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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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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전쟁에 대한 전쟁 : 베트남 전쟁과 마주하기

편집위원 아자, 야부, 루

"한강의 기적과 감춰진 진실"[1]


  1953년의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이 약 67달러(약 93,420원)였으나 현재(2021년 기준)에는 35,168달러(48,760,080원)로, 약 525배 증가하였다. 한국전쟁이 휴전을 맺은 당시, 대한민국은 심각한 가난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여러 차례에 걸쳐 추진하였고,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한국은 독일 ‘라인강의 기적’에서 모티브를 얻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가히 빛나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80년대에는 ‘3저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을 맞으며 한국은 한 번 더 경제 도약을 이루어냈다. 현재 어엿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은 ‘압축성장’ 국가로 정의내릴 수 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한국에게는 이를 원활하게 추진할 자본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 수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정희 정권은 명목상으로는 한·일 국교 정상화이지만 실제로는 굴욕적인 결과를 낳은 한·일 수교를 맺어 일본에게 무상원조와 차관을 도입받았다. 둘째,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낸 독일은 더 이상 국내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워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한국은 마침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로 인력을 수출하길 원했기에 독일과 한국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았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에게 외화 획득이라는 임무를 떠넘기며 독일로 사람들을 파견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은 박정희 정권은 마지막으로 해외로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그리하여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는 한국의 정치, 안보, 경제 등에 있어 아주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외화 벌이 수단 중 마지막으로 소개한 해외 파병을 주로 다룰 것이다. 특히 베트남전의 경우, 당시 국내 언론이 보도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얻을 이익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여당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8년 반에 걸쳐 약 32만 명의 군인이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었다. 투입된 병사의 수가 많은 만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대가를 받았다. 한국에게 베트남 파병은 호재와도 같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베트남 파병을 토대로 이뤄낸 기적적인 경제성장은 종종 현대인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반대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폭력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과오를 비판하는 기사에는 언제나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 개발은 잘 했다’라는 류의 댓글이 달린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해외 파병을 결정하고 추진하여 경제 개발의 토대를 다지는 데 기여한 바는 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었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전쟁 참전으로 얻은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은 생명의 가치가 자본보다 경시되는 풍조에 일조할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 하에 일어났던 많은 문제들에 대한 첨예한 비판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국가가 끼친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교과서의 서술 비중으로 미루어 볼 때, 민주주의 파트와 경제 성장 파트에 고루 등장하는 박정희는, 잘못과 ‘업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논쟁적’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박정희의 업적이라 여겨지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다룰 때, 희생된 생명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치⋅경제적 이윤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국의 교과서와 교육 방식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어긋난 기억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용산 전쟁기념관의 베트남 전쟁 설명문은 박정희 시절의 낡은 구호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이는 ‘자주국방’, ‘국위선양’, ‘평화수호’라는 국가주의적 표현이 얼마나 공허한지 새삼 보여줄 뿐이다. 이와 같은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박정희 정권의 입장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격언을 진리로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격언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평화에 도달하는 방법이 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사회가 공유하던 전쟁과 폭력에 대한 상식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평화에 대한 논의가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이 격언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 대부분이 베트남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평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발달하였지만 우리가 두루 공유하는 베트남 전쟁의 기억 내지 감각은 변화하지 않고 구식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우리가 기억의 특성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흔히 개인이 가진 기억은 오로지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물처럼 여겨진다. 개인의 기억은 외부에 방해받지 않으며 또 그렇기에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소유한 기억은 때론 그렇게 지녀 온 믿음을 전면으로 깨뜨리면서 우리를 배반하기도 한다. 모두가 인지하다시피 기억은 태초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데, 이는 단순히 일부분이 지워지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감쪽같이 새로 형성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개인의 기억은 외부, 즉 그가 속한 집단 혹은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재구성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국인이 기억하고 감각하는 베트남 전쟁의 ‘영광’이 정말로 모든 이들에게도 ‘영광’인지 낱낱이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베트남 파병 이후에도 여러 차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경제성장의 기회로 삼아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파병 군인들이 입었던, 그리고 타인에게 입혔던 상처는 덮어둔 채 베트남 전쟁을 통해 얻은 ‘성과’만을 내세우며,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시야를 차단한 것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의 베트남 전쟁 설명문처럼 말이다.     


  베트남 파병의 목적은 크게 대외 관계, 안보, 그리고 경제 등의 측면으로 나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한국 정부가 원하는 보상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미로 그들에게 ‘알라딘의 램프’라는 멸칭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베트남 파병은 위험 부담이 큰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미국과의 협상력 강화, 군사원조 증가, 군사력 강화, 경제성장 등 더욱 많은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 중 소위 베트남 전쟁의 특수로 불리는 경제적인 면이 가장 조명 받는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 수익은 기존에 추진되던 산업화 전략 및 여러 상황적 요건과 만나 한국의 근대화를 가속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그 국가적 이익을 따져보기 전에,  전쟁이라는 비극을 이익과 손실로만 계산하는 태도가 옳은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제공한 모든 ‘이익’은 무수한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동원된 군인들부터, 이제는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으로만 남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까지 말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다른 무엇도 아닌 전쟁을 성장의 주된 동력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각종 전쟁 속 가해자였던 한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경제적 가치로 교환하고 때로는 이를 무기 삼아 흥정까지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은 그 과거를 뒤에 감춘 채 피로 얼룩진 상승 곡선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베트남 전쟁이 한국인에게 ‘국가적인 무한한 긍지와 보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이미 전쟁 특수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한국전쟁 특수에 비판의 목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 민족의 아픔을 경제 부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라는 사실에 쉽게 분노의 감정을공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일본의 비인간성에 분개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의 비인간성은 전혀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본의 한국전쟁 특수가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과 미국이 파병을 둘러싸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파병은 우리가 하지만, 돈은 일본이 챙긴다’는 식의 소문을 냈다. 일본에 뒤처질 수 없다는 여론을 형성해 국제적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참이 지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파병 논의가 이루어지던 때에도 다시금 일본의 한국전쟁 특수가 주목받았다.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야비하게’ 무엇을 ‘가로챌’ 것인지를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졌고, 많은 기사가 전쟁 특수 면에서 결코 일본에 질 수 없다는 논조를 보였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았던 깊은 상처의 기억들은 또 다른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이 그러한 국가적 차원의 폭력 구도를 그대로 답습할지라도 강국으로 올라서야만 한다는 당위를 촉구할 뿐이었다.          



전쟁 다시 쓰기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일그러진 기억들은 해외 파병을 포함하여 전쟁 전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시대를 역행하도록 만든다. 적극적으로 기억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전쟁 앞에서 평화와 연대를 모색하기보다는 그저 이득을 셈하기에만 급급할 것이다. 참혹한 전쟁 상황을 앞에 두고도 계산기만을 두드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있겠는가? 전쟁은 그 자체로 희생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가 전쟁으로 인해 얻을 이익에만 주목하거나 사람들의 죽음이 국가 발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여기는 관점은 결국 전쟁을 정당화할 뿐이다. 그리하여 전쟁 상태를 영속시키고 사람들이 군사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국가는 기본적으로 평화롭고 전쟁이 예외상황 같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전쟁이 일상이고 평화가 예외상황이다. 전쟁보다 평화를 유지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한 국가의 입장에 서서 주어진 이익을 따지기보다 전쟁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폭력성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전체를 파악하고 규명하는 일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다. 그럼에도 비인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희생’에 초점을 맞춰 전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어떤 자세로 마주하여야 할까. 전쟁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은 주어지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 비인간성을 답습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상을 이분법적 구조로 바라보는 것은 워낙 흔하고 쉬운 일이고, 특히 전쟁에 있어서는 그러한 시각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군-적군, 이익-손실, 선진-후진, 우월-열등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전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함을 기억하고 이에 저항하며, 이익과 국제관계를 이유로 얽히고설킨 전쟁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 베트남전쟁은 단순히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이 전쟁에는 국가 발전을 위한 자본을 얻으려는 비열한 욕망이 녹아 있다. 우리는 국가가 기존 교과서를 통해 장려하는 해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를 배우고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기억하고 연대하고 상상하기     


① 전쟁에 얽힌 사람들을 기억하기

  우리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이익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나 자신이 죽는다는 딜레마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폭력성을 분출한다. 전쟁은 존재 자체가 반(反)윤리적이다. 승자와 패자를 떠나, 결국 전쟁은 존재 자체로 엄청난 희생을 야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였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고 연대하고 상상하는 일’이다. 그 중 ‘기억하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을 세세하게 살펴보고 기억해야 한다. 자본을 향한 욕망으로 점철된 베트남 전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얽혀 있으나 국가나 이념이라는 큰 틀에 가려져 정작 그 안의 사람들은 쉽게 잊히곤 한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큰 주체 뒤에는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호소하는 수많은 군인들이 존재한다. 전쟁 트라우마는 물론,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앓는 이들도 상당하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에는 선천성 구개파열, 다지증, 탈장 등이 있으며, 참전군인뿐만 아니라 참전군인의 자녀들에게도 정신적·신체적 장애를 안겨다준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고엽제로 인해 피해를 받았거나 그 피해를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고엽제로 인한 피해와 후유증은 아직도 국가로부터 충분히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베트남 전쟁은 한국인에게 있어 아픈 기억이기도 하며, 한국은 분명한 피해자성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베트남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해 후유증과 함께 살아가는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 혹은 참전군인의 유족들이 그 근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역시 미국의 편에 서서, 가해를 저질렀다는 점을 인지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 관하여 끊임없이 증언이 나오고 있다. 민간인을 학살하고, 성추행을 하거나 특정 신체부위를 칼로 도려내는 등,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비윤리적인 행위를 수도 없이 저지르고 돌아왔다.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은 너무나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사례만을 몇 가지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베트남 꽝남성에 위치한 고노이섬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군은 한 가정집 마당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35명을 쏘아 죽였으며, 나머지는 인근 비밀 방공호 안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져버렸다. 비슷한 시기 퐁니・퐁넛 마을에서도 한국군이 주민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총을 난사한 일이 있었다. 이날 퐁니・퐁넛 마을에서만 74명의 민간인이 죽음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인근 퐁룩 마을에서도 10여 명이 사살되었으므로 퐁니・퐁넛・퐁룩 마을 학살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10일 뒤에 일어난 하미 학살은 특히 잔인한데, 대량 총살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군들은 하미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날 146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하미 학살이 참혹한 이유는 단지 불을 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학살 당일 생존자들이 일종의 장례식으로서 시신을 얕게 묻어주었는데, 이것이 한국군의 심리를 거스른다며 다음날 불도저를 끌고 엉성한 무덤들을 짓밟고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마저 밀어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세 가지 사건들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과 범죄의 아주 작은 일부이다. 다만 그나마 ‘알려진’ 사건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국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떠한 이유로도 전쟁이 가진 폭력성과 전쟁에 참여한 인간이 보이는 비인간성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이 많은 희생을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이익에 눈이 멀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한국군이 불필요한 학살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에서 우리가 보였던 비인간성을 감추지 말고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 비인간적인 사건을 감추려고 했던 지저분한 과거 또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2021년 2월 7일, 한국 사법부가 처음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처럼 말이다. 전쟁에서 드러난 인간의 비인간성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모두 가진 ‘우리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다양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2015년 4월 초,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도착한 첫날, 이들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으로 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들이 당하고 목격한 학살의 경험을 이야기하자 할머니들은 전쟁 피해자의 괴로움과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며 공감했다. 또한 같은 피해자로 만나서 반갑다며 기꺼이 아픔을 나누었다[2]. 때는 베트남 전쟁 종전 40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편, 이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흔적과 현지 주민의 삶을 기록해온 이재갑 사진작가가 사진전을 열어 이들을 초대하면서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사진전 개막식은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는데, 앞서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동시에 가진, 양면적인 단체로 언급된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를 비롯하여 300여명의 참전군인들이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글라스와 군복을 입은 채로 군가를 틀고 고함을 질렀다. 뿐만 아니라 고엽제 전우회들은 탄 씨와 런 씨가 한국에 머문 일주일 내내 모든 일정을 따라다니며 고함을 치고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한국에 방문했던 응우옌티탄 씨와 응우옌떤런 씨는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며 울먹였다. 그러던 중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재갑 사진작가는 한국인들 중에도 이렇게 양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의 구수정 본부장은 탄 씨가 이제 한국인들이 무섭지 않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렇듯 연대의 장은 피해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확신을 줄 수 있다. 지난 2022년 8월 11일에 문우편집위원들은 한베평화재단에서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를 통해 우리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씨와 목격자 응우옌득쩌이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탄 씨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고, 며칠 전(2023.02.07) 재판부가 1심 선고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이 인정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보통은 학살의 흔적조차 없애버리므로 피해 사실을 입증해내기가 어려운데, 탄 씨가 속한 퐁니·퐁넛 마을의 학살 사건은 유독 증거가 많아 그 간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탄 씨의 승소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배상 소송 자체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편집위원들은 진실 규명의 가능성과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데에 큰 의미를 두었고 무엇보다 탄 씨를 직접 만나뵐 수 있어 뜻깊었다. 실제로 탄 씨는 자신들의 “여정이 끝까지 갈 수 있게끔 많은 응원을 보내주시길 바”[3]란다고 부탁했다. 득쩌이 씨 역시 “베트남으로 돌아가기 전에 (⋯) 피해자들과 유족들을 만나서 고통을 위로해줬으면 좋겠”[4]다고 말했다. 좌담회에는 문우편집위원들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인원이 있었고, 기자들도 몇몇 있었다. 그들 모두가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연대하고 있었다. 응우옌티탄 씨와 응우옌득쩌이 씨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안에서도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 좌담회의 의미는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의 장이 앞으로도 계속 마련되길 희망한다.     


  공감과 연대를 저지하고 위협하는 집단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1980년 5.18 당시 광주에서 군인이 시민을 학살하는 비극을 예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지적”[5]이 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국가폭력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지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또 다른 국가폭력의 비극을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편에 선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연대의 장을 자주 마련하여야 한다. 전쟁의 진실은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제대로 대면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던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 피해자들의 삶에 스민 전쟁의 평범성을 마주해야 한다. 또한 군인, 민간인, 난민들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목격한 바, 경험한 바, 느낀 바에 대해 듣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의미를 담아 작성되었다.    


③ 평화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평화상태’일까? 평화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현재를 평화롭다거나 혹은 평화롭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이 평화로운 정도는 ‘평화/비(非)평화’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처럼 나타난다. 또한 단순히 개인이 내린 평화의 정의뿐만 아니라, 개인이 속한 국가, 개인이 가진 사회적 지위, 정보, 감각 등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평화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였든 간에, 우리가 지난 과거를 바로잡고 전쟁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평화를 상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현재 지향하는 평화가 이상향이자 최선이라는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과거에 인간의 권리라고 여겨졌던 가치가 현대에 와서 ‘그 가치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고 칭하기에 부적절하거나 혹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지듯이, 평화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 자신이 추구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닐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더 발전된 평화와 안락한 삶을 위해서 더 발전된 평화를 상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한반도는 몇 십년간 분단체제를 유지해왔고 한국인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와 사회에게서 북한이라는 타자의 침입 가능성과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지속적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적의 존재가 일상에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적의 언설은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정서구조를 만든다.”[6] 이는 ‘우리’가 아닌 존재를 색출해내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따라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방인’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두루 공유하고 있다. 한국인은 ‘우리-그들’과 같은 이분법적 논리에 익숙하다. 흔히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혹은 단체를 ‘빨갱이’라며 매도하는 논리는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로, 군사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분단국가 하에서 여러 영향을 받아왔기에, 우리의 ‘평화’에 대한 관념 역시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무엇일지 상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머나먼 미래의 것일지라도, 우리는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에 대한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는 3세대 인권 중 하나인 ‘평화권’[7]을 향한 노력이기도 할 것이다. 평화를 상상한다는 것이 자칫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담론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을 멈추지 않는 일은 평화의 발전을 촉구하는 데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엇보다 구체적인 활동이 될 수도 있다. 평화를 향한 상상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보다 나은 미래를 구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박태균 저자가 저술한 『베트남 전쟁-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의 5부 제목을 인용하였다.

[2] 박기용.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와 보낸 일주일…“저희는 심장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2015.04.10.,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392.html.

[3] 문우편집위원회가 202년 08월 11일 참여한 한베평화재단 주최 좌담회 당시, 응우옌티탄의 말.

[4] 같은 날, 응우옌득쩌이의 말.

[5] 김덕련.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첫 방한.” 프레시안, 2015.03.30.,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5114.

[6] 김엘리. 「분단된 마음, 군사주의와 페미니즘」. 『분단극복을 위한 집단지성의 힘』(한국문화사), 2018, https://momotepi.org/blogPost/untitled-73.

[7] "추상적 가치인 평화가 침해될 수 없는 권리로서 보장됨을 의미한다. (...) 아직 확립된 권리가 아니며 권리로서의 효력 역시 불명확"하다. 임재성. 「평화권,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인권」. 『경제와사회』, 통권, 91호, 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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