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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와 나의 그때

by 백수광부

[소설 : 핸섬 가이즈]

26. 너와 나의 그때


우빈은 이제 그 일을 슬프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묻어야 했다. 다시 해인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면 러브스토리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 일은 가슴 저 구석에 묻어 두어야 하는 아련함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수련회 때 일이다. 에메랄드빛 해수욕장에 도착한 학생들은 들떠 있었다. 학업에 찌들어 있다 바다를 보니 고삐가 풀린 상태였다. 남자애들은 옷을 입은 채 물에 뛰어들었다. 여자애들은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밀물에 발을 적시며 마냥 행복해했다. 우빈과 친구들도 곧 바다에 빠질 생각이었다.


“야, 주해인 공격하자.”


짓궂은 남자애 둘이 혼자 모래사장을 걷고 있던 해인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 그녀를 바다에 빠뜨렸다. 얕은 물이었지만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해인의 모습을 보고 남자애들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해인은 젖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 나왔다. 다들 자신을 쳐다볼 거란 생각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인은 그 아름다운 바다에서 놀림 받은 채 걸어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해인의 얇고 긴 흰색 셔츠는 물을 흠뻑 머금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속살이 그대로 비쳤다. 속옷 선을 따라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남자아이들은 더욱 장난의 수위를 높였다.


“오~ 주해인 몸매 봐라.”

“생각보다 글래머네. 휘이익~”


“야! 빨리 사진 찍어.”


신이 난 남자애들은 휴대폰을 꺼내기 시작했고 여자애들도 은근 그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당시 해인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아이였다.


그때 우빈이 나섰다.


“야! 그만해.”


우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해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그 자리에서 벗었다. 그리고 건넸다.


“주해인, 이거 입어.”


당황한 해인이 멍하니 우빈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수십 명의 아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오~ 정우빈 상의 탈의!”

“캭! 사진 찍어.”


이번에는 여자애들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해인은 더욱 어쩔 줄 몰랐다.


해인이 우빈의 옷을 입는다면 여자애들 공공의 적이 될 게 뻔했다. 그녀는 차라리 남자애들의 놀림감이 되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해인이 우빈의 호의를 무시하고 가려던 그때였다.


“얼른 입으라니까.”


우빈이 넓은 등으로 아이들을 등지고 해인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하늘색 티셔츠를 입혀주었다.


그녀에게는 많이 큰 옷이었다.

하늘색이 바다색에 묻혀 존재감을 잃은 그녀.

하늘색이 비참한 자신을 품어버린 순간, 해인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가여운 모습을 본 순간, 우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수련회가 끝난 후, 우빈은 해인을 찾아갔다. 정식으로 사귀자고 말했다. 늘 자신감에 넘쳤던 우빈은 자신 없다던 그녀를 설득해 결국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해인을 챙기면 챙길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곤란해지는 쪽은 해인이었다.


우빈의 보호를 받는 해인은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여자들의 치밀하고 비열한 공격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렇지만 해인은 우빈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해인은 우빈과 함께했지만, 점점 고립되었다. 함께 있어도 우빈은 해인을 본의 아니게 외롭게 했다.


결국 해인이 떠났다.

해인의 러브스토리의 서사는 시작도 외로움, 끝도 외로움이었다.



우빈은 몽골 초원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한여름에 싸라기눈이 내려 뺨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 차가운 느낌은 그를 어느 해 겨울로 끌어당겼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우빈은 쥐 죽은 듯 조용한 교실에 앉아 초조하게 해인을 기다렸다.


해인은 눈이 내리면 마음이 들떠 공부가 안 된다며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놀다 들어오겠거니 했지만, 해인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빈이 해인을 찾아 나섰다. 학교를 샅샅이 뒤지던 우빈은 소각장 뒤편 산기슭 수풀에 빠져 허둥대는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해인아!”

“우빈아, 나 어떡해?”


그녀는 우빈을 보고 울음이 터졌다.


“너 거기서 뭐해?”

“나가고 싶은데 자꾸 발이 빠져.”


허리만큼 자란 풀숲에서 해인은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머리에는 흰 눈이 소복했다.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우빈은 소각장에 있던 막대기로 주변의 눈을 치웠다. 우거진 풀숲에 눈이 쌓여있어 눈을 제거해도 말라버린 풀더미를 뚫고 나오는 건 쉽지 않았다.


풀숲을 사이에 두고 해인과 우빈은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었다. 갑자기 우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해인아, 내가 구해주면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무슨 소원?”


“그건 널 구하고 나서 그때 말할게.”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빈은 환하게 웃었다. 우빈은 소각장 옆에 세워져 있던 나무판자를 들고 와서 풀숲 위에 얹었다.


“이거 밟고 천천히 건너와.”


해인은 나무판자를 밟고 건너오는데 예상한 것보다 판자가 아래로 쑥 꺼지는 바람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엄마야!”


우빈은 얼른 두 손을 내밀었고 해인은 그 손을 잡으려고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판자 도움닫기를 한 해인은 균형을 잃고 우빈과 함께 눈밭에 쓰러졌다. 그녀의 입술이 우빈의 볼에 닿았다. 어색한 상황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를 우빈이 잡았다.


“내 소원 들어줘야지.”

“아, 그치. 소원이 뭔데?”


우빈은 살짝 떨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 소원 방금 이뤄졌어.”


우빈은 씩 웃으며 해인의 꽁꽁 얼어버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교실로 향했다.


우빈에게도, 해인에게도 눈밭에서의 추억은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하는 첫사랑과의 ‘그때’가 되었다.




지우는 말들이 뛰어노는 초원 언덕에 앉았고 세종도 그녀 살짝 앞에 앉았다. 둘은 나란히 앞을 보았다.


“좋아 보여.”


세종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보여?”

“응.”


“결국 또 나를 찾아왔네.”

“어디든 내가 간다고 했잖아.”


“···.”

“그 사람은 당신을 이미 비켜 간 사람이야.”


“···.”

“나는 당신을 절대 놓지 않을 사람이고.”


“···.”

“그거 말해주러 온 거야.”


지우는 먼 곳을 응시했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탁 트인 곳에서 바람을 맞는 일은 언제나 시작과 같았다. 가슴이 설레고 벅차고 뛰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지우는 세종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걸쳤다. 그의 양 허리에 손을 집어넣어 뒤에서 그를 안았다.

지우의 고개가 세종의 목에 와 닿았다.


“너랑 있으면.”


지우가 잠시 눈을 감았다. 세종은 지우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얼굴을 맞댔다.


“들숨이 쉬어져.”


지우는 맑은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가로막이 수축하고 흉강이 커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 넓은 흉강에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니 벅차올랐다.

세종도 그저 좋았다. 미칠 것처럼 힘들다가도 지우만 보면 다 사라졌다. 지우가 자신을 보고 웃으면 하찮다 느낀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듯 좋았다.


“돌아올 거지?”

“···.”


“내가 여기 있을까?”

“후후. 네가 여기서 뭐 하려고?”


“게르나 짓고 말똥이나 치우고 살지 뭐.”

“아하하하.”


“후훗. 상상하니 웃겨?”

“아우~ 못 말려.”


둘의 기분 좋은 웃음이 멀리 울려 퍼졌다.

2학기 개강을 일주일 앞두고, 세종과 우빈, 개해빵 멤버들은 몽골을 떠날 채비를 했다. 단 한 사람, 지우만 남겨졌다. 세종은 몽골에 올 때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지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기다릴게.”

“곧 갈게.”


“응.”

“다 비우고 갈게.”


“내가 새롭고 신나고 행복한 것들로만 꽉꽉 채워줄게.”

“그럼 나 기대한다?”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둘은 다시 떨어지게 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우빈과 세종은 이야기를 나눴다.


“너 좀 멋있다.”


우빈이 먼저 세종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내가 뭘?”


“전해 들었어. 정우 형이 너 여기에 보낸 이유.”


“멋있긴. 개뿔.”


“그러게. 개뿔.”


세종이 피식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허! 웃네.”


“그러게, 웃네.”


“보기 좋다. 온세종.”

“그래, 너도 웃어.”


“허! 너한테 그런 말을 다 듣고.”


그렇게 둘은 몽골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새긴 채 한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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