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핸섬 가이즈]
27. 헤어짐 속 만남
1년 후 다시 한여름.
진한은 졸업 후 경기 북부에 있는 한 부대의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소위로 임관해 간부로 생활했다.
정우는 4학년 1학기 수료할 때까지 연락이 두절 된 아이 엄마로 인해, 민찬이 출생신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정우는 체중 미달로 집 근처 시청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점심 식사 후 무료해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 부담 없는 그에게 전화했다.
“헤이~ 진한. 잘 지내?”
“어, 형!”
“연락 한 통이 없냐?”
“미안. 적응하느라. 별일 없지?”
“별일 있지. 진오가 아주 장사를 잘해.”
“그 녀석, 별일이네.”
“그래서 나는 맨날 놀아.”
“형은 할 만해?”
“아니.”
“왜?”
“진상 민원인들 때문에 기 빨려.”
“바람 쐬러 와. 물 좋은 계곡 많아.”
“그럴까?”
“꼭 와. 보고 싶다.”
정우는 핸섬 가이즈 애들에게 진한의 면회 계획을 통보했다. 우빈이 ‘해빵이와 핸섬 가이즈’라고 적힌 현다이 P클래스, 포터를 끌고 나타났다.
“승용차 두고 굳이 이걸 타고 가자고?”
“낭만이 있지.”
“수박도 있지.”
세종도 수박을 들고 나타났다.
“지우 누나는?”
“바쁘대. 안부 전해달래.”
정우의 물음에 세종이 답했다. 운전대를 잡은 우빈 옆에 정우, 정우 옆에 세종이 앉았다. 우빈의 옆얼굴을 보던 정우가 물었다.
“너 얼굴에 멍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한테 맞았어?”
“에이. 묻지 마.”
“뭐야? 빨리 말해.”
정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우빈에게 물어대자 우빈은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웠다.
“수창이랑 싸웠어.”
“그 저번에 호프집에 왔던 너희 고등학교 동창?”
“어.”
“걔랑 왜 싸워?”
“아후.”
“왜?”
“그 자식이 민영이랑 사귄다잖아.”
“뭐? 진한이 애인, 민영이?”
“응. 진한이 그 바보 같은 놈.”
“좀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두 손에 커피를 사 들고 온 세종도 대화에 귀 기울였다.
“진한이 임관하기 전전날, 다 같이 술 마셨잖아. 형 기억나?”
“기억나지. 너희 고등학교 동창 애들이랑 같이 먹었을 때지.”
“응. 진한이가 수창이한테 자기 없는 동안 민영이 챙겨주라는 둥 그런 소리를 하고 갔나 봐.”
“그 자식은 간부로 가는 놈이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고 가냐?”
“민영이를 믿었던 만큼 친구 수창이도 믿었었겠지. 결국 잘못된 만남이 된 거지.”
“와, 수창이 그 새끼.”
세 남자는 한참 화를 내다가 이내 침울해졌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고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들은 파란색 포터에 무심히 올라탔다.
“근데 진한이도 알겠지?”
정우가 묻는 말에 우빈이 한숨을 들이쉬었다가 크게 내쉬었다.
부대 앞에 도착한 셋은 진한에게 전화했다.
“어이~ 소대장님.”
“형! 도착했어?”
“응. 부대 앞 시래기 감자탕집으로 당장 튀어 옵니다!”
“충성!”
핸섬 가이즈 애들은 오랜만에 함께 모였다.
“여기까지 와주고 고마워!”
정우는 밝은 낯으로 아무렇지 않은 양 대하는 진한이 짠했다. 그래서 본인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얘 얼굴 좋아진 것 좀 봐. 딱 군대 체질이네. 말뚝 박아 그냥.”
“난 나가서 돈이나 왕창 벌 거야. 여기 있으니 뇌가 굳어. 머리 쓸 일이 없어.”
“나만 할까? 난 매일 복사하고 팩스 보내는 게 일상이야.”
정우가 공익근무를 하는 자신의 일상을 툴툴거리며 얘기했다.
“그래도 기계랑 통신하긴 하네. 난 풀이랑 흙이랑 쎄쎄쎄 하고 놀아.”
“군대 있을 때라도 좀 쉬어. 매번 돈에 공부에 시달렸잖아.”
옆에서 듣던 우빈이 진한에게 말했다. 그때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감자탕에 집중하던 세종이 한마디 했다. 맛에 반해 된소리가 절로 나왔다.
“와~ 이 집 씨래기 진짜 맛있다.”
“온세종! 발음 명확히 해라. 시래기라고 했냐? 정우형 불렀냐?”
우빈의 말에 진한이 크게 웃었다.
“아 맞다. 형 별명이 쒸레기랬지.”
진한의 말에 세종도 방금 씹은 밥풀이 튀어나올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진한의 웃는 모습을 보니 정우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맘껏 놀려라. 오늘 그냥 개쒸레기 한번 되어보자.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정우는 술을 받아 뚜껑을 땄다.
“한잔 받아.”
정우가 진한에게 술을 따랐다.
“딱 한 병만 먹고 근처 계곡으로 갑시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세종이 말했다. 제발 취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정우의 잔을 받아든 진한은 다시 정우에게 손을 받치며 술을 따랐다. 그리곤 옆에 있는 우빈과 세종의 잔도 채웠다.
“우리 ‘위하여’ 한번 할까?”
우빈의 제안에 모두 피식 웃었다. 그들이 웃는 사이에 진한이 혼자 술잔을 들며 말했다.
“핸섬 가이즈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그 구령에 맞춰 모두 잔을 들어 부딪혔다. 쓰디쓴 소주에도 미간 찌푸리는 사람 없이, 꺾는 사람 없이 한 잔 쭈욱 들이켰다.
감자탕과 시래기를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덧 소주 4병째였다. 세종은 이미 벽에 기대어 잠들었고 우빈도 운전하느라 피곤했는지 앉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정우가 진한에게 말했다.
“진한아. 난 사실 니가 참 좋다.”
“형, 술 취했어?”
“취했지. 제법 취했어.”
“나도 형 좋아.”
“내가 1학년 때 참 암울했거든. 개고생해서 재수하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애가 생겼어. 내가 뭔 짓을 한 건지. 뭔 쓰레기 짓을 한 건지. 내 인생 자꾸 꼬여간다고만 생각했지.”
“형도 20대에 진짜 흔치 않은 인생 사는 중이지.”
“근데 니가 있어서 참 좋았다.”
“나도 형 도움 많이 받았지.”
“너 인마. 잘난 놈이야. 괜찮은 놈이라고.”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그렇다고. 힘든 일 있으면 형한테 말하고.”
“힘든 일 없어. 공부도 안 하고 알바도 안 하고 딩가딩가 좋아.”
“인마,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라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래. 생기면 말할게.”
“한잔 더 받아.”
“형도 은근 정이 많아. 아닌 척하면서 챙겨주고.”
“말라비틀어진 시래기가 감자탕 안에서 불어서 촉촉해졌나 보지.”
“아우, 진짜 못 말려. 시래기 형.”
둘은 잔을 부딪혔다. 소주를 털어 넣은 둘은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진한아, 형이 언제 ‘나도 이제 진짜 어른인가?’라고 생각한 줄 알아?”
“언젠데?”
“말라비틀어진 풀떼기로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길 때, 그때 난 어른이 된 것 같더라.”
“음.”
“지금은 죽을 거 같지만 더 좋은 여자 온다.”
“···.”
“그냥 니 인생 살아. 지나간 사랑 잊어버리고.”
“형, 흑흑.”
정우는 인생의 고비를 함께 넘어온 진한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 때론 형처럼, 때론 친구처럼 반듯하면서 편하게 대해준 기억에 정우는 울컥했다.
“착해빠진 놈.”
정우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이내 쓰러졌다.
혼자 남은 진한은 시래기 감자탕 국물을 한 숟갈 퍼먹으며 생각했다.
‘형, 난 착한 놈이 아니고 멍청한 놈이야. 바보 멍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