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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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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이어지고 싶으니까

편집위원 노랑

*애니메이션 ‘사라잔마이’ 및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각 개체로 구분된 이상 필연적으로 남과 단절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건조한 사실이 세상과 만나면 달갑지 않은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세계에는 언제나 어떠한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넘쳐나지만, 필요한 자원은 희소성을 띤다. 그러므로, 그것은 남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필요한 자원을 냉정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을 철저하게 ‘나’와 분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악순환 속에서 경쟁이 발생하고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경쟁을 통해 짓밟거나 짓밟혀본 적 있는 우리는 이미 경쟁이 가진 비열함에 대해 알고 있다. 모두에게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을 위해 경쟁해 본 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 경쟁이 개인의 심신과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안다.


  이러한 상황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지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사회에서 모두에게 자원이 골고루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자원을 빼앗기는 쪽은 대부분 소수자이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여성,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 제대로 된 노동 환경을 제공받지 못하는 노동자 등의 사례로 보면 자원은 기득권층에게 편중되고, 주변부의 존재들에게는 더욱 희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이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세계관이다. ‘(한정된 양의) 파이 조각을 더 많이 차지해야 한다’는 비유처럼, 뉴스를 보다 보면 세상은 하나의 파이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는지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이 가지고 있을, 혹은 타인이 가지게 될 몫을 내 앞으로 끌어오는 데에만 전념하게 된다. 더 높이 올라가서,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자신의 몫을 늘리고자 타인을 돌보기보다는 밀어내는 세상에서, 소수자들은 더욱 다른 이들과 연결되기 어렵다. 온갖 서비스 이용의 어려움, 재산의 부족, 여유 시간의 부족, 범죄의 위협 등의 이유는 연결을 위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기득권층을 향해,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연결을 시도해도 그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내어주기 ‘어렵다’, ‘싫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아니면 그 목소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오로지 정해진 몫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그저 '타자'일뿐인 타자와 싸우고 또 싸우는 것뿐일까? 절대다수가 패자가 되는, 파괴와 좌절의 끝없는 싸움뿐인 걸까? 이 한계를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없을까? 


  픽션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현실에 없는 장면을 상상하고 기록해 그것이 실제 현실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세일러문’, ‘소녀혁명 우테나’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2019년작 애니메이션 ‘사라잔마이’를 통해 미흡하게나마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유일한 하나의 파이를 갈라먹어야만 하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떤 행동들을 통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서로와 단절된 상황을 극복하는 방식은 무엇일지 픽션을 통해 상상해 보자.



*


  ‘사라잔마이’의 세 주인공인 카즈키, 쿠지, 엔타는 각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사라잔마이'의 한 장면, 왼쪽부터 엔타, 카즈키, 쿠지가 나란히 보인다.

  카즈키는 현재의 가족을 구성하는 엄마와 생물학적 혈연이 아니며, 카즈키의 동생은 카즈키를 쫓아오던 중, 사고로 다리를 다쳐 걸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고립감,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에게 ‘잘’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카즈키를 괴롭힌다. 따라서 카즈키는 가족의 사랑과, 동생의 안녕을 쟁취하려 한다. 

  쿠지와 쿠지의 형 치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마약 유통 등의 꺼림칙한 일에 손을 대며 근근이 삶을 이어나간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를 팔지 않기 위해 뒷세계의 돈을 빼돌린 형 치카이 때문에, 쿠지는 어린 시절 뒷세계의 인물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다가 그만 상대를 죽여버린다. 이 살인에 대한 혐의를 형인 치카이가 동생 대신 뒤집어쓴다. 쿠지는 형과의 유대가 이어지기를, 이 가족이 안녕하기를 바란다. 

  엔타는 친한 친구가 없이 외롭게 지내던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준 동성 친구인 카즈키를 짝사랑한다. 카즈키는 잠에 든 자신에게 뽀뽀하기 등 엔타가 명백히 자신을 좋아해서 하는 행동들을 보고도 친구끼리 장난을 치다 벌칙에 걸려서 했던 행동인 걸 안다면서 아무런 놀람도 없이 웃어넘긴다. 따라서 엔타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카즈키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라잔마이’의 세계에서는 갓파라는 요괴가 만들어낸 ‘접시’만 있다면 어떤 소원이든지 이룰 수 있다. 다만 이 접시는 단 하나의 소원만을 이루어 줄 수 있으며, 소원을 이루고 나서는 깨져버린다.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접시가 이루어 줄 수 있는 소원은 한정적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소원은 여럿이다. 

  즉 접시는 세상의 존재들에게 필요한 자원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이다. 각 인물들이 전형적이지 않은 가족을 이루고 있거나, 마땅한 양육자 없이 빈곤을 겪으며 비행 청소년으로 살고 있거나, 동성을 사랑하는 ‘소수자’ 위치로 설정된 것도 이 비유를 뒷받침한다. 현실에서처럼 '사라잔마이'에서도 역시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원, 접시는 한정되어 있다. 돈, 지위, 일자리 등과 마찬가지로 ‘사라잔마이’의 접시는 한쪽이 차지하면 다른 한쪽이 얻기 어려운 재화이다. 


  이쯤에서 현실로 돌아가보자. 예시로 채용의 경우, 한쪽이 합격하면 한쪽이 떨어져야 하는 정원제이므로 꾸준히 그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업자가 노동자의 특정 비율은 장애인으로 채용하여야 한다는 의무고용 법률이나[1]여성의 근로를 특별히 보호하고 여성이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는 조항도 존재한다[2]이러한 특정 집단의 채용 보장을 위한 법률의 존재 자체와차별적 고용 및 해고 사례는 사회의 모두가특히 소수자들은 어떠한 형태의 자원이든 그것을 위해 부단히 싸우고 있고 그러한 싸움은 힘겹고 어려움을 보여준다


  ‘사라잔마이’의 제작 전,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이 2011년에 제작한 애니메이션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도 '사라잔마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여기서도 접시와 같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물건 ‘핑드럼’이 등장한다. 접시를 얻으려 하는 ‘사라잔마이’와 마찬가지로 각 인물들은 핑드럼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주인공 중 둘이 핑드럼을 넘겨주고 죽게 되며, 살아남은 이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가 종결된다.

  하지만 비슷한 포맷을 띈 애니메이션임에도 ‘사라잔마이’에서는 주인공 셋이 모두 생존한다. 또한 마지막 화에서는 그들이 겪을 법한 미래들이 묘사되고, 실제로 쿠지가 소년원에서 출소한 뒤 엔타와 카즈키를 다시 만나 우정을 이어가는 장면도 등장한다. ‘돌아가는 펭귄드럼’뿐이 아니라도 희생을 통해 무언가를 쟁취하는 클리셰는 익숙하고 널리 다루어진다. 그런데도 왜 꼭 ‘사라잔마이’에서, 주인공 모두가 생존하고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었을까?



*


  먼저 ‘사라잔마이’의 인물들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제로섬 게임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그렇게 여기길 강요하는 세상에게 이들은 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저항하였다. 


  접시를 만드는 갓파와 대치하며 모든 연결을 끊을 것을 주장하는 세력인 물족제비가 카즈키의 동생 하루카를 잡아갔을 때, 카즈키는 하루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하루카를 대신해 목숨을 내놓고 물족제비의 방식대로 영영 잊히려고 한다.

'사라잔마이'의 한 장면, 갓파로 변한 상태의 엔타가 카즈키에게 "바보야, 자기희생 같은 촌스러운 짓 하지 마"라고 말한다.

  그러자 쿠지와 엔타는 카즈키를 저지하고, 카즈키와 하루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 후에 카즈키가 또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할 때에는 아예 엔타의 입에서 "바보야, 자기희생 같은 촌스러운 짓 하지 마"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마치 누군가가 희생하여야만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누군가의 희생을 막고자 노력한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도 서로를 도우려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중요한 핑드럼은 결코 나눌 수 없으며, 누군가가 포기해야만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가는 재화로 묘사된다. 결국 그들의 저항은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희생해 다른 사람에게 재화를 전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희생한 이들은 죽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희생한 셈이다. 앞서 설명한 ‘자발적’ 희생이라는 저항이 바로 ‘돌아가는 펭귄드럼’이 현실의 세상을 비트는 지점이기는 하나, 여전히 희생한 이들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소수자가 미래를 구성해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로도 볼 수 있다.


  이 희생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 함의는 ‘사라잔마이’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뜻과는 다르다. 희생을 최대한 모면하려고 노력하는 ‘사라잔마이’에서도 접시는 나눌 수 없는 재화로 묘사되고, 누군가가 가져가면 다른 누군가는 소원을 이룰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에 접시를 놓고 겨루는 것은 자신 대신 총을 맞아 곧 죽게 되는 엔타를 살리려는 카즈키와, 뒷세계의 적들과 싸우다 역시 총을 맞아 이미 죽게 된 형 치카이를 살리려는 쿠지 둘이다. 접시를 들고 있었던 것은 카즈키이고, 쿠지가 카즈키를 총으로 협박하지만 엔타의 상태가 한시가 촉박했기에 카즈키는 엔타를 살린다. 현실적인 자원의 부족이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종결된다면 이것은 그저 비극이다. 하지만 그들은 희생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해도 희생이 반복되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접시 나누기, 파이 나누기의 논리에 도전하는 것이다. 제로섬 게임의 논리대로였다면 자원을 얻지 못한 쿠지에게 다른 일종의 ‘구제책’은 없다. 앞으로도 카즈키와 쿠지, 엔타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며 절망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카즈키, 엔타, 쿠지는 모두 살아남았고, ‘사라잔마이’의 주인공들은 제로섬 게임의 논리가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하게 두지 않았다. ‘사라잔마이’의 마지막 화에서는 주인공들의 미래가 그려지는데, 그들은 작품 내내 접시로 비유된 특정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짓밟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셋은 끝까지 서로의 연결을 지키려 노력했다. 서로를 겨냥하며 높이 올라가려고 하기보다는, 갈등하면서도 함께 모두가 품은 꿈이었던 축구선수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이미 정해진 자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길 강요하는 제로섬 게임처럼 보이는 세상을 뼈저리게 경험했음에도, 자신들의 미래를 통해 세상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다른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저항하였다. 현실에 부딪히더라도 모두가 함께하는 미래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현실에서도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는 희생당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누군가를 제로섬 게임의 시선으로 희생시키지 않으며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대학 페미니스트 연합 모임 '유니브페미'는 여성의 인권이 높아지면 남성의 인권은 ‘낮아진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흔한 오해를 부정하고 우리의 페미니즘은 누군가를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3]. ‘유니브페미의 말처럼 특히나 인권은 누군가가 보장받는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의 인권이 낮아져야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다만 경쟁 사회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이 학습된 위기감을 안겨주는 것이다마찬가지로 한국다양성연구소의 김지학 소장은 제로섬 게임을 강요하고 있는 지금의 사회가 점차 포지티브섬 게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4]모두가 포지티브섬 게임을 바라보게 만드는 일은 당연하게도 세상이 언제까지나 제로섬 게임처럼 굴러가야 한다는 인식에 저항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인권을 ‘갈라먹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불가피하게 제로섬 게임의 원리와 닮은 모양으로로 굴러가는 세상의 일면들도 바꾸어나갈 방법을 물색하는 출발선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사라잔마이’의 인물들이 생존하고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었던 다른 이유로는, 주인공 세 명이 서로를 '타인'으로 두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욕망과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전해 들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라잔마이’에서 접시를 얻기 위해서는 ‘갓파 좀비’라는 일종의 몬스터를 처리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반강제적으로 서로의 기억이 공유된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가 품고 있는 욕망을 나누게 되거나, 가끔 설명해야만 했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사랑해서 네가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것을 질투해, 나는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마지막 남은 혈연의 유대를 지키고 싶어, 등등. 

  처음에는 그들도 당황하고, 서로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불편해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서로의 이야기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단절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었다. 공유된 기억을 해명하고 설명하는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들었기에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각자의 소망을 타인에게 공유하거나, 설명하는 일이 훨씬 적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잘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미래를 잃었다.


  실제 세상에서도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소수자의 목소리는 묻히기 쉽다.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 등 수많은 이유로 단식 투쟁을 하고, 시위를 하는데도 잘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사라잔마이’의 인물들은 공유된 욕망과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 위에 서로를 이어주는 유대감을 쌓아 올렸다. 덕분에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축구를 하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 카즈키가 엔타를 살렸을 때에도, 쿠지가 자신의 형을 살리고 싶어 했을 때에도, 서로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엔타를 살린 직후 쿠지를 걱정하는 카즈키에게 쿠지는 “알고 있어, 내가 너였어도 진나이(엔타의 성씨)를 살렸어.”라고 말한다. 자원이 한쪽에게만 주어졌지만 그들이 결코 남은 아니었다. 불가피한 경쟁을 벌였을 때에도 서로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에도 이어지고, 서로를 돕고, 서로의 말을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도 목소리를 전하고 들으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바로 앞의 글 “전쟁에 대한 전쟁 : 베트남 전쟁과 마주하기”에서 언급된 한베평화재단 주최의 좌담회가 그 예시이다. 좌담회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서 생존한 피해자 응우옌티안 씨와 목격자 응우옌득쩌이 씨는 문우편집위원들을 비롯한 한국 사람들과 만나 자신이 겪은 학살과 피해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어떠한 마음인지,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지 말하면, 그 모든 말을 듣고, 연대하는 자리였다[5]또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한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처럼성폭력의 생존자들과 연대자들이 모여 말하고 듣는 자리들도 있다[6]이렇게 말하기와 듣기의 경험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욕망과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적절한 조치를 모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도 쌓이게 된다우리가 더욱 연결되고 연결에 능숙해질수록 미래는 다채롭고 새로워진다.



*


  반면 '사라잔마이'에는 앞서 말한 제로섬 게임의 부정이나, 서로의 단절을 넘어 욕망과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해 듣는 행위를 전혀 실천하지 않는, 오히려 이에 명백히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는 인물도 등장한다.


  쿠지의 형 치카이는 뒷세계의 돈을 벌러 다니며 쿠지에게 여러 범법적인 일을 시키는 장본인이다. 쿠지는 치카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며 그를 돕지만, 치카이는 계속해서 쿠지와 제대로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지내는 곳으로 그를 데려가지도 않는다. 치카이는 죽기 얼마 전, 뒤탈을 없애기 위해 치카이가 뒤집어쓴 살인의 진상을 알고 있는 나이가 어리고 순한 심복 하나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모습을 본 쿠지가 왜 그 녀석을 쏘았냐고 하자, 그는 그 아이는 이 세계에서 못 살아남기에 죽였다고 항변한다. 총격전을 벌인 후 쿠지는 "잘 안 풀릴 땐 다 버린다"라고 말하는 치카이에게 질문한다. "동생인 나도 버릴 거야?". 치카이는 쿠지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며 말한다. 이 세상은 나쁜 놈이 살아남는다고. 총격전을 벌인 뒤 도망쳤던 뒷세계의 잔당이 먼저 치카이를 쏘아 쿠지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자 강력한 유대의 대상이었던 형에게 ‘착한 놈은 살아남지 못한다’며 총구가 겨누어진 쿠지는 마음속 어딘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 후 접시로 엔타가 살아나고, 쿠지는 여러모로 좌절하여 세상과 단절되려고 한다. 이때까지 충분히 소통하지도 못했던 형에게 '타인' 취급을 받음으로써, 밟고 올라갈 상대라는 시선을 받음으로써, 연결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쿠지는 타인과의 이어짐을 거부하고, 남은 유대의 대상인 엔타와 카즈키를 만났던 과거의 자신들을 지워나가며 처음 만남까지 지워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한다. ‘사라잔마이’의 세계에서는 갓파와 대립하며 연결을 지향하지 않는, 마치 악의 세력 같은 물족제비 족이 등장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누군가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으면 ‘이 세계에 존재한 적 없는 사람’처럼 되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이 없었던 일이 된다. 즉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쿠지는 이러한 연결의 특성을 인지하고 자신과 세계의 모든 접점, 즉 유일한 유대였던 카즈키와 엔타와의 기억을 지워 영원히 사라지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연결이 쿠지를 미래로 나아가게 했다. 영영 사라지려는 쿠지를 쫓아온 카즈키와 엔타는, 물리적으로도 고리 즉 연결의 모양새이고, 맥락 상으로도 카즈키와 쿠지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간직해 연결의 시작점을 의미하게 된 물건인 발찌를 전하며 단절을 막는다. 이미 끊어진 발찌이지만 카즈키와 엔타는 이를 다시 묶어서 쿠지에게 건넨다. 잠깐 세상에서 지워지는 과정을 겪으며, 쿠지는 자신의 진짜 마음은 ‘이어지고 싶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카즈키와 엔타, 쿠지 셋 모두가 이어지기를 강력히 소망함으로써 쿠지의 존재는 지워지지 않았다. 


  따지자면 ‘사라잔마이’의 인물들도 치카이와 엔타 둘 모두를 살려내진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죽게 된 치카이가 연결을 적극적으로 거부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 곱씹어 볼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모님이 모두 죽은 뒤 뒷세계에서 살아가며 타인을 믿지도,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나누지도 않고, 제로섬 게임에 순응하며 나쁜 놈이 살아남는다고 습관처럼 말하던 그는 마지막에는 형제의 유대까지 저버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살아남은 셋은 미래에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뻗기를 택했다. 그들은 연결이 서로를 살게 하리라 믿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세상의 모두가 단절되길 바라는 악당 물족제비는 자신을 ‘허상의 개념’이라고 소개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면, 누구도 이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단절’이라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단절된 상대가 있어야지 설립 가능한 말이다. 

  ‘사라잔마이’에서 말하듯,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타자와의 연결이다.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말할 수 없다면 그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온전히 존재하고, 생존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것은 서로의 욕망과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서로의 욕망과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은 포지티브섬 게임에 대한 기대에서부터 출발한다. 



*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계속해서 ‘생존 전략’을 외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사라잔마이’라는 말은 해석하면 그 자체가 ‘접시 세 개”라는 뜻이 된다. 주인공들이 쟁취하려는 생존 전략이자 자원인 접시 세 개. ‘사라잔마이’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서로가 단절되어 태어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짓눌러 자원을 쟁취하며 생존하는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방법은 아닐 것이다. ‘사라잔마이’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지에 대한 희미하지만 확실한 몇 가지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강요된 희생에 저항하기, 제로섬 게임을 부정하기, 목소리를 듣고 이어지기.

  이 글에서 살펴본 내용이 절대적인 정답이 아닐 것이고, 각자의 맥락이 수없이 다양한 만큼 수없이 다양한 접근과 방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제로섬 게임 논리를 타파하고, 타인 사이 단절의 한계를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의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고민이 우리의 역사 내내, 현재에도 들러붙어 있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타자를 밟고 올라가야 할 경쟁의 상대, 제로섬 게임 속의 대전 상대로만 여기지 않고 누구도 희생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보자. 꿈의 실현은 꿈으로부터 시작하니까. 타자와 욕망을 나누고 이야기를 교환하며 연결되고, 유대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이라는 한계를 넘어, 잔인한 세계관을 넘어 이어지고 싶으니까.


 


[1] “장애인 고용의무”, 찾기쉬운생활법령정보https://easylaw.go.kr/CSP/CnpClsMain.laf?popMenu=ov&csmSeq=1005&ccfNo=3&cciNo=1&cnpClsNo=1.

[2] “여성의 고용차별 금지”, 찾기쉬운생활법령정보https://easylaw.go.kr/CSP/CnpClsMainBtr.laf?popMenu=ov&csmSeq=1379&ccfNo=1&cciNo=1&cnpClsNo=1

[3] 신혜정, ““여학생ㆍ남학생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에요””, 한국일보, 2019.9.3,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909021238025619.

[4] 김지학, “[다양성 끌어안기인권의 정신자유평등박애와 라이시테(2)”, 투데이신문, 2020.11.10,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648.

[5] 김남기, “베트남 피해자한국 떠나기 전 남긴 말 한국군에 가족 잃었다””, 오마이뉴스, 2022.8.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57045.

[6] 김푸름, ““아픈 걸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아요”… 성폭력 상처 드러낸 생존자들의 말하기’”, 여성신문, 2017.11.28, https://www.sisters.or.kr/activity/ability/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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