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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7호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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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그 능력 여주가 살아남는 법

편집위원 유연

제1화. 성공적인 클리셰를 위하여.


  웹소설은 재미있다. 오로지 재미만이 웹소설의 제1원칙이다. 웹소설 업계의 구조상, 재미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웹소설은 출판 문학, 혹은 순문학이라 부르는 것들과 명백히 구분된다. 웹소설은 상업 소설이고, ‘팔리는 글’을 쓰는 사업이다. 오천 자 분량의 한 편당 백 원에서 이백 원. 독자들이 다음 화를 결제하게 만들려면 매 화, 매 순간이 재미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웹소설 창작에는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공식이 존재한다. 그 공식, 즉 ‘클리셰’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며, 다양한 변용을 거쳐 활용된다.


  이번 글에서는 여성향 웹소설, 그중에서도 로맨스판타지(이하 로판)에 대해 다룬다.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은 소위 ‘순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출판 문학에 비해 본격적인 평론의 자리를 갖기 어렵다. 자주 로맨스는 철없는 여성들의 로망으로, 판타지는 현실 도피 목적의 환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한 웹소설 또한 문단계에서 진지하게 고려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 문학은 기실 대중의 욕망을 가장 발 빠르게 반영하는 장르이며,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모든 장르가 포함된다. 로맨스와 판타지가 제공하는 환상은 결코 ‘무에서 창조된 유’일 수 없으며, 일상의 토양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독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로판의 공식에서 우리는 되려 노골적이고 솔직한 사회의 면면을 읽어낼 수 있다.


  수십 편의 로판을 꾸준히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클리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웹소설 작법서를 펼치는 것이다. 작법서는 정갈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성공하고 싶은 작가를 위한 클리셰를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웹소설 작법서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제안한 로판의 클리셰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자. 로판 독자들이 예측하고 기대하고 사랑하는 클리셰, 그 속엔 과연 어떤 욕망이 녹아들어 있을까?


      

제2화. 12살에 부자가 된 황녀님.


  가장 첫 번째로 논해야 하는 것은 ‘회빙환’이다. 산경은 “회빙환은 우리[웹소설 작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권장되는 길이다. 회빙환을 통해 주인공에게 능력과 목적을 부여할 수 있다”라고 쓴다.회빙환이란, 회귀·빙의·환생 셋을 묶어 줄인 웹소설 업계의 줄임말이다. 회귀는 인물이 자신만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에서 삶을 재시작하는 것을, 빙의는 책이나 게임 등의 매체를 통해 이미 이세계와 그 세계의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 그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인물의 몸 속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환생은 이세계에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 처음부터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정형화된 형태의 회빙환은 상업적 성공을 원하는 웹소설 작가에게 단순한 매력 그 이상의 선택지다.


  앞선 인용에서 산경은 회빙환이 주인공에게 능력을 부여한다고 썼다. 여기서 ‘능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회빙환의 공통 지점을 짚어보자. 바로 기억으로 대표되는 지식이다.


  회귀는 현재를 살다 과거로 되돌아간 인물의 이야기이고, 당연하게도 그 시점에서 인물은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은소로의 『검을 든 꽃』, 정유나의 『버림 받은 황비』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검을 든 꽃』의 주인공 에키네시아는 검사였던 기억을 가지고 회귀해 과거에는 막지 못했던 재앙을 막아내고, 회귀 전 짝사랑했던 남주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에키네시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재능을 가진 검사로 대우받으며 주변의 선망을 받는다. 『버림 받은 황비』의 주인공 아리스티아는 과거 황제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처형당한 후 열 살의 자신으로 회귀한다. 아리스티아는 미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이전에 몰락했던 가문을 부흥시키는 데 성공하고, 황제의 사랑 또한 얻어낸다.


  빙의와 환생의 경우 또한 그렇다. 이미 읽은 책에 빙의하는 책빙의물의 경우, 주인공은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밀차의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에서 주인공 레리아나는 전생에서 읽은 책에 등장하는, 죽음이 예정된 엑스트라 인물로 빙의한다. 레리아나는 독서를 통해 습득한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죽음을 피해가고, 그 과정에서 본래 소설 속의 여주를 사랑할 운명이었던 남주와 이어진다. 킨의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에서 주인공 록사나는 이전 세계에서 읽은 책 속 악역의 누나로 빙의한다. 록사나는 자기의 위치와 미래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책 속 여주인공의 오빠를 살리고, 결국 그 인물과 이어진다.


  이처럼 주인공은 타인과 그 시작점부터 다르다. 회빙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타인이 어떤 노력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주인공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월한 존재로 만든다. 미래 지식을 이용하여 주인공은 주요 인물의 호감을 사고, 파벌 싸움에서 승리하며, 복수를 성공해낸다. 오로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 지식적 우월성이라는 ‘능력’에 더해 또 하나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것은 계급이다. 대부분의 로판은 중세에서 근대 언저리의, 가상의 서양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여주는 빙의와 환생을 통해 지식뿐 아니라 계급마저 획득한다. 현대 세계에서 이세계로의 이동 후 황녀, 공주, 공녀 등의 계급으로 재탄생한 여주는 자연스럽게 계급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회귀한 주인공의 경우 본래 고위 계급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경우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계급의 이용은 말할 것도 없다. 계급은 여주에게 사회적 뒷배경과 경제적 힘을 준다. 이는 여주의 확실한 성취를 보장하는 약속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급은 독자들이 선망하는 서양 귀족의 삶을 보여준다. 욕망에 의해 취사선택된 샴페인과 티아라, 무도회와 나들이. 나아가 계급은 애정을 약속한다. ‘육아물’ 장르가 대표적이다. 황녀 등의 지위를 가진,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로 다시 태어난 여주가 주변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장면을 작가는 몇십 화에 걸쳐 정성스럽게 묘사한다. 차소희는 육아물에 대해 “기본적인 골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주인공’이다. 내가 실수를 해도, 잘못을 저질러도, 막무가내로 굴어도 모두가 나를 예뻐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서술한다.이렇듯 독자들은 눈에 보이는 계급에 열광한다. 계급으로 얻어지는 것들에 열광한다.


  회빙환의 과정을 거쳐 획득한 범접할 수 없는 지식적 우위와 높은 계급이라는 요소를 독자들은 여주를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능력으로 더 우월해지고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상황의 카타르시스를 ‘사이다’로, 여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능력 없는 캐릭터에게 패배하는 상황을 ‘고구마’로 받아들인다. 그중에서도 독자들이 특히 즐거워하는 것은 ‘지식과 계급’을 이용한 ‘사이다’ 장면이다.


  이지하의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에서 클로에는 공작부인의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하녀들에게서 무시받는 처지이다. 클로에의 몸에 빙의한 여주는 ‘하녀의 뺨을 때림으로써’ 새시작한다. 해당 화의 댓글에는 어김없이 ‘사이다’가 등장한다. 권경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귀한 주인공의 권력 투쟁은 복수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게 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인내, 순종, 온순함은 결국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추방, 유배 종내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제 회귀 주인공은 착함, 선함, 온순함, 순순함을 폐기하고 자신의 이득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산소비의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에서 아리아는 여동생 미엘르의 계략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고 과거로 회귀한다. 아리아는 미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미엘르에게 복수한다. 그 복수를 독자들은 ‘사이다’라고 여긴다. 그들은 더는 착하고 선하게―어리석게 살지 않는 주인공에게 환호한다.     


  저 못된 악녀의 목을 내려치라 직접 지시했던 카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과거와는 반대로 제 친 여동생과 그녀의 사랑스러운 시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내고 있지 않은가. 이리도 대단한 무기를 갖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과거가 아쉬웠다.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불행한 과거를 갖게 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 울분을 털어낼 수 있는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했다. 과거를 경험한 덕분에 이리도 악랄한 악녀가 되지 않았는가.     


  본질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웹소설도 ‘사이다’만을 제공할 수는 없다. ‘고구마’는 독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장면이고, ‘사이다’는 그 답답함을 해소시켜주는 장면이다. ‘사이다’는 ‘고구마’가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고구마’를 혐오한다. 따라서 웹소설 작가들은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차소희는 “만일 한 회라도 고구마 전개가 있거나 인물의 앞날이 캄캄하다면 “하차하겠습니다”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고 하며 고구마가 등장한 회차의 두 배만큼 사이다 회차를 넣기를 권장한다.


  또, 진문은 사이다만 주는 것처럼 보이는 글쓰기 기술들을 소개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의 조언이다. “문제가 벌어지는 상황을 보여주더라도, 주인공이 당황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방향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생략) 이렇게 연출하면 문제 상황이 주인공 앞에 펼쳐져도 독자는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쾌감을 느낀다. 주변 인물들은 패닉에 빠져 죽어가지만, 주인공은 그 위기를 잘 활용해 성공해나가기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즉 고구마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 고구마는 절대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독자들은 사이다를 사랑한다. 정확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사랑받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 사랑받을 자격이란 재력과 미모, 강함과 유능함이고 그것을 갖춘 사람이 여주이다. 독자들은 여주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와 보상을 받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남주의 사랑과 함께 막을 내리는 해피엔딩은 여주가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이다. 잘생기고 멋진 남주의 헌신과 애정은 여주의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이다. 회빙환으로 시작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일련의 흐름 속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사용된 ‘능력’이라는 단어를 읽어냈다.          



제3화. 이번 생은 유능하게 살겠습니다.


  능력만능주의, 혹은 능력지상주의. 동시대의 많은 이들은 능력 좋은 개인이 무능력한 개인보다 더 많은 성취를 거두고 더 많이 분배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서는 능력의 유무와 정도를 재화 분배의 제1기준으로 삼는다. 공정과 평등을 논하는 이 주장은 일견 정당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보면, 이 능력주의에는 분명 석연찮은 구석이 존재한다.     


  우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개인의 능력이라고 볼 것인가? 많은 경우, 사회가 ‘능력’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 연원이 불명확한 경우가 잦다. 똑똑한 사고력, 천재적인 예술 재능 등의 능력은 대개 운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유전에 의해서든 아니면 임의로 타고난 것이든 그러한 종류의 능력은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다. 또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도 운에 강하게 의존한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리는 것에 긍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 그 재능을 살릴 만한 경제적 여건이 충분한 가정인 것, 더 나아가서는 재능이 쓸모 있다고 평가받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모두 운이 결정하는 영역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들면, 인력거를 천재적으로 끄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현대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는 노력을 숭배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능력’은 결코 개인의 온전한 노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각은 능력이 좋은 사람이 많이 성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유능한 개인의 성취는 정말로 합당하고 공정하며, 무능한 사람에게는―그러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성취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가? 앞 문단을 상기해보면, 그것은 사실 너무나 불합리하고 위험한 믿음이 아닌가?     


  다시 로판으로 돌아가보자. 회빙환과 계급을 돌아보면 그것 또한 운에 의해 주어졌다는 점에서 여타 ‘능력’과 다르지 않다. 여주의 회귀와 빙의, 환생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진 사건이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불운한 사고로 죽은 여주는 이유 없이 이세계로 이동한다. 계급 또한 운 좋게 주어진 것이다. 우연히 빙의한 몸이 귀족이라서, 황녀라서 여주는 고위층이 된다.     


  그렇게 여주는 유능한 인물이 되어 성공을 거둔다. 그 반대항인, 무능한 인물―악역―은 패배한다. 알파타르트의 『재혼황후』 속 악역인 라스타는 노예 출신의 여성으로 황제의 사랑을 얻어 황후가 된다. 그 과정에서 본래 황후였던 여주가 밀려난다. 라스타는 노예 출신이므로 당연히 외교와 같은 국정 운영에 대한 지식이 없다. 반면 여주는 고위 귀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황후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인물이다. 결국 ‘무능한’ 라스타는 황제의 사랑을 잃고 몰락해 판면에서 사라진다. 


  정유나의 『버림 받은 황비』에서 악역인 지은은 현대 세계에서 작중 세계로 이동한 여고생이다. 지은은 신탁을 통해 여주를 밀어내고 황후가 되었으나, 라스타와 마찬가지로 황후답지 못해 패배한다. 지은은 유능한 황후가 되기 위해 노력하나, 그 노력은 성취로 이어지지 못한다.      


  “매번 노력, 노력, 말만 하고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그놈의 노력은 대체 어디다 기울이고 있나? 처음에야 몰랐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사 년쯤 됐으면 이제는 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고, 뭐라 말을 좀 하려 하면 울기나 하고, 대체 그대는 제국의 황후가 뭐라고 생각하나? 황후라는 이름이 아깝다! 정말 그대가 신이 정해 준 내 반려가 맞기는 한 건가? 황비의 반의반만이라도 따라가 보라, 좀!”     


  황제는 지은에게 노력을 해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일갈하며 여주인 황비와 비교한다. 이에 지은은 “나름 노력한다고 당신 안 볼 때 이 악물고 공부했어, 하루에 열두 시간도 넘게 거의 매일 공부만 했다고!”라며 울분을 토한다. 사실 현대에서 넘어온 지은이 평생 황후 수업을 받은 여주보다 ‘무능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은은 결국 그 무능력으로 인해 황제의 사랑을 잃고, 황후 자리를 잃는다.      


  독자들은 무능력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라스타와 지은은 운에 의한 무임승차자로 여겨진다. 즉 능력이 없는데 ‘운 좋게’ 돈과 권력, 사랑을 얻었으나, 그것은 교정되어야 할 부조리이므로 그들의 몰락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의 몰락은 독자들에게 사이다를 준다. “솔직히 4년동안 12시간씩 최고의 선생한테 배웠으면 좀 잘해야 하는거 아닌가?”, “능력은 개뿔도 없고 뭐만하면 눈물찡찡” 등의 댓글들은 결과적으로 무능한 지은에게 황후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은의 ‘노력’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순간의 동정 뿐이다. 그들은 일 잘하는 여주, 똑똑하고 특별한 여주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약속된 자리를 돌려받기를 기다린다. 실상 여주의 ‘능력’ 또한 운이 아닌 것이 없음에도.           



제4화. 그 능력 여주가 살아남는 법.


  단순히 웹소설은 능력주의와 영합하므로 읽지 말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글 도입에서 말했다시피 웹소설은 재미있어서 팔리는 소설이다. 김휘빈은 “회귀물의 경우에는 초창기에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전능감 위주로 전개되었으나 점차 ‘실패와 좌절 없는 인생’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욕망이다. 갑질물이나 사이다물 역시 앞서 말했듯 사회상을 반영한다.”라고 쓰며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현실과 결부된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웹소설이 작가에게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의 주인공 아리아처럼, 여주가 과거를 후회하며 앞으로는 ‘악독하게’ 살겠다고 개심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사회상과 연관짓는다면 이해할 수 있다.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호구’라고 조롱당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호구’가 되지 않고, 똑부러지게 자기 몫을 챙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능력이라는 말, 공정, 성과를 낸 만큼의 보수, 정확한 분배.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말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 우리를 끼워넣고 싶어한다. 누구나 인정받고, 성공하고 싶어한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진리와도 같아서 의심조차 할 수 없다. 원하는 만큼 유능한 세상,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환상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가장 솔직한 욕망은 이런 종류이다. 운 좋게 우월한 사람이 되고, 멋진 호화를 누리고, 헌신적인 상대의 사랑을 받는 것.     


  그래서 우리는 즐겁게 웹소설을 읽는다. 여주의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눈물지으며, 연애에 환호한다.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의 틈새를 웹소설은 치밀하게 파고든다. 그렇기에 독자가, 우리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욕망’에 대해, 그 욕망이 자리잡은 토양에 대해 더 세밀하게 짚어보는 순간은 분명 필요하다.      


  김휘빈이 말했듯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상은 점점 더 완벽하고 엄격해진다. 웹소설 작가들은 독자들이 ‘고구마’를 견디는 횟수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주인공에 이입하는 ‘우리’는 더는 ‘고구마’―즉 답답하고 유약하며 우유부단해서 실패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해서,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믿는 능력주의는 자주 우리를 배신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디선가는 노예 출신인 라스타일 것이며, 또 어디선가는 12시간씩 공부해도 ‘운 좋게’ 얻은 자리에서 쫒겨나야만 할 지은일지도 모른다.      


  변화하는 사회에 웹소설은 항상 발맞추어 걸을 것이다. 그 어떤 문학보다도 빠르게 달려와 독자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여전히 회빙환이 유행일 수도 있고, 또 새로운 형태로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클리셰가 태어났을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우리는 로판 여주가 아니어서 미래의 지식 같은 건 알지 못하므로. 그때에도 웹소설이 새롭게 뿌리내린 토양을 살피는 글은 쓰일 것이다. 더 정교해진 능력주의를 읽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때에도 유효할 사랑의 욕망을 분석하는 글일 수도 있겠다. 개인적인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 글의 제목은 어떤 여주든 간에 ‘행복해지는 법’이었으면 좋겠다.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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