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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금이 남아있어요

PROLOGUE


청년부부지원금을 신청하러 면사무소에 왔어요.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 거리캐스팅되어 받은 스틸컷. 광고에서 편집되어 볼 순 없게 되었지만요.

결혼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그사이 함평으로 이주하게 되었어요. 삼 년 동안 지급되는 함평의 청년부부 결혼지원금 혜택공고가 떴길래 면사무소에 가봤는데 세상에 신청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함평군은 인구소멸지역이라 49세까지 청년이라 불러주는 데다가 결혼과 육아에 대한 지원금에 대한 구성이 알차네요.)

제일 좋아하는 건 청첩장 사진이에요. 우리 가족 모두 나온 사진은 모두 이렇게 흔들렸어요. 우리 삼베 덕분에. 사진을 좀 아는 모시와 참 달라요.



아 그런데, 신중하게 필요한 첨부 서류를 떼려고 서있는 면사무소 민원창구 앞에서는 옆 창구 담당자분까지 저를 에워싸고 난리가 났습니다.

 

아무리 해도 지문인식기에 제 손금이 읽히지 않는 거예요. 다음 민원인이 기다리시는데 말이에요.


처음 몇 번 동안의 웃음들도 사라지고 당황한 담당자분이 바깥 무인발급기 지문인식기가 좀 더 잘 읽힌다고 문까지 열어주며 안내해 줍니다.

시골 사람들은 하도 일을 많이 해 손금이 다 닳은 분들이 많아 이런 일이 잦다며 저를 위로해 주는데 묘한 소속감이 생기면서도 아이고 내가 할머니들 하시는 고생에 비할 수가 없는데 뭔 일이데. 수고를 끼쳐드린 것이 미안해서  아 제가 이다지도 일을 많이 했나 봐요. 어째 손이 아프더라고요. 얼버무렸어요.


7번 지문인식실패하여 초기화면으로 되돌아가기를 세 번 끝에 겨우

 물티슈로 지문 인식기를 빡빡 닦고 제 손끝에 입김을 불어 옷소매로 문질러주신 정성으로 드디어 지문인식 성공!  사라졌다던 제 손금이 아직 남아있었나 봐요.


리동지가 담아준 무념무상의 김백지


보세요.

전 손금이 곧 아주 다 사라지더라도 이상할 것 없이 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감물들인 천(우리가 먹는 감으로 물을 들인답니다.)을 펼쳐 널고, 접어 거두고, 접고 말고 다림질해요. 패턴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수를 놓다 보면 굳은살도 쓸려나가 반질거릴 정도거든요.


바느질하는 김백지



농사도 짓습니다. 손금만 아니라 손에 관절염도 있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자연 그대로의 천에 풀과 열매로 물을 들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입을 옷을 짓는 일은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이 일엔 저의 언어들이 함께 물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좋아요.

오래전 뜻이 맞지 않아 떠났던 친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나의 언어를 잃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되는구나. 배워갑니다.


어떤 뜻이 맞지 않았었냐면은요. 아... 그땐 그랬었어요.

엄마 아빠의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지켜가야 한다는 신념 속에서 다들 고생하느라

아늑하고 다정하길 바라던 집과 가족들처럼 지켜지못한 것들이 있었거든요.

뉴욕에서 공부한 엄마는 블루진에 대적할 코리아브라운진을 꿈꾸며 아름다운 옷을 만들었고,

서울에 매장을 지키며 계승자 수업을 받던 갓 스물의 저는 공예작품을 사 입을만한

서울 사모님들의 대화를 들어주고 있기엔 김백지는 너무나 싱싱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었어요.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가 되어왔어요.


해보고 싶은 일, 여행하고 싶은 곳과 살아보고 싶은 곳, 가슴이 이끄는 대로 자유로이 살던 제가

리동지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같이 살게 된 시아버지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온 건

다 함께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시아버지를 모시게 되니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우리 엄마생각이 너무 났거든요.

리동지가 반가운 제안을 해주었어요. 우리 다 같이 살아보는 건 어때요? 폐교는 넓고 집들이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작은 마을 같으니 같이 살더라도 각자의 시공간을 지키며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한 가지 큰 변화가 필요했어요. 작은 카페와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소박하게 살던 우리가

부모님들의 보호자가 되어 이 큰 폐교작업실을 운영하려면 우리가 해오던 일보다 큰 일을 해야 했어요.

이십오 년 동안 가꿔온 천연염색작업실을 운영하는 것이 대가족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 가운데 가장 좋은 조건의 일이었어요.


하지만 한 시절을 보낼 가슴 뜨거운 의미와 빛나는 비전을 찾지 못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사진을 봤어요. 인도의 옷을 염색하는 공장지대를 가로지르는 강이

검고 끈적하게 변해있는 사진, 그 폐수로 인해 온몸이 파랗게 물든 인도의 강아지들 기사가 보도된 뒤

열흘 만에 폐쇄된 인도 뭄바이의 염색공장 이야기, 러시아의 화학공장 가까이 살고 있는 강아지들이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이렇게 온몸이 파랗게 변해버린 기사를 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다가 문득 그토록 찾지 못했던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트위터 РИА Новости 캡처[출처] - 국민일보[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545269


맞아! 우리는 이렇게 강을 오염시키지 않는 염색방법을 알고 있어!

생명들을 다치게 하는 염색이 아니라 살리는 자연 그대로의 염색방법을 알고 있어!

전통염색이 아니라 기후위기시대의 자연염색이라면

우리가 사랑하는 강과 흙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친구로 살 수 있어!


우리의 역할이 생겼다고 기뻐했어요.


제주도 비자림로 난개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에서 만난 리동지


그 순간 우리 리동지와 키동지는 함평에서 다 같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난개발로 베어지던 제주의 비자림로 숲을 지키는 시민활동에서 만난 우리에게

 '기후위기 시대의 자연염색은 생활을 지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에요.'


이렇게 함평에 살게 되었어요.

앞으로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차근차근 천천히

느리고 단순하게


아직은 남아있는 손금이 언제 다 사라질지 지켜봐 주세요.


어느새 우리가 이렇게 생을 함께 걷고있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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