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그리고 쇠맛 아이돌의 추천 도서
이 계절처럼 공백기는 갑작스레 찾아온다. 옷장을 정리하기 전에 사흘 간의 콘서트와 음악 방송이 끝났고, 새로운 앨범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기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월드 투어가 시작했다. 이제 당분간은 아무 기약 없는 공백기다. 새로 산 굿즈는 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지만,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Next Level의 무언가가 더 필요해진다.
아이돌은 무대 밖에서도 팬들에게 영향을 준다. 팝업스토어는 항상 붐비고, 아이돌이 추천한 음식은 금세 입소문을 타며,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아이템은 몇 초 만에 품절된다. 하지만, 그냥 누군가를 따라 산 물건은 딱 그만큼의 가치만 할 뿐이다. 만약 플레이리스트와 냉장고, 옷장을 최애로 채우고도 허전하다면 이번엔 책장도 채워 볼 차례.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최애의 아이돌, 에스파(aespa)가 추천한 책을 읽어보았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에스파 카리나가 최근에 추천한 책은 미국의 만화가 네이선 파일(Nathan W. Pyle)의 그림을 황석희 번역가가 옮긴 '낯선 행성'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을 외계인의 시선으로 관찰한 네컷만화 모음집이다. 이 외계인 세계관에서 공원은 건물에 둘러싸인 통제된 자연이고, 좋은 꿈 꾸라는 인사는 '즐겁고 터무니없는 일 상상해라'가 된다. 쉽게 끝까지 넘길 수 있는 책이지만 그 안에는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다. 카리나는 이 책이 귀여워서 골랐다는데, 내 눈에는 200만 명이 넘게 보는 유튜브에 나와 외계인 책을 추천하는 카리나가 더 귀여웠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다.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에스파 지젤이 읽어서 놀랐다. 이 어려운 잠언 시집에는 다양한 시대, 나이, 성별, 직종의 사람들이 쓴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에스파 콘서트 비하인드 영상에서 지젤이 틈틈이 이 책을 읽는 걸 봤는데, 한참 후에 당시 슬럼프를 겪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팬데믹으로 아티스트와 팬이 만날 수 없던 시절, 데뷔 후 첫 콘서트를 앞둔 중압감을 견디며 지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에스파를 응원하는 마이(MY)와 연결되어 위로가 되고 싶다는 지젤에게, 나는 내가 받은 에너지만큼의 따뜻함을 돌려주고 싶다.
과거 에스파 윈터가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때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선물 받았다고 했다. KB국민은행에서 홍보 모델인 에스파 멤버들에게 각각 다른 책을 보내줬다고 한다. 어린이들과 자주 만나는 작가는 어린이들이 구축한 사회를 소개하며, 어린이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책은 윈터가 읽기 전에 내가 먼저 읽었는데,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다시 빌리려고 하니 예약 순위가 16등까지 밀렸다. 아마 책을 받아볼 때쯤엔 동심에서 조금 더 멀어져 있을 것 같지만, 우리의 세계는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에스파 닝닝이 룸메이트인 카리나에게 빌려 읽은 후 버블에서 추천한 책이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다. 2016년에 발행된 후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이 책은, 우리가 놓친 것에 대한 관심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위로를 건네는 상냥한 책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닝닝에게 카리나가 이 책을 알려줬다고 한다. 작가는 언어에 온도가 있다고 믿는다. 카리나는 닝닝에게, 또 닝닝은 팬들에게 어떤 온도로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닝닝이라면 음악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책은 카리나와 닝닝이 읽고 에스파의 인터뷰 영상에서도 소개한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의 '달과 6펜스'다. 이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영국으로, 마흔일곱 살의 증권맨 찰스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화가가 되겠다며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한다. 흔히들 제목의 달은 예술적 이상, 6펜스는 세속적 가치를 뜻한다고 한다. 쉬운 단어와 명쾌한 문장으로 쓰여 청소년 권장도서이기도 한 이 책은 오히려 어른이 되고 접하니 고민이 많아져서 완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달만큼 소중한 것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달을 위해 얼마나 많은 6펜스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코딩하는 것보다 덕질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즐겁지만, 나는 아직 6펜스를 모아 갖고 싶은 굿즈가 많고, 보고 싶은 무대도 많다. 그래서 매번 이런 어중간한 덕질글이 튀어나오나 보다. 나의 글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흔일곱 살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그때까지 달빛처럼 찬란한 이 오로라빛의 덕질이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어느덧 데뷔 6년 차. 에스파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한 솔로곡을 콘서트에서 선보였다. 에스파의 기존 디스코그래피와는 또 달리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무대였다. 그동안 내가 접한 책과 노래가 내 글 이곳저곳에 남은 것처럼, 언젠간 이 아이들이 추천한 책에서 나온 단어와 문장을 음악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우연한 만남을 낭만이라 부르며 기다릴 거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낯선 행성을 함께 여행하고, 인생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어떤 온도의 언어로 이야기하게 될까. 책장 속에 늘어가는 책으로 이번 가을과 공백기가 가득 채워졌다. 올해 추석에도 밤하늘 가득 수수수-수퍼문이 뜬다고 한다. 내가 이 계절을 사랑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