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다섯 번째 이야기
2024년 10월 27일 일요일. 춘천.
저에게 의미가 있는, 기억하고 싶은 날입니다. 조금은 무모했던 저의 도전이 시험대에 오른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대로 저는 24년 춘천마라톤 풀코스 레이스에 참전하였습니다. 참가가 아닌 참전이라 표현한 것은 그만큼 제 각오가 비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대회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거리를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제법 묵직한 압박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회 며칠 전부터 '과연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고, 오랜만에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내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대회 날이 밝았습니다. 아니, 새벽 3시쯤 잠이 깨버렸으니 대회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긴장 때문에 잠을 설쳐버려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J 성향의 저는 일찍 눈이 떠질 것 또한 계산에 넣어 뒀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일찍 눈을 뜬 김에 그간 유튜브에서 봐왔던 대회 날의 준비사항들을 하나씩 클리어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씻고, 온몸 구석구석 바셀린을 바르고(장거리를 뛰다 보면 피부가 쓸리기 일쑤라 꼭 발라주라고 들었습니다.) 무릎과 발목에 스포츠 테이프도 꼼꼼히 감았습니다. 선크림을 바르고, 니플패치도 붙였습니다. 레이스 때 착용할 싱글렛과 하프 타이즈를 입고, 트레이닝복을 덧입었습니다. 그리곤 하얀 쌀밥을 김에 둘둘 말아 몇 조각 집어삼켰습니다. 이 길을 먼저 지나온 마라톤 선배님들이 친절하게 유튜브에 올려주신 내용을 따라한 루틴이었습니다.
채비를 마친 저는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와 신도림 역에서 출발하는 춘천마라톤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저의 마라톤이 처음이듯 춘천행 셔틀버스 기사님도 이번 운행이 처음이셨나 봅니다. 대회장이 아닌 엉뚱한 곳에 내려주셔서 뿔뿔이 흩어져버린 탑승객들을 찾아서 다시 태우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긴 했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대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긴장한 저에게 초조함 한 스푼을 더 얹어주신 기사님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이란 것은 본디 엉성하기 마련이고, 그 엉성한 공백은 주변에서 배려와 양해로 채워 주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니까요.
대회장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고,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다들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줄을 서고, 물품 보관을 하고, 체조를 하고, 연습 조깅을 하고, 사진을 찍고... 모두 자기만의 루틴을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들을 따라 제가 할 것들을 하나씩 해치우자 어느덧 출발 시간이 되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제가 속한 그룹에서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컨디션이 좋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딘가가 불편한 느낌도 없었습니다. 긴장감이 돌고 있는지,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지 그 또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5! 4! 3! 2! 1! 탕!
드디어 첫 발을 디뎠습니다.
이 많은 러너들이 본인만의 서사를 쓰기 위해,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디뎌대는 발소리는 웅장하고 사뭇 장엄하게 들렸습니다. 저도 저만의 서사를 위해 제 두 발을 힘차게 던졌습니다.
스타트 라인을 넘어서자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고, 상상으로만 뛰어 본 주로(走路)가 마침내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오버페이스 하지 말자고 곱씹으며 찬찬히 뛰어 나갔습니다. 1킬로.. 2킬로.. 시계를 보니 평소 심박보다 20 이상 높은 숫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아, 나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구나.' 초반부터 높아져 버린 심박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냥 달려지는 대로 달릴 수밖에요. 조금씩 거리를 채워 나갑니다. 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저 역시 가을의 전설이 되어보자고 되뇌면서요.
몇몇 지인에게 무사히 완주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떠들어 댔지만 사실 저는 4시간 안에 피니쉬를 해보겠다는(SUB-4) 욕망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풀코스에서 SUB-4 달성. 실력에 비해 다소 넘치는 목표인 걸 알지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달성한다면 스스로 꽤 멋있다는 느낌으로 채워질 것 같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뛰어보고 '컨디션이 좋다면' 혹은 '운이 좋다면'이라는 조건부 욕망이었습니다. 과연 내 비밀 욕망은 충족될 수 있을지...
춘천마라톤 코스는 초반부터 업힐입니다. 보폭을 좁히고 힘을 최대한 아껴가며 뛰었습니다. 춘천의 코스는 15KM까지 풍경이 절경이라는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이는 건 앞 선 주자의 뒷모습이고, 들리는 건 옆 선 주자의 숨소리입니다. 풍경을 만끽할 만큼의 여유가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완주 성공이냐, 서브 4 성공이냐, 이 두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채운 것 같았습니다.
10KM쯤 달리자 몸이 후끈해집니다. 구름이 해를 가려 달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기 막힌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합니다. 팔토시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벗어던졌습니다.(급수대를 지나며 쓰레기 통에 던졌습니다.)
몸도 충분히 풀렸을 시간이고, 계속해서 페이스를 올려가며 달렸는데도 SUB-4 페이스메이커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째 불안해졌습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만나지 못한 채 레이스가 종료된다면 몰래 품었던 내 비밀 욕망은 물거품이 되니까요.
어떻게든 SUB-4 페이스 메이커를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속도를 올렸습니다.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시계에 찍힌 심박 수도 사정을 두지 않고 착실하게 올라갑니다만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합니다.
부지런히 달리다 보니, 18KM 지점에서 드디어 페이스메이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KM 정도를 페이스 메이커 뒤를 따랐습니다. 그제야 심박이 안정되고 호흡도 편해졌습니다. 살만한 느낌이 듭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딴생각이 난다고, 거칠던 호흡이 안정되고 나니 또 욕심이 납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뒤에 두고 달려 나간다면 3시간 50분 안쪽까지 바라볼 수 있지 않겠냐며 마음이 깝죽대기 시작했고, 저는 그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제키고 보란 듯이 튀어 나갔습니다. 쭉쭉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알 수 없는 승리감이 피어올랐습니다.
얼마간 신나게 내달리자 차츰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느껴지는 다리의 무게감만큼 속도가 처지고 있는 것이 감지됩니다. 아마 이쯤이었을 것 같습니다. SUB-4를 뛰어넘는 호기록을 내겠다는 자신감이 허물어지고 있던 그 맘때 쯤, 호기롭게 제키고 나갔던 그 페이스메이커가 고요하고, 차분하게 제 옆을 지나갑니다. 30KM 지점이니 아직 12KM가 더 남았는데 말입니다.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되게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신이 저의 자만을 매섭게 꾸짖는 것 같습니다. 자만과 욕심, 그리고 자신감도 덩달아 상실한 채 황량한 정적 속을 홀로 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두드려 맞고서야 겸손을 되찾은 저는 페이스메이커 뒤에 바짝 붙었습니다. 놓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이미 지쳤기에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부터는 생각을 비우고 페이스메이커 뒤꿈치만 보고 뛰었습니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제 통곡의 신음소리가 들렸는지 페이스 메이커 분께서 호흡 길게~ 호흡 길게~를 외쳐 주십니다. 힘들어도 힘든 티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더 힘들어진다고 말해 주십니다. 한 번씩 해주시는 그 말씀은 호흡 조절에도, 바스러져가는 멘털을 부여잡는데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함께 뛰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깝죽대지 말고 처음부터 이 분을 따라 뛰었으면 좋았을 걸'하는 후회가 스쳐 지나갑니다.
40KM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저는 페이스 메이커 그룹을 따라 남은 거리를 버겁게, 힘겹게 달려 나갔습니다. 40KM 팻말을 보는 순간 다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긴 터널 끝 출구에서 비춰오는 한 줄기 빛 같던 40KM 팻말. '이대로 2킬로 남짓만 더 가면 완주다, SUB-4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잠시 벅차올랐지만 이내 거짓말처럼 생각이 바뀝니다. 갑자기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힌 것 같이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 느낌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 그만두고 싶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정말 그랬습니다. 막장 드라마에서 있을 것만 같은 반전을 현실에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 않았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수많은 러너의 가슴을 울렸지만 그 문장이 수많은 러너들의 부상을 야기했다는 말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그리고 런앤워킹(RUN & WALKING)도 마라톤의 한 가지 전략이다라는 말도 떠 오릅니다. 걸어도 될 이유를 애타게 찾고 있었나 봅니다.
그때, 페이스 메이커 분께서 "지금부터는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도 낙담하지 말아요. 지금부터 페이스 밀려도 괜찮아요. 여유 있습니다. 페이스 밀려도 서브 4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간 기준으로 4-5분 빠르게 가고 있습니다. 걷지만 말고 달리세요!" 큰 소리로 외쳐 주십니다.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마라톤은 35KM까지는 인간이 뛰고, 35KM 이후부터는 신이 뛰어주는 거라고.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신이 페이스 메이커 분의 입을 통해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를 악 물고 2KM를 더 달렸습니다. 저 멀리 피니쉬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선가 "ㅇㅇㅇ! 파이팅"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원봉사자 여학생이 제 배번표에 붙은 이름을 불러주며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쳐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 파이팅으로 화답하고 싶지만 사실 그럴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 웃어주는 것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답을 했습니다.
피니쉬라인 통과.
3시간 56분 33초.
네. 다행입니다. 완주도 이루었고, 몰래 갈망하던 SUB-4도 이루었습니다. 말 못 할 감동과 성취감이 차 올랐습니다. '해냈다. 해내고 말았다.' 감동에 취해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30초쯤 지났을까요. 이 짜릿한 성취감을 더 오래,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는데, 왼쪽 햄스트링에서 아주 강력한 쥐가 올라왔습니다. 감동은 30초 만에 끝이 났고, 저는 털썩 주저앉아 윽윽 대는 폼 안나는 애송이가 되었습니다.
네. 그렇게 저의 첫 번째 풀마라톤은 끝이 났고, 골병이 들었는지 사흘을 꼬박 고생했습니다. 왼쪽 장경인대 쪽에 통증이 생겨 절뚝이며 걸었고, 각종 근육통에 시달렸습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마라톤 완주의 흥분도 적당히 가라앉았기에 이 글을 쓰며 기록을 남기고자 합니다.
한동안 집중했던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크고 값진 무언가가 남을 수도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남긴 남았으리라 믿습니다. 일단 자랑거리 하나가 남긴 했잖아요.
어쨌든 이로서 저는 올해 세 가지 목표 중 두 가지는 이룬 셈입니다.
1. 하프마라톤 뛰어 보기 (풀 마라톤으로 초과 달성)
2. 브런치 작가 신청 해보기 (작가 승인까지 초과 달성)
3. 수영대회 나가보기
하나 남았는데 이것도 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끝나서 홀가분하고 신납니다. 끝~
(다음 날)
어제는 마라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기록하고 싶어서 후다닥 글을 마무리하느라 마라톤이 나에게 무얼 남겼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어영부영 넘겨버렸습니다.
생각할 에너지가 없었을까요? 글을 마무리하는 지구력이 모자랐을까요? 둘 다 일까요?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 대미지가 있었나 봅니다. 어느 순간 쓰는게 귀찮아져 버렸으니까요.
하루가 더 지나고 조금 더 회복이 되자, 어제 후다닥 갈무리 지어버린 뒷 문장을 간단하게라도 매듭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마라톤이 나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소위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점을 통과하면서 한계를 극복하는 듯한 경험, 피니쉬 라인을 밟을 때의 쾌감, 완주의 성취감 등이 진하게 기억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런 느낌을 어느 정도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저의 경우는 그것보다 더 우선하게 기억되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 가족, 회사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오롯히 나만을 위해 시간을 계획한 경험.
- 대회라는 구체화된 목표를 세워 놓고서야 비로소 완성된 달리기 습관.
-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몸 상태를 체크하면서 내 몸을 소중하게 여겼던 마음.
- 몇 달 간 아침마다 변하는 날씨를 어플이 아닌 몸으로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 경험.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들이었습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 오늘과 비슷한 내일을 별생각 없이 살던 일상에서 나를 위해 계획하고, 인내하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바라보는 경험이 대회 당일 완주 순간의 쾌감보다 더 소중하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마라톤 완주의 경험은 채점이 끝난 시험지 같습니다.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며 만족할 수도, 실망할 수도 있는 그런 한장의 시험지.
제 경험상 채점이 끝난 시험지는 오래 간직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 독서실에서 밤을 새워 본 기억, 시험 준비를 하면서 먹었던 라면의 맛, 시험장에 들어서기까지 떨리고 긴장되던 마음. 이런 것들은 오랜 시간동안 기억에 남고, 때로는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적어도 저의 경험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마라톤 대회가 저에게 뭘 남겼는지 굳이 생각해 본다면 기초를 다졌던 시간의 경험이 제일 크게 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기초를 잘 붙들고 간다면 언제든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기에 이 경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남겨야겠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