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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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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문우 66호 독자모임

정리정돈 아자

  입김이 모락모락 나던 11월의 어느 날, 문우의 독자모임이 열렸습니다. 지난 두 차례의 독자모임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세로 인하여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는데요, 다행히 이번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연희관 자치도서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특별하게도 사회과학대학 언론 동아리 ‘연희관 015B’의 편집위원들와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문우편집위원회에서는 편집장 검은, 편집위원 포슬, 눙, 노랑, 야부, 유연, 찌부찌가 참여했고, 연희관 015B에서는 편집장 곤지, 퓨, 편집위원 모자, 심술, 오월, 온, 영원, 예원 님이 참여해주셨어요.


*문우 66호를 비롯한 지난 호는 문우편집위원회 블로그 또는 브런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획 구성


찌부찌    메인 세미나의 주제가 전쟁으로 정해진 이유가 궁금해요.


검은    제 기억으로는 그때 한창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이 막 시작됐던 때였어요.


유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침공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퓨    저도 궁금했던 게 전쟁 기획으로 묶인 기사들이 다양한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잖아요? (세미나에서는) 어떤 것을 읽으셨는지, 세미나 진행은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저희(연희관 015B)는 텍스트를 단발성으로 정해서 그때 그때 하고 넘기거든요. 그래서 (문우편집위원회는) 어떻게 세미나를 기획하고 그걸 글에 반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노랑    주제 안에서 차시를 정한다고 할까요.


검은    전쟁을 큰 주제로 잡고, ‘전쟁과 젠더’, ‘전쟁과 민족’, ‘냉전과 자본주의’, ‘반핵과 평화’, 이렇게 가지를 뻗어서 진행했어요. 



권두시&편집장 서문     


노랑    제가 이번 호에 참여를 안 했다 보니까 훨씬 편한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시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권두시도 빼놓지 않고 읽는데… 문우 이번 66호 제목이 월간생존일기라고, 전쟁이 메인 주제였잖아요. (권두시에서) 험악하고 각박하고 거친 느낌을 잘 담아주신 것 같아서 재밌게 읽었고요. 편집장 서문도 읽으면서 (이번) 호에 실린 내용들을 잘 요약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메인기획 주제는 전쟁이지만 문우의 눈이라고 메인기획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시점으로도 내용을 다뤄보는 꼭지가 있는데 거기서 검은 님이 환경 이야기를 실어주셨단 말이에요. 편집장 서문에서 그 글도 잘 버무려서 적어주신 것 같아서 잘 읽었습니다.


찌부찌    서문 관련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이번 호 받아보고 생각보다 지금, 특히 올해에 실제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방황하는 일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거든요. 편집장 서문을 읽으면서 우리 편집장님께서 이 어려운 상황과 그 안에서 생존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을 하셨고 또 그런 식으로 이번 학기를 끌어왔다는 걸 볼 수 있어서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심술    시를 읽을 때마다 시에서 병치되고 있는 단어들을 어떻게 독자로서 위치시킬 것인지, 어떤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가 우연성에서 필연성으로 확인될 때 시인과 소통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이 시가 시작부터 어떤 감각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사실 이 시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각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감각들이 있었는데, 시의 마지막에서 <농담이니 / 마저들 살아가세요>라는 부분이 그런 감각들을 아울러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여는 시가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 같네요.     


곤지    저는 서문이 인상깊었어요. 제가 (연희관 015B) 지난 호 글을 쓰면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전쟁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줌인해서 글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만 하다가 결국 쓰지 못했는데, 문우가 여러 맥락과 삶을 담아내면서 쓴 호라는 것이 굉장히 반가웠어요. 특히 누군가는 써줬다는 점에서 오는 이상한 안도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우의 이번 호를 읽기 시작할 때 되게 설레면서 서문을 읽었던 것 같아요. 전쟁을 어떻게 다루려고 했는지가 굉장히 섬세하게 잘 드러난 문장들인 것 같아서 너무 잘 읽었습니다.



아자, 야부, 루_집을 찾는 수다회     


모자    저는 이 글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읽으면서 밑줄 쳐놓은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난민을 마주하는~’ 이 부분이에요.     


루    (...) 그런데도 그들은 그 순간 자신들을 향해 절박하게 소리치는 난민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거나 주지 못하는 채 그저 사진만 찍잖아요. 상황적 격차가 정말 크게 와닿았어요. 난민의 이주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만남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저도 ‘난민들이 들어오면 당연히 받아줘야지’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만 생각하고, 실제로 우리가 서로 마주치는 장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상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쫓겨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에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하는 상황이 난민들에게는 모욕적이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일일 텐데 그들이 느끼는 이 당연한 감정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보지 못했고요. 그 장면에서의 사람들도 그런 고민의 과정 없이 갑자기 서로를 대면한 거겠죠? 그때 너무나 극명하게 보이는 격차,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 두 가지가 참 무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모자    이게 정말 와닿더라고요. 저도 그냥 ‘난민을 박하게 대하면 안 된다’하는 정도로만, 그러니까 난민에 대해 당위적인 얘기만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피상적인 얘기였는지 다시금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난민들을 바라볼 때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선(善)을 요구하잖아요. 그런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해준 것 같아서 이 글이 너무 좋았어요.     


곤지    저는 11쪽에 포슬이 해준 이야기가 인상깊었는데, 저도 영화 《사마에게》를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거든요.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서사들만 보다가 ‘이렇게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나 희망적으로 서로를 돌봐줄 수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충격적인 희망을 봤던 것 같아요. 여기서도 그 얘기를 짚어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오히려 서로 나누고 의지하는 과정에서 진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비물질적인 자원이 생산된단 걸 느꼈어요.” 특히 이 문장이 좋았고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온    글 형식이 대화문으로 되어 있어서 쉽게 읽히고, 또 저도 함께 대화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제가 영화 《애프터 양》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가 언급된 것도 좋았습니다. 초반부에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서는 전쟁 속에서 지켜지고 기억되는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이기 때문에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공감이 많이 되었고요. 일상이든 전쟁이든 따뜻한 사람으로서의 정을 느끼는 순간 때문에 살아가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짚어줘서 좋았던 것 같아요.     


심술    저도 각본이라는 개념을 재밌게 읽었는데, 제가 최근에 극장에서 음향 오퍼레이터를 했어요. 극은 가상의 상황이잖아요. 비 오는 효과음이 필요해서 제가 10개를 넘게 찾았거든요. 근데 연출을 맡으신 분이 이건 빗소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들리는 것만으로도 빗소리로 느껴져야 하고, 그 상황에 맞는, 그러니까 유리창에 적당히 후두둑 부딪히는 빗소리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비로 나는 소리가 아니라 후두둑 소리가 더 비처럼 느껴진다면 그게 더 좋은 거잖아요. 각본이라는 게 진짜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위계를 만들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어떤 감정이나 생각들을 미리 통제하는 기제로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최근에 그런 경험과 함께 이 개념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포슬_모자이크: 우크라이나와 한국, 장애와 난민에 관한 소고(들)     


오월    최근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검은 집〉이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친구랑 같이 봤는데요. 그게 많이 생각이 났던 것 같아요. 왜 생각이 났나 돌이켜봤는데, 여기 글쓴이의 변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시점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 계시잖아요. 그게 그 다큐멘터리에서 인상적으로 본 부분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고요. 제가 예전에 저희 부모님과 그 얘기를 했었거든요. 원래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이나 난민 문제, 이런 쪽에 문제가 있으니까 관심이 많았는데 대선 이후로 내 코가 석자가 돼서 관심을 못 쏟고 있다, 이런 얘기를 농담 반 진담 반 식으로요. 그러다가 국내 문제를 보기만 해도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국외에서 실제로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어서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주목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부채감을 약간은 해소시켜줄 수 있는 글이어서 잘 읽었고요. 난민에 대한 이야기, 그 중에서도 장애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평상시에 장애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많이 없는 사람이고 문제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조명하지 않는 부분을 보는 데에 특화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못하고 있었던 것이 다시 한 번 느껴졌어요. 이런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그 시점에 관해서도 고민하시고, 사려 깊은 글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저는 지난 호 글을 쓰면서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료조사가 적절히 들어가 있으면서도 사려 깊고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원    글 처음에 ‘글쓴이의 변’이라고 써주신 부분을 참고해서 글을 읽어나갔어요. 그 부분에서 방금 오월의 말처럼 사려 깊은 태도를 느낄 수 있었어요. 예컨대 “바다 너머의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어떤’ 렌즈를 통해 ‘그들’을 만나야 할까요?”라든가, “직접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지어 다른 언어로, 대리할 수 없습니다.”같은 표현들이 내가 완전히 경험하지 못한 삶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전제한다는 거잖아요. 장애와 난민의 교차점을 지점을 짚어주신 것도 흥미로웠어요. 그들이 겪게 될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서술해주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30쪽 하단에서 “‘정상 신체’의 생계 유지가 곧 난민 지원의 핵심인 것으로 말이지요.”라는 부분에서 난민의 지원을 두고 난민의 최저생계를 고민할 때 정상 신체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 어떤 렌즈를 가지고 이들을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는 건 아니어도 그것들을 고민해보는 기회를 주는 글인 것 같아서 굉장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심술    저도 이 글을 되게 재밌게 읽었는데요. 제가 이 글을 좋아하게 된 만큼 잘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글의 매력은 ‘글쓴이의 변’과 나가며 한 저자의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우선 앞 부분을 읽으면서는 말의 매개와 장소, 위치, 그러니까 이 말이 어떤 장소와 위치 속에서 발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만큼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존재하고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읽었어요. ‘정말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마주했을 때 연결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름을 가지고 위치를 가지고 옷을 입고,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연결될 때 연결이 시작되잖아요. 언제나 시작은 벌거벗은 생명으로서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것을 입고 있고 특정한 장소에 있으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마주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질문들을 품은 채 글을 읽어갔습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두 가지 흐름을 의도했다, 난민과 장애의 교차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면서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읽혔으면 한다고 마무리해주셨는데. 사실 저는 굉장히 확신에 차서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이걸 꼭 전해주고 싶다, 내가 이걸 말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 때 글을 쓰는데, 저는 이 글을 통해서 ‘내가 이걸 다 이해할 수 없겠다, 다 말할 수 없겠다’하는 생각도 굉장히 글을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말하기의 태도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두텁고 재밌게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포슬, 저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나요?     


포슬    맨 처음에 쓰기는 했지만,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글을 쓴 것 같아요. 완전한 공감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야기가 오갈 수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지점은 감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신 그 감각이 되게 난잡하다고 생각해요. 그 연결이 절대 매끄럽지 않고 엄청나게 울퉁불퉁하고 더러운 형태로밖에 이뤄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고민했고 스스로 이 글이 망했다고 생각했던 주된 이유였던 것 같아요. 제가 어떤 흐름을 상정해놓고 여러 이야기를 짜맞추는 구도로 이 글을 썼는데, 최근 들어서 글을 읽는 입장이든 쓰는 입장이든 어떤 이야기를 독해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자기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나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짜맞추는 것이 예의 있는 행동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것은 써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걸 써야겠지만 나의 자아를 지나치게 투영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난잡하고 더러운 과정 속에서 글을 열린 결말로 끝낸 이유가 그건 것 같아요. 너무 내 이야기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술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은 ‘이건 이 부분에서 좀 이상한 것 같다, 아닌 것 같다, 이 부분은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서로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좀 더 모호하고 좀 더 정확한 이야기가 가능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가능할까요? 모르겠네요. (그런 반응을) 원하면서도 무섭기도 하고요. 만남과 연결이라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한 만큼 무섭고… 그런 게 항상 있는 것 같아요.     


영원    저도 좀 더하자면, 사려깊다는 표현이 용기 있는 태도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얼마 전에 ‘가장 용기 있는 자는 비겁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다’라는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글쓴이의 변’도 그렇고 ‘나가면서’도 그렇고 명확히 이야기하시지 않잖아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가 아니라 이렇게 쓰는 태도가 용기 있는 태도라는 생각을 했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쓰는 게 되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유연_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랑    짧게 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제가 1학년 때 국제법에 관한 강의를 들었어요. 거기에서 NPT, 핵확산방지조약에 대해 배웠지만 교수님께서 자세하게 다루시진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름만 알고 잘 모르는 주제였어요. 혼자 이걸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조약집 같은 형태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까 그냥 읽어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정리를 잘 해주셔서 굉장히 잘 이해가 됐고 좋았어요.     


찌부찌    41페이지에 “모범적인 비핵/비확산 국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시혜적인 언어라는 게 비단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내지는 작은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맥락을 잘 알기 어려웠는데 읽기 쉽게 정리해주셔서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심술    저도 같은 부분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국제 정세에서 역학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잖아요. 주어진 정보만 수용하는 뉴스 시청자나 신문 구독자로서도… 그래서 누군가의 해석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는데. 저는 모범에 대한 그 문장이, 항상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거론되는 국가들이 핵을 가진 국가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잖아요. 핵을 가지고 있음에도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언급되지 않는 국가들이 있고 글에서 적어주셨듯이 비핵화를 했을 때 ‘잘했어~’ 하는 칭찬을 받는 국가들도 있고. 이런 역학 관계가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걸 읽어내시려면 얼마나 조사를 많이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노랑    메인세미나를 하면서도 계속 든 생각인데, 이런 글들을 보면 사실 우리도 알고 있잖아요. 핵이라는 것이 환경적인 문제도 있지만, 얼마나 지구상의 많은 것들을 궤멸시킬 수 있는지, 그 파괴성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국제 사회에서 핵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살펴보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나 핵 가지고 있으니까 건들지 마’라든가, ‘저 나라는 핵을 가지고 있어서 무섭다’하는 최후의 보루처럼 다루어지고 실상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든요. 핵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필수적인 이유는 글 마지막에 언급해주신 ‘비핵과 평화’이고, 분명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자랄 주제일 텐데 핵이 정말 단순하고 치졸한 싸움처럼 다뤄지고 있잖아요. 그런 상황을 이 글에서도 읽어낼 수 있어서 좀 씁쓸했어요.     


곤지    저도 비핵이나 평화와 같은 당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간과하는 냉혹한 국제관계 현실을 굉장히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적어주셔서 좋았던 것 같아요. 다만 이 글이 우크라이나가 비핵화를 진행한 것이 어떤 부분에서 그들의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그것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이어졌다는 어떤 전제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볼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러시아의 침공이 과연 우크라이나의 약한 국방력으로 촉발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지 디자인이 너무 세련되고 예뻤어요. 이런 거 저도 너무 탐나요. 쓰시면서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단_멋지고 비싼 안보를 결제하시겠습니까     


심술    저는 이 글이 정말 재밌었어요. 전쟁이 어떻게 우리의 삶 곳곳에 녹아들어가있고, 어떻게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결정해왔고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었는데요. 일단 첫 번째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어요. 우리의 안전이나 안보와 관련한 것들을 자본의 통제를 받게끔 계속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물이라든가, 공기라든가. 이런 것들도 부분적으로 상품화가 되고 있잖아요. 특히 물은 더 상품화가 심하고. 공기의 상품화하니까 어떤 드라마가 생각났는데, 재벌집에서 자기 집에는 자체적인 산소 공급기가 있는 거예요. 공기의 양이 많아졌을 때 사람이 프레쉬함을 느끼나봐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언젠가는 정말 공기도 사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고요. 세월호 참사에서 민간 잠수부와 국가 사이에 있었던 협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저는 한 번도 이런 해석을 본 적이 없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되게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민간 잠수부들을 떠올렸을 때 굉장히 무방비 상태로 투입이 되었고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착취당한 부분도 있잖아요? 국가와 민간 잠수부가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 책임의 영역은 정부에 좀 더 있었던 것이라는 기본 세팅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있었다면 이 민간 잠수부들과… 이근과 민간 잠수부를 동치시킬 수는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 차이들이 좀 더 설명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구조의 맥락이 더 들어갈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간 잠수사들이 열악한 환경이나 이런 것에 관해 이야기한 것, 안전 장비를 더 달라고 얘기한 것과 안보 업체에서 가격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맥락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물론 그것을 완전히 같다고 쓰시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굉장히 재밌으면서 이 글에 대해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곤지    일단 독자들의 흥미를 돋구는 멋진 제목이 너무 좋았고요. 안보와 무기 회사와 자본 주의, 남성성이 매우 긴밀하게 얽히고설켜서 지금의 안보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컨대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생화학 무기를 만들던 군수 물자 회사들이 자기 발명품을 살충제를 만드는 데에 사용을 해서 그것으로 엄청난 자본을 끌어 들이고 무분별하게 환경이 파괴되었던 일들도 떠올랐고요. 이 무기 회사, 안보를 만들어 내고 누군가의 삶을 지킨다고 말하는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평화를 파괴하고 삶을 죽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전쟁을 얘기하는 데 빠져서는 안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제도 굉장히 적절했던 것 같아요. 자칫 거대하고 복잡할 수도 있는 이 구조를 챕터를 나누어서 논리적으로 만든 흐름도 굉장히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도 너무 좋았어요. “힘을 지닌 거대 주체들 사이에서 개인은 어떠한 안보를 꿈꿔야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개인적 차원에서 안보를 꿈꿔야 할까? 공동체 차원에서 어떤 전환을 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습니다.



60, 봉화, 검은_전쟁은 무엇을 무너뜨리는가


찌부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전쟁을 너무 떨어뜨려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기후와 식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이 ‘전쟁은 무엇을 무너뜨리는가’, 라고 했을 때 직접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은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다쳐서 죽는 모습이지만, 실제로 전쟁이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방식은 삶의 터전을 없애버리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기후위기와 식량 위기를 이야기해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문우의 눈’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불안을 검은 님이 써주신 것만큼이나 전쟁이 결국 우리의 삶,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야금야금 없애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주는 글이라 좋았습니다. 삼국지 같은 걸 읽어보면 싸울 때 일부러 곡식 다 태워서 굶어 죽게 하잖아요. 전략적으로는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의 삶을 깎아먹고 결국 자기도 자멸하는, 공멸하는 거잖아요. 효율 중심의 산업론이 만들어 낸 새로운 전쟁의 방식과 그게 결국에는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설명해준 것 같아서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퓨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사고 방식, 그 시선이 식량과 자연을 볼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부분까지 지적을 해주셔서 되게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그런 것만 알잖아요. ‘요새 이거 값이 올라서 비싸졌대’하는 결과같은 것만 아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좋았고, 이후에 뻗어나가는 내용도 좋았어요.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게 이런 시선이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지나치게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외계에서 지구를 객체화해서 보는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데,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 변화를 물색하려면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전쟁이라는 관점이 지구라는 생태를 바라볼 때도 적용되는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찌부찌    그런 맥락에서 정말 저희가 요즘 되게 전시 상황 같은 시간을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데카르트-뉴턴식이라고 하는, 타자화시키는 이런 것들이 예전보다 더 당연시되고 있는 것 같고, 지금 여기에는 전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얘기하지 않지만 연초부터 지금까지 되게 전시 상황 같은 시간을 살아오고 있는 느낌이에요.


심술    제가 되게 좋아하는 교수님께서 전공 개론 시간에 ‘너네 혹시 이야기로 건설된 국가를 아니?’ 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그 국가가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야기에서 그것이 자기의 영토였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영토로 만든 거잖아요. 물론 이스라엘의 여러 사람들이 국제 사회의 깡패인 미국의 수뇌부를 움직이는 등 정치·경제적인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로 건설될 수 있었겠지만,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막연히 이야기와 기억이라는 키워드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악행을 일삼고 있는지는 몰랐고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 글 덕분에 추상적인 키워드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은_해피 엔딩이 아닐지라도     


모자    저는 항우울제 처방을 받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공감 가는 얘기가 많았어요. 저는 의사선생님께 얘기하는 걸 포기했거든요. 내가 왜 우울한지를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헤테로 남성으로서 너무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고, 의대에 갈 정도로 똑똑했으며 자기 삶에 고난이라곤 없었던 사람인 거죠.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납작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7월에 노동운동으로 한창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시기에 병원에 가서 제 얘기와 한국 사회의 산업화로 인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피해와 구조적인 문제가 나를 괴롭게 한다고 얘기하면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로부터 유리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저한테 전혀 도움이 되는 해결책도 아니고, 내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그런 사회 현실을 벗어난다는 건 사실상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후로 선생님께 제 생각을 얘기하기보다 내가 약을 먹고 반응이 어땠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검은 님이 이 글에서 의사선생님께 기후위기로 인한 우울을 이야기했을 때 항우울제를 더 처방해주겠다는 반응이 너무 저의 선생님과 똑같아서 ‘나만 이런 힘듦을 겪는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글이라서 좋았어요.     


심술    저는 되게 좋았던 구절이 있는데, 72쪽에 “사회적인 재난을 목도하면서 마주한 수많은 감정들이 오로지 개인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환될 때, 실제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고 목숨을 잃는 재난을 오락과 기회로 삼을 때, 기후 위기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결과와 삶들은 은폐된다.” 이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책임이나 처벌 같은 단어가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시대를 살잖아요.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이건 누구의 책임인가?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실제로 누군가가 책임을 지는 일은 줄어들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것을 누군가의 책임으로 정리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행동들, 그 책임과 책임을 연결해서 어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고통을 보듬는 방식이 아니라, 얼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만들어서 나에게서 분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그런 기제로 계속해서 진행되고. 그러다 보니 개인도 이것이 나의 책임이 아닐 수 있는데도, 모든 걸 나의 책임으로 느끼게 되고. ‘네 책임, 내 책임 따지면 뭐해,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데’ 이 문장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새삼 많이 들어서 마음에 오래 남을 구절인 것 같습니다.     


찌부찌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은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고민이 뭔가 생산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기보다 단순히 ‘그래서 너무 우울하다’라는 식으로 끝나버린다는 게,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품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커다란 세상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상대는 그 커다란 세상이고, 내가 무언가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저는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동해야 하고… 나를 거대한 세상에서 떼어내서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났고, 태어났기 때문에 느리게라도 움직여야 하는 힘이 부딪힐 때마다 사람이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요즘 좀 이상하죠. 오늘 날이 이상할 정도로 좋더라고요.


모자    개나리가 폈어요.     


유연    철쭉도 폈어요.     


심술    이 이상고온이 곧 끝나고 다음주부터 엄청 추워진대요.     


찌부찌    이게 저희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다만 주어지는 대로 비명만 지를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방청객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을 잘 짚어주신 것 같아요. 멈추려는 힘과 나아가려는 힘 사이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퓨    그런데도 이런 결론을 맺으셨다는 것이 너무 멋지고 좋았거든요. “그래도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작고 사소한 행동이라도 실천하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늦춰져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적으셨다는 것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어요. 한 2년 전쯤에 저도 제 원고를 작성하면서 일주일 내내 울면서 지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세상이 너무 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때 저의 결론은 정신 승리? ‘어쩔 수 없다, 살고 보자’였어요. 사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버린지는 조금 됐거든요. 그것이 없음에도 왜 살아야 하고 왜 행동을 하고 왜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을 때 이런 움직임을 만들어내면서 마주친 만남들 자체가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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