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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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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파도를 마주하며

편집위원 검은

※ 이 글에서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보다는 ‘TERF 입장’,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사람/이들’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는 다음 인용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흔히 채식 등의 실천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동물권이나 다른 타자에 대한 권리보다는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한다고 보여진다. 한편, 디지털 공간 밖에서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의 단일한 실천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청년 여성들의 페미니즘 실천은 한 진영이나 노선으로 단일하지 않으며(오혜진, 2019), 개인에 따라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이라도 채식을 하는 것이 완벽한 페미니스트 규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이예진, 2022). 이처럼 여성들의 실천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 이러한 실천과 생각은 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TERF)를 하나의 입장으로 보고, ‘TERF’, ‘TERF 진영’ 등의 표현을 지양하고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했다.



0. 아무 생각 없이 울타리 박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라 일컬어지는 대중 및 온라인 페미니즘의 확산이 일어났습니다. 저 역시 그때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82년생 김지영』 등의 서적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였습니다. 저도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의 수혜자였던 셈이지요. 다른 사람들만큼 적극적으로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열렬히 실천하자고 외치는 4B(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는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통상적인 의미의 실천과는 조금 달랐지만요. 화장은 귀찮아서 원래 즐기지 않았고, 연애와 섹스도 관심 없어서 안 하고, 결혼 생각도 없고. 저는 여성 인권에 관심은 많지만 적극적으로 활동은 안 하고, 4B를 얼떨결에 실천하는 정도에 그치는 한 여성이었습니다.

  ‘랟펨’(‘래디컬 페미니즘’)과 ‘쓰까’(‘교차 페미니즘’)간의 갈등과 대립을 일으킨 사건 중 하나였던 2020년 트랜스젠더 여성의 숙명여대 법과대학 합격 및 입학 논란에 있어서, 저는 뚜렷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니 합격만 했다면 당연히 여대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트위터에서 오가는 설전을 보며 소위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을 접했고, 여대에 다니는 여성들이 ‘생물학적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에 의해 현실적인 위협을 느낄 수 있다는 이들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TERF’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저는 아무런 비판 없이 트위터에 떠도는 말을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더욱이, 저는 여중과 여고를 다니면서 남성에 의한 위협을 겪지 않았기에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저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와서 그런 생각을 펼친 것은 아닐까,하면서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문우편집위원회(이하 문우)에서 편집위원들을 만나고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더 넓혀나갈 수 있었고, 이후 TERF 입장과 같이 내가 배운 페미니즘과는 다른 입장을 트위터에서 마주할 때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함과 혼란스러움을 겪었습니다. 이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도,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들을 너무나도 쉽게 내뱉고, 이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 이전과는 달리 폭력이라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숙명여대 입학 논란 사건에 얽힌 여러 의견을 다시 살펴보며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노골적이고 위협적인 말들—심지어 어떤 이는 당사자를 향한 혐오범죄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을 접한 후 TERF 입장에 대해 가진 부정적인 인상은 더 굳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에게 TERF 입장은, 자신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트랜스젠더, 혹은 ‘젠더론자’라 일컬어지는, 성별 이분법에 의문을 가하는 이들)을 ‘생물학적 여성’들의 이해를 우선시해야 하는 ‘페미니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쉽게 혐오하고 ‘패버리는’ 관념으로까지 다가왔습니다. TERF 입장과 나 사이에 울타리를 박아둔 채, TERF 입장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는 작년 겨울, 당시 문우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퀴어 이론을 바탕으로 TERF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문우지에 실으려고 하였습니다. 


    

1. 당신은 왜 그런가요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글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작년 겨울에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 그만 ‘누워버리면서’ 문우지 글 마감은 물론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꼭 쓰겠지’라는 마음으로 노트북의 어느 폴더 속에 글을 묻어두었습니다. 해가 지나고, 마침 이번 문우 세미나 중 하나로 ‘넷페미’를 다루면서 ‘지난 겨울에 못 쓴 글을 꼭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묵혀두었던 글을 다시 꺼냈습니다. 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문득 이들은 왜 TERF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자료를 찾다가 논문 「페미니즘 알기의 의미 – 10-20대 여성들의 ‘TERF’ 지지 입장을 중심으로-」(송지수, 2021), 「페미니스트들의 ‘번아웃’ 호소를 통해 드러난 강남역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학」(이정연, 2022)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두 논문은 각각 “10-20대 여성들이 페미니즘 알기(knowing)의 과정에서 왜 TERF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는지”와 “젊은 층의 여성들이 왜 페미니즘으로부터 ‘번아웃’을 느끼고 있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전자의 연구에서 다수의 연구 참여자들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이질성(예시를 들자면 ‘랟펨’과 ‘쓰까’의 다름)을 페미니스트 공동체 내의 위협과 폭력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페미니스트 공동체란 ‘동일한 의견을 공유하기에 안전한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동일한 의견’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거나 이질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편을 갈라 대립하기만 하는 상황 자체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TERF 공동체의 참여자들은 곧 온라인 공간이 그러한 의견들을 말하기 어려운 환경임을 알게 됩니다. 이에 어떤 이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랟펨’ 진영의 인플루언서와는 다른 의견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많은 경우 ‘싸불’(사이버불링)이라는 형테의 제재를 당한 후 ‘랟펨’의 입장을 따르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자의 연구에서 연구 참여자들은 ‘랟펨’과 ‘쓰까’ 등의 ‘노선 갈등’, ‘완벽한 페미니스트’의 조건과 자신의 모습의 괴리에서 오는 자기검열, 페미니스트 공동체에 대한 기대의 좌절 등으로 인한 ‘번아웃’을 경험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특히 전자의 논문은 저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글을 읽기 전 저는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이 견고할 것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논문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연구 참여자들은 TERF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고하게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에 기반하여 스스로를 정체화하기보다는 ‘TERF’ 입장에 가깝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의견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참여자들은 트위터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만난 마음이 맞고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별 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에게 TERF 입장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부여하고 반페미니즘적 백래시가 만연한 환경에서 이에 맞서는 도구이자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트위터와 같은 SNS의 매체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백래시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속하고 논리적으로 ‘정답’을 말할 것을 요구받는데, 이때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이고, 이들의 권리 향상이 페미니즘의 목적이라는, 명료해 보이는 TERF 입장의 전제나 레토릭은 효율적인 논리와 언어로 간주되어 무기로서 적극 사용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이 발화되는 온라인 환경에 대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트위터와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는 한 논의가 반복적으로 오고 가면서 확산되고, 글자 수 제한 등의 요인으로 인해 자극적인 발언이 쉽게 발화되며, 이런 논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타인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수단으로서 채택되기도 합니다. 또한 온라인 공간은 페미니즘의 특정 ‘입장’을 따르고 그에 맞는 행동을 실천할 것을 강요하며 그 이외의 생각을 공유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어쩌면 저는 타인에 의한 실질적인 위협을 받지 않았기에, 문우와 같이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러 사회 의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의견을 비교적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찾았기에, 온라인상에서도 내 의견의 발화가 사이버불링을 초래하는 경험을 겪지 않았기에 TERF 입장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제가 배운 것이 TERF 입장보다 더 ‘올바르고’ ‘정답에 가까운’ 페미니즘이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정리해보니 저나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나 다르지 않은 부분이 생각보다 꽤 많았음을 알았습니다.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발언을 수긍하고 답습한 것처럼, 저 역시 TERF 입장을 지지하는—혹은 TERF 입장의 의견에 일부분이라도 동의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대화해보지도 않은 채 인터넷에서의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말을 보며 멋대로 이들을 판단한 모습이 말이죠. 그리고 둘 다 페미니즘의 ‘정답’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도요.     



2. 바다에 울타리를 꽂아봤자


  이쯤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글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심적으로 힘들고 지쳐서 누워버린 바람에 쓰지 못한 글을요. 제가 더 이상 타자 치지 못하고 누워버린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 글은 그저 비판에 그치는 말에 불과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왜 그 입장을 지지하는지, 혹은 왜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너희’로 단정 짓고 분리하며 ‘너희’의 주장은 틀렸고, 왜 틀렸는지 이유를 짚으며 그 입장을 비판하려 한 것이 제가 쓰려던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너희’들의 입장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어떤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다 포기하고 결국 실패한 것일지 모릅니다. 페미니즘의 어떤 답을 찾고자 TERF 입장을 자신의 ‘라인/정답/입장’으로 택하고, 어떤 것을 모델로 삼고 어떻게 행동해야 ‘정답’일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던 연구 참여자들처럼요.

  TERF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때든, 이 글을 쓰는 지금이든, 저는 TERF 입장을 지지하지 않고, 여성과 다른 이들의 정체성을 함께 고려하며 페미니즘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써보자면 저는 ‘쓰까’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는데, 페미니즘과 다른 학문을 접하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은 남성중심주의/이성애중심주의/인간중심주의 등의 여러 뿌리 깊은 가시덩굴로 엉켜져 있기에 이들을 억압하는 중층적인 구조를 사유해야만 하는 것을 배워서였습니다. 그리고 설령 실물로 마주친 적이 없는 모르는 상대일지라도, 그 사람이 미지의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고, 부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가장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깊고 단단한 벽으로 서로를 막는 것으로 보이는 ‘랟펨’과 ‘쓰까’에서 ‘쓰까’에 더 가까이 위치한 저는 온라인 공간의 담론에서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까지 ‘TERF’를 ‘저 먼’ 영역에 있는 소통 불가능한 외계인 정도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을 ‘너희’로 구분 지은 경계의 두께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견고하다고 느껴진 울타리가 생각보다 말랑하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짓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결코 보다 나은 행동이 아님을 깨달았죠. 바다에 울타리를 박는다고 한들 바다가 나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애초에 울타리가 바다 저 밑에 닿지 못할 테고, 밑바닥에 닿는다고 해도 물결에 의해 허물어지겠죠.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라도.


  

3. 파도를 함께 마주하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이 글은 SNS에서 일기로 적을 법한, 자기 고백에 불과한 글일지 모릅니다. 어떤 글도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고 모든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없듯이, 독자 중 누군가는 TERF 입장을 택한 이유를 알면서도 왜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자기를 ‘패’냐고 나무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왜 이해해야 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저도 TERF 입장을 알면 알수록 새로운 앎과 함께 혼란스러움을 겪는 중이라 당장 이런 질문들을 받는다면 제대로 답변할 자신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또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타인을 마주하면서 겪는 이 혼란스러움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알면 알수록 모르겠고, ‘나’에게 혼란만 줘서 ‘너’를 회피하고 싶다고 느낄지라도, “‘너’는 ‘나’와 너무 다른 것 같아. 더 이상 알아가는 것을 그만두자.”라고 단정 지은 채 ‘나’는 ‘너’를 두고 ‘더 올바른’ 페미니즘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페미니즘에는 딱 떨어지고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것도, 그리고 설령 정답이 있을지라도 ‘너’를 저 울타리 너머에 두고 가는 페미니즘은 답안지에 없을 것임을 알았기에, ‘나’는 ‘너’의 손을 잡지는 않더라도 ‘너’의 곁에 있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혼란을 몰고 오는 ‘너’(‘너’의 입장에선 ‘나’ 역시 또 하나의 거친 파도와 가깝겠죠.)를 마주해야, 정치적 입장으로서 페미니즘은 현재의 세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사유해야, ‘나’와 ‘너’를 휩쓸고 가는 반페미니즘적 백래시라는 또 다른 파도를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거대하고 넓은 담론장의 바다에서 우리는 여러 파도를 마주합니다. 유유히, 여유롭게 파도를 따라 헤엄쳐갈 수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도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파도는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장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파고가 한없이 높은 파도가 우리를 덮쳐 허우적대고, 물에 흠뻑 젖고, 온몸에 물이 찬 듯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파도는 우리를 덮치는 동시에 울타리—‘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어 갈지도 모릅니다. 얇아지고, 움직이는 울타리를 따라 실제로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함께' 이 파도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요. 파도를 넘어 새로운 물결을 따라 현재와 미래의 페미니즘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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