한 T인-그 당시에는 mbti가 유행하지 않았으나 우린 늘 반대 성향임을 인지하고 있고 그녀를 냉철한 이성적 인간으로 존경한다.- 내 친구마저도 감동과 놀람의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런 행동을 한다고? 뭔가 비효율적인데 따뜻한 이벤트. 나쁘지 않다를 넘어 친구도 그날의 치킨배달은 꽤나 스위트한 행동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게 연애라면 할만한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후 그녀는 소개팅으로 분주해졌다.


 신촌 그 거리에서 치킨을 들고 설레며 날 기다리던 그날을 너도 지금까지 기억하겠지. 글로써 고백해 본다. 아직도 내가 그 추억을 행복하게 꺼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네가 늘 행복하길 바란다.


 안녕! 내 인생 속 한 챕터의 주인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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