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은 일상에서 받는 민원을 대하듯 답했다. 나는 인지 부조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이 일상적인 민원인가? 한국이었으면 어땠을까. 겪어본 적 없지만 이렇지 않을까.
- 소방당국이 화재원인을 조사한다.
- 입주민에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의 조치사항을 공지한다.
- 조치사항을 이행한다. 시설 점검이 되었든, 교육이 되었든. 비용은? 글쎄. 아파트라면… 입주민이 내는 관리비에서 집행하나?
직원은 원하면 유료로 전기 안전점검을 받으라고 했지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왜 그 책임이 내게 있는 건지. 게다가 우리 집만 점검해서 무슨 소용일까. 이웃집에 불이 나면?
처음에는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까 했다. 하지만 다른 집이라고 설비 수준이나 화재 관리방법이 다를까 싶었다. 이삿짐을 풀고 정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짐을 싸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잊기로 했다. 잊고 잘 지냈고 해가 바뀌었다.
6월의 어느 주말 아침 우리 가족은 외출을 위해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콧 속 가득 익숙한 냄새가 와서 닿았다. 맙소사. 또 전기 탄 냄새였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니 보일러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 키보다 큰 원통형의 보일러는 노랗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는데, 까만 그을음이 칠을 다 덮어 놓았다. 바닥에는 물이 찰방거렸다. 신발을 넘어 양말로 스며들 만큼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천천히 상황 파악이 되었다. 보일러에 불이 났구나. 다행히 껐구나.
그 뒤로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온수 공급이 끊긴다는 관리사무소의 공지가 있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특별히 놀랍지는 않았다. 큰 불로 번지기 전에 껐으니 이만하면 대처를 잘한 것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며칠이 지난 오후, 아이 하원 시간이 되어 지하 주차장에 내려왔는데, 또 익숙한 그 냄새가 났다. 연기도 주차장 한 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달려갔다.
“또 불이 났나요? 어떻게 된 건가요?”
“곧바로 껐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며칠 전에도 보일러에서 불이 났잖아요. 오늘 불은 어디서 난 건데요?”
직원은 방어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화를 내서 직원이 방어적이었는지, 직원이 방어적이어서 내가 화가 났는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나는 화가 났다.
“접촉 불량으로 스파크가 일어나서 그런 거예요. 곧바로 꺼서 이제 괜찮습니다.”
나는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네 번째였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반복해서 비슷한 일을 겪고도 내버려 둔 내 자신을 탓하게 될 것 같았다. 그날로 이사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녔다. 스무 개는 본 것 같다. 그중 두 개의 매물을 점찍었다. 첫 번째 집에 가전 가구에 대한 요청을 넣었다. 거절당했다. 다른 집에 연락을 했다. 그 사이 집이 나갔다. 같은 단지에 비슷한 집이 또 매물로 나오길 기다렸다. 매물이 나와서 다시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또 거절당했다. 시간만 흘렀다. 얼마든지 비슷한 조건의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 예산에서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최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