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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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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 혹은 우리와 너 사이에

편집위원 포슬



그리고 그 순간 저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엄마가 내 이야기의 영웅이 되어버린 거지?”
-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0.     

  일상을 침범하는 순간들이 있다. 하루분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새벽 침대 위. 누군가와의 대화 중 붕 떠버린 짧은 몇 초. 매일같이 찾아오는 이러한 순간들이 관성적으로 돌아가는 삶을 절단할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자기-서사의 확립을 지연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나의 이해는 수많은 사건의 연속에 정초한다. 그러나 사건과 사건 사이, 서사의 진공이 발생하는 순간, 나의 시선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탐색하는 가교에서 ‘나’의 이야기는 일시적인 혼란에 빠진다. 타인은 이 빈 시간을 비집고 들어온다. 대화 중 일시적으로, 혹은 일과를 복기하던 중 뒤늦게 섬광처럼 나타나는 타인과 나 간의 해소 불가능한 차이는 일상을 경험하는 나를 (정치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확립하는 방식으로 세워진 서사를 헤집는다. 내가 부유하는 순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을 설명할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을 생각한다. 나의 경험, 나의 고통이 지닌 의미는 사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외려 이를 온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적으로, 정치적으로 (이 두 개의 범주는 반드시 같지만은 않다) 정위해야 함을 말하는 페미니즘의 구호이다. 글을 쓰기 전, 지난 몇 년간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글들이 과거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해석하여 고백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글들은 고통의 근원을 ‘자신’ — 정체성 정치의 맥락에서는, 기실 자아과 동치되는 정체성 — 에 부착된 정치·사회·경제적 의미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구조에 의한 피해자-됨을 자각한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됨의 역사를 발화할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나’를 정치적 존재로 구성하는 이야기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곤경은 이야기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출현한다. 나는 청중을 염두에 두고 발화한다. 청중은 나의 이야기를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다. 따라서 나는 청중을 검증한다. 이에, 청중은 다시금 나의 말의 진위를 검토한다. 이 맥락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화한다는 것은 발화자와 듣는 자 간의 끊임없는 ‘파워게임’이다(비록 어떤 조건하에서는 한쪽의 힘이 월등히 강할지라도). 이 때문에 오카 마리는 다음과 같이 증언의 성질이 말해진 것을 초과한다고 지적한다.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직 비유로서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증언’이란 이러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 ‘증언’을 듣는 것은 단지 말로 증언된 것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장소를 채우는 이러한 무질서하고 단편적이며 떠도는 생각 모두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라는 것.[1]


  이렇듯 나의 이야기가 타인이라는 조건 속에서 기원한다는 점에서, 나는 말하는 자(자기-서사를 확립하는 존재)인 동시에 듣는 자(타인의 자기-서사를 감각하는 존재)가 혼재하는 존재이다. 이 혼재성은 타인과의 마주침의 시공간에서는 어쩌면 해소 불가능한 긴장이다. 솔직하게 나를 설명하려는 너 앞에서, 너의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 맞닿아 있음을 감각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내가 너의 고통에 어떤 방식으로든 가담하고 있다는 감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너의 고통이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크기와 농도일 때, 그 무력감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2] 이러한 고민은 곧, 고통의 말하기를 수행하는 당사자 앞에 선 비당사자의 고민과 연결된다. 

  이 글은 비당사자로서 윤리적인 고통의 말하기와 듣기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김민조는 그의 글에서 무대, 무엇보다 단 한 명의 발화를 다수의 청중이 경청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당사자 발화와 청자의 관계를 대변하는, 적확하지만은 않더라도 유용한 은유로 이해한다. 동시에, 그는 기존의 문법을 파훼하는 당사자 발화로서 해나 개즈비(Hannah Gadsby)의 「나의 이야기(Nannette)」를 조명한다[3]. 동일한 작품을 관객의 입장에서 분석하려는 이 글은 그의 비평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자 첨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글은 「나의 이야기」를 처음 감상했던 후의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시도이다. ‘공약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 내가 취해야 할, 혹은 취했어야 할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이 시도는 사적이고 공적인 장 모두에서 이루어졌던 잘못에 대한 후회이기도 할 것이다.          



1. 

  스탠드업 코미디의 원류는 20세기 초, 보드빌(vaudeville)[4] 진행자가 관객을 상대로 진행하던 즉흥 만담에서 찾을 수 있으나, 전형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의 형태는 밥 호프(Bob Hope)와 ‘보르시 벨트(Borscht Belt)[5]’ 희극인들에 의해 확립되었다 할 수 있다. 일상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어조로 1950년대 미국의 보수적인 시대상을 비판하는 코미디를 주로 삼은 이들을 통해 “영민하면서도 개인적이며 사회참여적인”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한편, 1960년대, 스트립 클럽 혹은 나이트 클럽 위주로 종교와 섹스, 마약 등의 소재를 다루다 일련의 법정 소송으로 몰락을 맞은 —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 레니 브루스(Lenny Bruce)와 그의 추종자들을 필두로, 반문화적 스탠드업 코미디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등, 일상에서는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적 이슈를 주 소재로 삼아 7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이들은 TV 출연 등을 통해 스탠드업 코미디를 음지의 문화에서 대중적으로 즐길만한 장르로 확장시켜 나갔다[6].

  비록 그 황금기는 지났지만, 스탠드업 코미디는 (영미권에서) 여전히 폭넓은 마니아층을 향유하고 있는 매력적인 장르이다[7]. 주로 바 혹은 소극장에서 상연되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일반적인 형태는 발화자와 관중이 은밀히 공유하고 있는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특히 2010년대를 전후한 미국의 정치 지형에서, 장르의 주류를 차지하던 레토릭인 ‘화난 남자’ 코미디[8]는 반지성주의적 트럼프 정부와 새로이 등장하는 소수자 집단을 동시에 겨냥하기 시작했다. 한편, 넷플릭스가 적극적으로 몇몇 ‘소수자’ 코미디언의 공연을 기록 및 방영하고 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시점에서, 김민조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대낮의 공간에서는 해소되지 못하는 욕망의 발산지를 넘어 당사자 발언 — 그러나, 당사자가 흔히 기대받는 사회적 각본 너머의 맹점을 가격하는 것으로서 — 의 현장으로서의 성격 또한 띠고 있다는 것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준비 단계인 전제premise 파트에서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언급하며 의도적으로 좌중의 긴장을 유발합니다. 그 주제에 대해 당사자가 가질 법한 반응들을 관객이 예측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펀치 라인punch line[9] 파트에 이르러 코미디언은 관객의 예측을 뒤집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혐오의 언어를 과장해서 흉내내거나, 차별의 논리에 동조하면서 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식으로요.[10]



2.      

  해나 개즈비의 「나의 이야기」는 소수자 발화의 급류 속에 그것을 비집고 선 작품이다. 1997년까지도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해졌던 호주 태즈마니아 출신의 — 이러한 명명이 타당한지에 관한 논의는 일단 괄호 속에 넣더라도 — 레즈비언 코미디언인 개즈비는 2017년, 해당 작품을 통해 돌연 코미디를 중단할 것을 선언한다. 제아무리 소수자들이 무대 위에 홀로 서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들, 코미디라는 장르의 문법이 고통의 온전한 해소를 가로막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개즈비는 두 개의 삽화를 든다. 첫째는 그와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개즈비는 그가 커밍아웃할 당시 어머니의 반응을 흉내낸다. “세상에, 해나, 왜 나한테 그걸 말한거니? 내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잖니. 내 말은, 내가 너한테 실은 내가 살인자라고 고백했다면, 너는 어떻겠니?”[11] 이 반응은 개즈비의 첫 코미디 쇼였던 「뉴 게이 코믹 101: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New Gay Comic 101: My Coming Out Story)」에서 매우 효과적인 ‘펀치 라인’이었다. 그러나 이 삽화는 그 ‘펀치 라인’ 너머를 바라본다. 커밍아웃으로 인해 모녀관계가 끊어졌으리라는 통속적인 기대와는 달리, 개즈비는 그의 어머니와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와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미디는 개즈비에게 있어 전략이었다. 그가 받아온 고통을 경감하는 전략 (물론 그와 어머니 사이에는 그와는 별개로 끊임없는 긴장과 대화의 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어머니가 개즈비에게 한 말은 그의 내면에 그가 이제껏 기대 온 코미디에 대한 회의를 심는다.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너를 이성애자인 양 키워온 것이란다. 다른 방도를 몰랐어. 정말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나는 너보다도 한참 전에 네 삶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았다. 그걸 알고도, 아닌 척 했다. 이제는 그랬던 것이 너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안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야 했던 것은 내가 너로 하여금 바뀌길 원했기 때문일 거야.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거든.[12]


  개즈비가 어머니와 맺던, 코미디라는 대화의 문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농담’의 틀을 벗어난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두 사람을 이어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말의 분노 섞인 의문을 야기했다. 어째서 나 자신조차 황급히 봉합해야만 했던 고통의 시간을, 어머니는 자신의 서사 속에 안착시킬 수 있었던 것인가? 왜 내가 주인공임이 당연한 이야기 속 영웅은 어머니라는 타인인가? 어머니는 어떻게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쉬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수많은 물음 속에서 개즈비가 내린 답은 다음과 같다. 코미디가 그를 “영원한 청소년기”[13]에 붙박아 두었기 때문에.

  두 번째 삽화 또한 「뉴 게이 코믹 101: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의 한 농담에서 시작한다. 개즈비와 대화하던 여성의 남자친구가 그를 (애인을 꼬시려는) 남성으로 ‘착각’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멸칭을 거론하며 욕하고 위협을 가하다, 여성임을 ‘깨닫고’ 한 발 물러섰다는 에피소드. 여기서 이 남성은 우연찮게 개즈비의 정체성을 알아챘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사라진 멍청한 존재라는 점에서 조롱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남성의 무지를 꿰뚫어본 개즈비는 그를 ‘조롱할 만한’ 위인이다. 그러나 개즈비는 이 농담이 온전한 진실을 담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 에피소드는 한 멍청한 남자에 대한 농담이기도 하지만, 이 농담은 개즈비를 관통하는 수치심을 탈각하고서야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긴장의 균형을 맞추려면, 저는 이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 남자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부분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예요. 그는 돌아왔어요. “아하, 이제 알겠군. 너는 여자 동성애자구만. 그러면 내가 너를 존나게 패도 상관 없겠지.”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어요! 그는 저를 존나게 팼고 아무도 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경찰서에 가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왜인지 아세요? 제가 그런 짓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4]


  김민조가 지적한 바와 같이, 코미디의 장에서의 소수자는 그 자체로 긴장이며, 이 긴장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소할 것을 기대받는다. 개즈비가 행하는 작업은, 코미디가 내포한 그러한 기대를 메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이야기는 상시적인 긴장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관객에게 온전히 도달하기 위해서, 긴장의 해소는 지연되어야 한다. 개즈비가 트라우마의 서사를 복기하며 행한 “이제 이 긴장은 당신의 것”이라는 선언은 곧 고통의 이야기 앞에 선 관객에 대한 응답의 요구일 것이다.


    

3.      

  홉스는 정치적 ‘대표’ 개념의 근원을 가면극에서 찾으며, 그 역할이 무대 위에 선 배우의 역할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마치 연기자가 자신과 무관한 텍스트상의 인물을 수행하듯, 특정 개인(주권자) 또한 일련의 계약을 통해 명백한 타인의 말과 행동을 이양 받아 정치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15]. 이렇듯, 홉스는 (주로 의제 인격을 중심으로 국가의 탄생을 해명하기 위해) 가면극의 연기자에서 정치인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대표성의 계보를 명시한다. 반대로, 페기 펠란(Peggy Phelan)은 가시성의 정치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타자화된 소수자를 재현함에 있어 (시각적) 유사성의 반복을 통한 재현이 타자에 대한 동일성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하는 한편, 그중에서도 퍼포먼스는 동일성의 재생산을 결여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 상상력을 내포한다고 서술한다[16]. 여기서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연극을 정치와 결부시키는 방식이다. 연극은 가상을 표방한다. 그러나 동시에 연극의 인물은 실재의 정형을 반복함으로써 가상이되, 현실의 그림자인 가상으로서 행위한다. 특히 정치적인 연극의 경우, 관객인 우리는 인물 중 누군가에 현실의 군상을 대입하여 극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동일시의 과정에서 일련의 오인이 발생하고, 텍스트와 그것을 재현하는 신체가 구분되는 만큼 그 오인이 특정 시점에서 깨지는 것 또한 필연적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연기자’와 그 ‘배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김민조의 지적과 같이 ‘당사자의 말하기’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는 의미심장한 정치적 함의를 띤다. 대부분의 농담이 무대 위와 아래의 공통감각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은 관객이 코미디언을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변자’로 여기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공적인 장에서 말하지 못할 이야기를 무대라는 공동의 공간으로 불러내는 것으로서의 스탠드업 코미디. 방백에 가까운 퍼포먼스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솔직한’ 형태의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의 초반부는 이 맥락에서 소수자인 개즈비가 ‘솔직한’ 정치의 장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한 각종 자조 농담으로 채워져 있다. “웃길 줄 알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은” 카페 종업원의 이름이자 작품의 영제인 ‘나네트’가 대변하듯, 시대에 뒤떨어진 고향, 고지식한 레즈비언들, 개즈비 자신의 몸 등을 조롱하는 이 농담들은 코미디라는 암막 뒤 개즈비의 이야기로 관객을 초대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중에서도 한 농담에 주목해 보고 싶다. 마디 그라(Mardi Gras)의 퀴어 퍼레이드를 텔레비전으로 처음 접한 개즈비의 에피소드를 다룬 농담이다.


  마디 그라 [퀴어 퍼레이드] 가 ‘동족’을 처음 접한 계기였어요. 작은 동네의 작은 거실의 텔레비전으로 봤는데요. (...) 제 ‘동족’이... 행진까지 하며 그들의 삶을 뽐내고 있더군요! 저는 늘 그걸 보며 생각했죠. “저깄네, 내 ‘동족’들. 좀 부산스러워 보이네? 춤추고 노는 걸 참 좋아하나봐. (...) 그러면 조용한 동성애자들은... 어디로 가는거지?” (...) 여전히 의문입니다. 제 동족에게, 파티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표현해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 강해요.[17]


  「나의 이야기」를 처음 봤을 당시, 이 농담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퀴어라 부를 수 있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나 육방색이 대변하는 자긍심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싫어하며,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더욱 끔찍해하는 스스로의 상황과 더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벽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정 때문에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시성은 다소 꺼림칙한 어감으로 다가온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드디어 나를 대변하는 코미디언이 등장하다니!)[18]. 그러나 작품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 농담이 개즈비의 전략이라는 것이 드러난 순간, 나는 당시의 내가 느낀 감정, 그리고 반응을 재고해야 했다. 내가 이 농담을 듣고 웃은 것은 정말 그를 조롱했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나의 반응에는 그에 대한 선긋기보다는, 그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한 기쁨이 더 크지 않았나? 그러나 만약 기쁨의 웃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인에 의한 것일 터이다.

  개즈비는 상술한 남성에 의한 폭력, 그리고 차마 경찰서도, 병원도 찾아가지 못했던 과거의 사실을 증언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아이는 수치심 속에 깊이 빠뜨리고, 다른 아이에게는 혐오해도 된다고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건 순전하고 단순한 호모포비아가 아니었어요. 그건 젠더화된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여성다웠’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그릇된 여자예요. 저는 그릇되었고, 그건 처벌해도 되는 범죄였습니다.[19]


  이 시점에서 나에게 「나의 이야기」는 소위 ‘당사자’ 간에도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의 위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규범적인 외형을 지니고 퀴어됨이 선명히 드러나지는 않는 사람에게, 개즈비가 겪은 폭력은 결코 매끄럽게 ‘나의 것’으로 치환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문화의 차이, 젠더 규범 속 위치의 차이, 계급의 차이(혹은, 위계)를 차치하더라도, 그가 경험한 폭력과 트라우마는 개즈비 자신의 것이며, 그의 몸에 새겨진 자신의 역사이다. 그것을 자신의 과거와 등치할 권리는 나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없다. 이 맥락에서, 권김현영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후 역사를 도배한 포스트잇을 관찰하며 발견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실제 타자의 자리를 점유”[20]한 현장은 나와 개즈비 사이의 긴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개즈비의 발언은 그의 긴장을 나에게 전도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것은 모든 측면에서 매우 다른 밀도로 감각되었다.    


      

4.      

  해나 개즈비는 돌아온다. 코미디를 그만두겠다는 선언과는 달리, 그는 2020년, 「나의 더글러스(Douglas)」라는 작품으로 코미디 무대에 다시 오른다. 개즈비는 이 작품의 서두에서 앞으로 행할 모든 농담의 순서를 나열하며 공연의 장르를 ‘러브-코미디’라 명명한다. 바로 이전 작품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코미디는, 어떻게 사랑이라는 단어와 접속하게 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개즈비는 자폐 스펙트럼 속에 놓인 스스로의 경험을 더없이 발랄한 어조로 기술한다. 이 측면에서, 「나의 더글러스」는 한편으로는 ‘자조’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코미디가 어떻게 연결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개즈비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차이를,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에게 갑작스럽게 ‘던지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물론, 그 고통의 종류가 「나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이야기를 통한 완전한 해소를 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즈비가 이 작품에서 유발하는 웃음은, 적어도 나의 감각 속에서 수치심을 의식적으로 공유하는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긍심을 수행하는 코미디를 통해 웃음이 유통되는 방식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자조의 다른 측면을 비춘다.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어떤 측면에서 차이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중 몇몇 차이는 취약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취약함은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 맥락에서 이야기는 늘 코미디에 선행해야 한다. 개즈비가 「나의 이야기」에서 지적했듯, 수치심이라는 감정과 그로 인한 고통은 이야기를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의 더글러스」는 농담의 다른 기능을 제안한다. “나와 다른 사람인 너를 욕망”[21]하는 이에게, 기습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침투시키는 것. 그러나 이는 오직 그 이야기를 듣는 개인이 나에 대한 지향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 하에만 성립 가능하다. 이 맥락에서 개즈비는 코미디와 사랑을 병렬적으로 놓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애정에 기반한 자조에서도, 관객과 코미디언 사이의 긴장의 끈은 놓아지지 않는다.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오카 마리가 지적하였듯, 고통은 절대로 ‘나’와 ‘너’ 사이에 평등하게 공유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에게 강한 무력감을 유발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위계의 사람들 사이의 공감은 따라서 우리가 분리되어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기를 요청한다. 이는 다시,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지향을 지닐 것과 더 다양한 이야기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개발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애정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타자의 언어를 통역하는 끊임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1] 오카 마리. 「타자의 언어」. 송태욱 옮김. 『흔적』, 2호, 2001, 396.

[2] “종군 ‘위안부’ 여성의 ‘신체의 심부’에서 솟구치는 아픔의 목소리에 가슴아파하면서도,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더, 사건의 폭력성은, 그녀들의 그 고통과 그것에 대한 나의 ‘공감’은 그녀들의 ‘신체의 심부’가 아니라 내 자신의 철저한 무력함을 근거로 말해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오카 마리. 「Becoming a witness ー出来事の分有と「共感」のポリティクス」. �現代思想�, 25권, 10호, 1997, 100쪽.

이지형. 「마이너리티연구에 있어서의 당사자성 문제: 한센병문학 연구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 제4호, 2019, 87n19, 재인용.

[3] 김민조.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 — 스탠드업 코미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에 관해」. 『문학과사회』, 제33권, 4호, 2020, 75-76.

[4]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성행했던 오락연예의 한 장르. 노래와 춤, 촌극 등 다양한 형식을 망라하여 구성되었으며,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보드빌.”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2367&cid=40942&categoryId=33105

[5] 1920-70년대, 유대인들이 휴양차 자주 방문하던 지역인 ‘보르시 벨트’의 리조트에서 공연하던 일군의 희극인들을 일컫는 말. 유대인의 공통감각에 기반한 코미디가 주를 이룬다. Joelle, Memoree. “SPIRITED: Comedy in the Catskills: Remembering the Borscht Belt.” New York Makers, 15 Oct. 2013, https://newyorkmakers.com/blogs/magazine/comedy-in-the-catskills-remembering-the-borscht-belt

[6] Zoglin, Richard. “Stand-up Comedy.” Encyclopedia Britannica, 20 Dec. 2021, https://www.britannica.com/art/stand-up-comedy. Accessed 18 February 2023.

[7] 스탠드업 코미디는 매우 특정한 시공간과 그곳에서 통용되는 언어에 기대는 맥락적인 농담이 주를 이루는 장르이기에 문화권을 넘어 통용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고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니아층’ 및 여러 상황은 영미권에 국한된다. 다만, 한국의 경우에도 여러 희극인들이 넷플릭스를 경유하여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도한 바 있으며, 연극계 및 여러 소수자 단체에서도 스탠드업 코미디의 양식을 적극 차용하여 여러 공연과 워크숍 등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금 아카이브에서 3년째 상연되고 있는 ‘코미디 캠프’ 시리즈를 들 수 있다.

[8] 일상에서 맞닥뜨린 크고 작은 불편함 혹은 부조리함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형식의 스탠드업 코미디. 화자는 대개 백인 남성이다.

[9] (주로 영미권의 농담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구절.

[10] 김민조. 앞의 글, 78.

[11] Nanette. produced and performed by Hannah Gadsby, 2017, Netflix.

[12] 위의 작품.

[13] 위의 작품.

[14] 위의 작품.

[15] “인격(pers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이다. 그리스인들은 그 말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얼굴’(face)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분장하고 무대에서 선 사람의 ‘가장’(假裝)이나 ‘외관’, 그중에서도 특히 가면이나 복면처럼 얼굴을 가장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이 극장의 무대를 떠나 법정으로 가서, 극장의 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떤 말과 행위의 대표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격’이라는 것은 무대 위에서나 일상 회화에서나 배우(actor)가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인격화하는’(personate) 것은 자기 자신으로 ‘행위’하거나, 혹은 타인을 ‘대표’하는 것이다. 타인의 역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든가 혹은 그 사람 이름으로 행위한다고 말한다.” 모니카 비르투 비에이라·데이비드 런시먼. 『대표: 역사, 논리, 정치』. 노시내 옮김, 후마니타스, 2020, 61-2, 재인용.

[16] Phelan, Peggy.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 Routledge, 2006, 3.

[17]  Gadsby, Hannah. 앞의 작품.

[18] “커밍아웃한, 자긍심 있는” 퀴어의 삶을 긍정하는 ‘가시화의 정치’는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레토릭은 가시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퀴어들의 삶을,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진실성이 없”거나 “퇴행적”인 것으로 낙인찍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리 그레이(Mary Gray)는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을 경유하여 “누군가가 가시화되고, ‘커밍아웃’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북적거리고 고군분투하는 ‘벽장’안에 머물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퀴어 내 정체성의 위계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존 조(John (Song Pae) Cho)는 다음과 같이 한국의 퀴어가 ‘가시화의 정치’와 맞닥뜨려 겪는 어려움을 기술한다.     

   한국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 커밍아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자긍심 대 수치심’, ‘지식 대 무지’의 이분법으로 축소될 수 없는 연민, 죄책감, 걱정 등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몇몇 게이 남성들은 부모가 죽고 나서야 커밍아웃한 후 ‘온전히’ 게이로 사는 일종의 유예된 게이 미래성을 택하기도 한다.     

   Shin, Layoung. “Avoiding T’ibu(Obvious Butchness): Invisibility as a Survival Strategy Among Young Queer Women in South Korea.” Queer Korea, ed. Todd A. Henry, Duke University Press, 2020, pp. 309-310.

[19] Gadsby, Hannah. 앞의 작품.

[20]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p.66.

[21]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2013,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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