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문우 작가연맹
감은 눈이 움찔거렸다. 후두둑, 떨어졌다. 더운 김 머금은 방울은 눈가를 타고 볼에 닿을 적에 완전히 식어버렸다. 서늘한 감각은 좀처럼 익숙해질 줄을 모른다. 턱끝에 맺힌 냉기 차갑게 어깨 위로 떨어질 때에야 고개를 저어대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 해 여름은 그 전 해보다 ‘조금 더 더웠다'. 완은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저며왔다. 따가운 느낌이 싫어 실눈을 떴다. 왼쪽 머리칼이 젖어있었다. 어제는 왼 편으로 누워 잠에 들었나 보다. 얼굴이며 머리, 헐렁이는 티셔츠의 윗부분까지 적셔 놓았지만 베개 하나 지켰다는 사실은 제법 큰 위안이었다.
‘이게 다 나한테서 나온 거라고.’
완에게 있어 여름은 손실의 시간이었다. 봄 사이 잠들어 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어나는 딱 그 만큼씩 완의 기력은 떨어져만 갔다. 밤마다 이렇게 물이며 염분을 빼내어도 사람이 살 수가 있는 것일까.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바닥을 마구 짚어 마른 수건 하나 들어 얼굴을 묻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8분’. 날씨를 확인했다. ‘올해 여름은 작년의 최고치를 뚫으며, 역대 최고로 더운 날을 기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그 전 해에도 보았던 ‘것으로 보였다'. 대체 여름이라는 것은 언제까지 그 최고치라는 것을 갱신할까.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점은, 이 최고 기록이 몇 번만 더 새로 쓰이는 날에는 자신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더위는 완에게 혹독했다.
‘12시 29분'. 아무래도 자는 사이에 성이 선풍기를 꺼둔 모양이었다. 그 애는 제법 고리타분한 면이 있었다. 선풍기를 켜놓고 잤을 때 사람이 죽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완의 목숨은 오십 하고도 두어 개쯤은 더 있어야 맞았다. 이번에야말로 말을 넣어둬야지. 톡으로든 멘션으로든, 아니면 쪽지를 써두든지 간에.
‘12시 30분'. 모든 SNS의 피드를 열 일곱 번 정도 새로 띄웠을 쯤, 완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그리고 잊지 말았어야 할 무언가를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 두 시.
면접이 있었다. 완의 집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가면 나오는 시내에 위치한, 개장 전의 무한 리필 고깃집이었다. 홀 직원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완에게 식당 홀이란 에어컨이 있음에도 땀이 비 오듯이 나는 여름철 비선호 직종이었다. 게다가 좁은 동네에서 아는 얼굴들을 손님으로 맞으며 묘한 비참함을 느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탈지구 오디션에 참가한다는 명분으로 이렇다 할 일 없이 노는 그에게도 당장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탈지구 오디션은 완이 가진 희망의 전부였다. 정식 명칭은 국제 탈지구 프로젝트로, 아직도 구(舊)행성 지구에 처박힌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신(新)행성 공동체연합 주도의 오디션이었다. 벌써 삼십 년 전부터 미국 과학자들이 건너가 살기 시작한 신행성은, 걷잡을 수 없는 오염으로 이미 반 폐허가 된 구행성과 달리 아름다운 초목이 우거지고 식량 재배에 걸맞는 기후와 생태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당연히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개발권을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개발이 끝나 제법 살 만한 에덴 동산이 만들어지자 재력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족들, 새로운 일에 나서고 싶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하나 둘씩 신행성 천국으로 이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구행성에 남은 이들 중 몇몇은 분개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동경했다. 그리고 지금의 오디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자격 조건도 없는 오디션에서 선발되기만 하면 신행성의 일원이 된다는데, 잃을 것 없는 완이 어떻게 도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선 놓친 면접 생각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상에 사람인가! 분명 아홉시 반부터 십분 간격으로 알람을 네 개나 예약했었는데, 다 무시하고 잤구나, 놀랍지도 않지. 근방에 다른 일이 있을까.’
필요한 돈을 맞추려면 시내보다 더 멀리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정수리부터 힘이 빠졌다. 축축한 매트리스는 그새 땀이 기화해 애매하게 차가웠고 손에 쥔 휴대폰은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어제 먹은 에너지 바 부스러기가 이불 어딘가에 있었는지 종아리가 따가웠다. 갑자기 그 모든 감각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다가와 완은 참을 수 없었다. 어두운 화면 속 피드는 오늘 신행성으로 출발하는 지난 시즌 합격자들의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단호하게 휴대폰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씻자, 일단 샤워만 하면 모든 게 최악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불을 그대로 둔 채 욕실로 향했다. 틀어둔 텔레비전에서는 기상 예보가 끝나고 광고가 나왔다.
‘새로운 행성, 새로운 우리! 안전한 공동체와 깨끗한 새 출발의 기회! 제 3회 국제 탈-지구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따라란~딴~!’
신행성 X의 깃발과 그 옆에서 환하게 웃는 모델들이 화면에 잡혔다. 열댓 명의 얼굴이 각각 클로즈업되어 지나갔다. 다르게 생긴 그들은 공통적으로 눈부시게 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라아안! 따아안!”
욕실에서 완이 광고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원은 이를 닦으며 화장실 거울에 각인된 금빛 글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안으로의 일탈’. 원의 직장 이름이다. 안으로의 일탈은 장르소설계에서 나름의 명성과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하는 출판사로, 오랫동안 오직 종이 판본만을 고수해왔다. 그러던 중 전자책이나 라이브프린트 시장이 커지면서 안으로의 일탈도 지금 그대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원은 괜히 칫솔을 입에 문 채 거울에 새겨진 글자를 엄지 손끝으로 박박 문대본다. 손끝에 가려진 받침 여부가 묘하게 다른 글귀를 만든다. ‘안으로의 이탈’, 어쩌면 이게 더 정확하겠다. 출판업의 중심, 아니 전부나 다름없던 종이책이 이제는 바깥에서 온 전자책에 밀려 전체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으니 우리도 안쪽으로 이탈해가는 것일지 모르지. 원은 생각한다.
안으로의 일탈은 최근 라이브프린팅 업체랑 컨택 중에 있다. 회사의 향방에 대한 의견은 사내에서도 조금씩 갈리지만, 요즘은 디지털화가 당연히 필요하다는 입장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안으로의 일탈과 오래 함께해 온 종이책의 질감, 냄새, 촉감 등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라이브프린팅은 그 대안이자 절충과도 같았다. 라이브프린팅은 쉽게 말해 글로 읽는 4D 영화 같은 건데, 디지털 가공된 잉크를 사용해서 종이책에 감각을 삽입할 수 있는 기술이다. 종이를 넘기는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로운 기술을 장르소설의 특징과 엮어보고자 하는 회사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라이브프린팅 업체와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 원도 있었다. 라이브프린팅 업체 대표로 나온 사람은 근현대사에서 인쇄매체가 대중화되고 쇠퇴한 과정을 지루하게 읊어대더니 지금이 바로 독자층이 다시 한번 변화하게 될 시대임을 역설했다. 그는 독자층을 단순히 확장하고자 하는 전략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며 ‘막말로 한 권 두 권 파는 책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지 않느냐, 무슨 말인지 아실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제스처로 말했다. 그러면서, 라이브프린팅 책은 자연히 단가가 올라가기 마련이지만, 요즘 대중에게는 더 좋은 경험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기를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트렌디’하다 보니 가격 자체가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거라고 빠르게 덧붙였다. 신행성이 개척되며 사람들은 세계가 넓어졌다 생각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구행성을 뜨고 말 것이고, 그런 식으로 트렌드가 옮겨가는 게 세상 돌아가는 당연한 이치라며 그는 떠들어댔다.
원은 입을 헹구고 손을 씻었다. 물기가 뚝뚝 흐르는 손을 들고 핸드드라이어 앞에서 멈칫했다가 몇 발짝 되돌아 가 타올을 두 장 뽑고 손을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며 원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원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아무런 음악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회사 로비의 광고 스크린 속 로고송이 가로막힌 귓구멍 입구에 부딪혀 왕왕 작게 새어 들어왔다.
‘새로운 행성, 새로운 우리! 안전한 공동체와 깨끗한 새 출발의 기회! 제 3회 국제 탈-지구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따라란~딴~!’
원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눈높이로 들어 광고 스크린의 사진을 찍었다.
‘저열한 자유경쟁 노오-력 프로파간다. 22세기가 맞는 건지.’
원은 SNS에 사진을 첨부하며 냉소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점심시간의 SNS 타임라인은 분주하게 새로고침되고 있었다. 원은 커피를 더 마실지, 사무실로 바로 돌아갈지 고민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스크린에 위아래로 나란히 배열된 오늘의 날씨와 현재 시각을 흘끗 살피며 원은 작게 하품을 했다.
성은 그 시각 서점에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빈티지한 책들을 꽤나 많이 다루는 서점으로 종이책만을 고집한다든가, 1세기 전의 캐릭터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성의 취향에 잘 맞아 먼지가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는 곳이었다. 특히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에는 꼭 들렀다. 집에서 도보로도 충분한 거리였으니 가볍게 나오기에 탁월했고.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는 이상 한낮에 잘 활동하지 않는 성이 오후 1시가 다 된 지금, 이 서점에 온 것은 완 때문이었다.
완의 선풍기 소리가 유독 거슬리는 날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완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나가서 아예 코드를 뽑아 버린 후에야 성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다행인 건 쉬는 날이라 늦게까지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성은 또다시 웬 아홉 시 반부터 울려 대는 완의 알람 때문에 채 네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눈을 뜨자마자 완의 방으로 가 정확히 두 번째 울리기 시작한 알람과 10분 간격으로 설정되어 있는 나머지 알람 두 개를 지워 버린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건 꾸덕한 브라우니나 땅콩쿠키, 젤리 따위였으나 애써 지우고 다시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서점이었다.
매끄럽게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오래된 종이책 특유의 쿱쿱한 냄새가 먼지와 함께 부유한다. 자연스럽게 신간 소설이 모여 있는 칸으로 다가간다. 며칠 전 버스정류장 광고판에서 봤던 ‘제’의 신간이 눈에 띈다. 제는 흡입력 있는 문체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장르 소설 작가로, 몇 년 전 꽤 권위 있는 상을 받으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상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드디어 신간이 나온 모양이다.
팔을 뻗어 한 권을 집어 든다. 표지 가운데에는 신행성 X가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오른쪽 상단에 ‘라이브프린팅’이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다. 성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라이브프린팅? 들어본 적 있다. 이름도 생소하고 해괴한 기술이라 생각했던 건데, 제가 이 기술로 책을 만들다니. 성은 새로운 기술을 경계하는 면이 있었다. 출판사를 보니 처음 듣는 출판사였다. 안으로의 일탈이 아닌 걸 보니 이번 신간은 재미가 없어 기술로 승부를 보려는 게 분명했다. 종이책만이 ‘진짜’ 책이라고 믿는 성은 펼쳐 보지도 않은 책을 다시 책장으로 꽂아 넣는다.
신간 코너를 지나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코너의 분류를 나타내는 팻말에는 ‘21세기’ 라고 쓰여 있다.
이 코너는 참 한결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하나 집어 올렸다. 진열 순서가 조금 바뀐 것 말고는 처음 서점에 왔을 때랑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성이 들어 올린 책 표지에는 익숙한 북극곰의 새까만 눈동자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책들도 비슷하게 빙하 위에 고립된 북극여우, 낯선 나무에 앉은 이름 모를 새들이 등장하여 멸종한 동물들에 대해 떠들어댔다.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을 진부한 내용이지만, 믿었던 제마저 라이브프린팅인지 프린터인지로 돌아선 것에 느낀 배신감을 어떻게든 달래고 싶었다. 멸종’위기’ 라는 단어가 부제로 쓰인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됐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표지 안쪽의 출판일자를 확인했다. 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띠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중고라 할 수 있지.’
성은 지금까지 읽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도 없는 책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책등을 매만졌다. 유행은 빠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불변하는 것은 있다. 성은 바깥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더라도 이 서점과 낡은 책들, 그리고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 북극곰만큼은 여전할 것이라 믿었다. 기존의 전자책 붐보다 더 크게 주목받고 있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라이브프린팅’ 기술이 아무리 널리 퍼지더라도 종이책 마니아층까지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이 성의 공상을 깨뜨렸다. 몇 초 단위로 울려대는 알림에 화면을 보기 전에도 수신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메시지 한 번으로 전할 수 있는 내용을 굳이 단어 단위로 나눠서 보낼만한 사람은-
“완 말고는 없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평소라면 메시지함이 이미 폭발했을 텐데, 웬일로 3개로 그쳤다.
‘올 때 / 메론바 / (윙크하는 이모티콘)’
완은 오디션 준비를 한다며 집에 오래 있을수록 뻔뻔함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답장을 하기 위해 입력창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순간, 전화 수화기 아이콘이 뜨며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09분, ‘기’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으며 마음 깊숙이서 인내심을 불러모았다. 신성한 휴일에 연락이 온다는 것부터 참을 수 없었지만, 이메일이나 문자로 해도 될 것을 전화로 하다니- 괘씸함에 눈을 다시 뜨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짜증을 상대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유치한 고집에 일부러 몇 초 동안 진동이 이어지게 했다. 그러나 곧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던 브라우니를 사 먹자며 자기 자신을 위로해본다.
“네에, 네, 성입니다. 무슨 이, 일이라도…?” 애써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벌써부터 혀가 꼬이는 기분이다.
[성, 휴일에 연락해서 미안해요.] 미안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화요일에 보내준 자료 검토해봤는데, 우리 쪽에서 요구한 명단이 하나 없는 것 같아서요. 지금 확인 가능할까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요일에 보낸 걸 왜 지금 확인했는지, 급한 일도 아닌데 왜 휴일이 끝난 후에 연락할 수는 없었는지, 왜 하필 나인지. 온갖 불평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성은 기를 대화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직접적인 대화는 누구랑 하더라도 불편했지만, 기의 단조로우며 기계적인 말투는 물리적으로 뒷걸음치고 싶은 본능을 일으켰다. 성은 북극곰 책을 슬며시 선반에 올려두고 긴장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 예에, 예. 뭔가 차, 착오라도 있던 모양이네요.” 기가 언급하는 명단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제가 지금 담당자한테 연라-“
[네, 그것 말고도 또 하나-]
갑자기 기의 목소리가 끊겼다. 말을 끊는 것도 모자라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다니! 목 끝까지 올라오는 험한 말을 삼키고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에 의하면 아직 통화 중인 상태였다. 부질없을 것을 알면서도 음량 버튼을 조절하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자 낮은 백색소음만이 들렸다.
“여, 여보세요? 기?”
기와의 통화에 정신이 쏠려 성은 조금 전까지 선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북극곰 책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쏠려 내려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머리 위의 램프가 진자 운동을 하듯 느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성의 한가한 오후는 기와의 통화 한 번으로 갈가리 찢긴 듯했다. 성에게 기와의 만남은 대면이건 전화상이건 간에 항상 어딘가 불안정하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를 처음으로 만났던 반(反)탈지구연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反)탈지구연합은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탈지구 프로젝트를 비판하고 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임이었다. 이들은 파괴된 구행성을 버리고 신행성으로 떠나간 사람들에게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행성으로 가지 못하고 구행성에 남아야 했던 ‘잉여’의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멸시당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성은 탈-지구라거나, 반 탈-지구에 관해 별 의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오히려 체념해버린 쪽에 가까웠다. 그는 탈-지구 오디션이 구행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어넣는 헛된 신화를 믿지 않았다. 성은 어쨌든 낡고 병든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을 믿고 살아야 했다. 그런 성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은 완과의 오랜 다툼 때문이었다. 성은 동생인 완을 좋아했고 둘은 나름대로 잘 지냈지만 그만큼 자주 싸우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탈-지구 오디션을 위해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나온 완을 성은 이해하지 못했다. 성과 완이 이 문제에 대해 또 한 번 크게 다툰 날, 성은 골목마다 붙은 반 탈-지구 프로젝트 홍보 포스터에 적힌 연락처를 받아적어 왔다.
성이 얼떨결에 이 프로젝트에 속하게 된 반면 기는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는 구행성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한 사회의 불합리에 분노했다. 기가 말하는 이야기 대부분을 성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은 이를 묻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선택했다. 둘의 대화에는 애매한 균형이 있었다.
성에게 이 프로젝트는 진정으로 힘 쏟길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한심한 피붙이에 대한 일종의 반항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성은 서명 명단이라거나 각종 캠페인 기획안 등 서류 더미에 시달려야 했다. 좀 전에 기가 말했던 명단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성은 하루빨리 이 소모적인 반항을 멈추고 이 프로젝트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꼭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그는 반대쪽 손을 한참이나 가만두지 못했다. 선반 위에 얹어놓은 왼손이 불안한 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 사이 선반의 책들은 북극곰을 기점으로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성이 핸드폰을 귀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 북극곰의 멍한 눈동자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성은 깜짝 놀라 발밑에 떨어진 책을 보았다. 책은 반으로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그 위로 또 몇 권의 책이 떨어졌다. 책들은 한 번 깨진 균형을 쉽사리 찾지 못했다. 그가 손 뻗으려 했을 때 21세기는 이미 쏟아져버린 후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발밑에 엎어진 책들과 손에 들린 핸드폰을 눈앞에 두고 성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핸드폰 위로 번쩍이는 통화 화면의 시간이 계속 더해졌다. 상대방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잔기침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려왔다.
기는 책상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다. 아니, 있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의 스크린이 피곤했던 탓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빽빽한 명단을 확인하는 중이었고, 커피포트에 올려놓은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중이기도 했다. 반탈지구연합의 의견을 여러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보내고 지지 성명을 보내온 사람들을 추려내는 문서였다. 비슷한 듯 다른 수많은 이름과 답변들을 정리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평일에는 회사 일에 시달리다가 휴일에는 프로젝트의 밀린 실무를 처리해야 하는 것쯤은 괜찮았다. 제가 해야 하고 하기로 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평일 동안 진행된 일에서 구멍을 발견하거나 한 번에 잘 해내면 됐던 일을 손보느라 두 번 세 번 돌아봐야 하는 건 질색이었다. 맡아서 정리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자 이 사람만은 아니었으면 했던 이름이 튀어나온다. 성. 왜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목표가 무엇인지조차 감을 잡기 어려운 사람. 휴일에는 메일 연락도 거의 받지 않음으로 꼼짝없이 전화를 해야 했다. 커피포트는 끓은 물이 만든 더운 김을 뱉었고 기가 짙은 한숨을 내쉰 것도 거의 동시였다. 후덥지근한 방은 그 덕에 더 더워진 듯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틀어져 있지 않은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열린 창으로 가끔 밀려들어오는 미적지근하고 끈적한 바람뿐이었다.
기는 뒤집혀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연락처를 찾았다. 건조하게 이름만으로 저장되어 있는 항목을 길게 눌렀다. 휴일에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시작으로 화요일에 보내 주었던 명단을 다시 확인해 달라, 그 김에 다른 곳에도 연락을 더 부탁한다, 그런 잔소리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내다가,
쿵.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본디 책장 위에 있어야 했던 상패와 그 상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책장 위의 공간이 좁기는 했지만, 갑자기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통화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경계하듯 살폈다. 언제나 그래 왔듯 기는 본인을 믿기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믿는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탓인지, 혹은 둘 다인지. 쎄한 고통이 종아리를 찌르듯 찾아왔다. 다시 앉지도, 그렇다고 그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핸드폰을 힘주어 쥐고 있는 사이 고요하던 핸드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깐 연결 상태가 나빴던 걸까? 여보세요, 하고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또, 다시.
쿵.
감각이 둔한 기에게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책상 모서리에 걸쳐져 있던 마우스가 떨어졌다. 지진? 아니다. 진동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물체가 부딪힌 듯한 충격에 가까웠다. 말문이 막혔다.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어야 하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일 먼저 목격한 이가 처음 한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현장을 보아야 한다는 엄청난 의지가 있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 물론 아니었다. 제가 태어난 가정은 1구역이나 그 가까운 곳에서 살지 않았던, 즉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가정이었다. 부모도 저도 신행성에 갈 정도로 권력이나 재력이 넘치진 못했으므로, 그렇다고 탈 지구 오디션에 지원할 정도로 신행성을 간절히 갈망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이러고 보고 있을 것이다. 제 머리 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모든 재앙이 개개인의 사정을 봐줄 정도로 너그럽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기적을 바라는 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그러나-
쾅!
현장을 그다음으로 목격한 것은 원이었다. 결국 마시지 못한 커피를 탕비실에서 채워 나오던 원은 무심결에 팀장 뒤의 창문에 눈길을 주었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 의심하며 도로 창문을 보았다. 원이 천문우주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았던 태양광 판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판은 시야를 벗어났다.
“왜 그러고 있어요?”
“저기… 창밖에...”
다른 직원도 고개를 돌렸다. 쾅!
샤워를 하고 나오던 완도 떨어지는 기계무리들을 보았다. 죄송하다고 사정을 하며 면접 시간을 1시간 뒤로 미룬 후였다. 시내버스 하나가 환승 없이 직행하는 코스였으므로 버스만 놓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완은 수건으로 후닥닥 몸을 닦고 서랍에서 최대한 멀끔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옷을 찾았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면 무난할 터였다. 그때 완을 등지고 커다란 그림자가 지나갔다. 쾅! 완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림자가 두어 개 더 지나갔다. 쾅! 구름이라면 그렇게 검을 수 없었고 빠를 수도 없었다. 완은 옷가지를 갖춰 입는 것도 잊은 채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로봇팔이 비행기 하나를 감고 추락하고 있었다. 완은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공포에 질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부정하는 눈. 아주 찰나였고, 비행기는 로봇팔에 이끌려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떨어졌다. 완은 귀를 막았다. 아주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세상이 뒤바뀌는 소리였다.
웅, 웅, 웅. 검은 액정이 환히 빛나며 몇 개의 알림이 차례로 올라왔다. 낮게 칸막이가 쳐진 사무실에서, 원은 그 화면이 도로 꺼지기 전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사람들이 낮은 담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쩐지 무음 모드를 풀어두었던 모양이다. 사무실 특유의 ‘21세기스러운' 분위기만큼이나 원의 동료들은 소음으로 인한 방해를 꺼려했다. 특히나, 방금 전 엄청난 소란이 일어난 직후였기에 방을 채운 사람들의 신경은 더욱 곤두세워져 있었다. 떨어지던 판들을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그것을 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짤막한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두가 무조건 보아야 한다 주장이라도 하듯, 포탈에 접속하자마자 툭 하고 튀어나왔다.
‘1구역 태양광 판 추락은 단순 사고… . 큰 피해는 없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기사는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래왔듯 수도 구역의 훌륭한 보안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문구로 마무리되었다. 사건 경위를 조사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일 텐데, 이렇게 빨리 결단을 내려도 되는 것일까. 원은 눈썹을 까딱였다. 하지만 어딘가 권위를 가진 듯 보이는 문구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큰 소리에 동요하던 사람들은 연락을 취하려 핸드폰을 들었다가, 하나둘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에이' 따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사람들이다, 생각하던 원 또한 어느 순간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멈추고 당장 눈앞에 놓인 계약 문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업무가 끝나면 무슨 일이었는지 알아는 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갑작스런 진동의 정체는 낮 즈음에 올렸던 게시물에 대한 알림이었다. 급작스레 세운 모래성마냥 빠르게 쌓여버린 ‘좋아요'. 그 긍정과 관심의 표현이 ‘저열한 자유경쟁’을 향한 것인지,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22세기’에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음이 다 녹아 미끌미끌한 플라스틱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알림 목록을 쭉 내려보았다. 맨 처음을 장식하는 아이디는 ‘Obi_wan_hatessummer’. 오늘도 어김없이, 같았다.
자연히 피드를 타고 들어가, 꺼진 선풍기 사진에 덧붙여진 온갖 불평을 무심히 읽어내리던 그때였다. 왜애애애애앵! 온 사무실이 소음으로 가득 찼다. 소음의 근원은 원의 핸드폰, 아니, 여러 겹의 칸막이 사이에 놓인 모두의 핸드폰이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울리자 사람들은 다급히 전원 버튼을 눌러대기에 바빴다. 원은 일순 부산스레 몸을 떨어대는 액정, 정확히는 그 위에 떠오른 글자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긴급 재난 경보] 구역 17 및 전 대륙 곳곳에 규모 5.0의 지진 발생. 빠른 대피 요망.
17이라면 수도인 이곳과는 꽤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는 지진에 관련한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사무실의 동료들은 알림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저 다른 세계의 일처럼 여기며 다시금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 진동소리로 눈총을 샀던 원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행동을 모방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전 대륙에, 그것도 비슷한 시간에 지진이라니.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지진, 지진, 지진, … 방금 전 1구역 하늘을 덮었던 검은 판들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검색란이나 속보란에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방금 그거 뭐였어요?
유난히 피드 새로고침이 느리다 생각할 즈음 올라온 글이었다. 원은 그 아래 달린 반응들을 살폈다. 묘한 느낌. 저만 느낀 것은 아니리라.
ㄴ 아무런 일도 없던데, 오류 아냐?
ㄴ 괜히 놀랐어, 지금 기사 찾아보는 중.
ㄴ ‘다행히 1구역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말은 또 뭐야?
띄엄띄엄 달리는 글들. 새로 고칠 때마다 제자리 돌기를 하는 화살표.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칼까지 괜스레 신경을 돋구었다. 확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코끝에 간신히 걸친 금속 테 안경을 올려 쓰던 때였다. 낯선 게시물, 익숙한 아이디였다. 기억하기로, 그는 글을 잘 올리는 편이 아니었다. ‘오비완은 여름을 싫어해'. 작은 정사각형 안에 들어찬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조각. 저건 뭐야. 거대 로봇이라도 되나? 눈살을 찌푸리며 내려다본 곳에는 짤막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17구역. 뭐야 이게.
이상했다. 좀 더 자세히 보려 게시글을 누르자, 글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원이었지만,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안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한 2년은 되었나? 오래도록 서로 존재만 알고 지낸 사이인데 먼저 말을 걸어도 되려나. 고민하던 찰나 손은 이미 무언가 써 내려가고 있었다. 다이렉트 메시지. 역시 짤막한 문구.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폭발과 진동이 있고서 완의 방 한 면을 꽉 채우던 원목 책꽂이가 쓰러졌다. 두꺼운 21세기 풍 양장본 한 권이 완의 정수리를 치고 떨어졌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코앞에서 목도한 죽음과 폭발의 굉음, 먼지로 뿌옇게 변한 창문, 방안을 가득 채운 내용 모를 구겨진 텍스트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와중에 손에 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긴급 재난 경보? 일찍도 알려주네.
'17구역. 뭐야 이게.' 바삐 손을 움직여 SNS에 글을 올렸다. 정신이 멍했다. 기계적으로 책더미 사이를 헤집어 바지를 주워 입었고 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도 울리기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성이 뛰어왔다. 붕 떠 있던 완의 마음 한편이 안정되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괜찮냐, 방금 하늘에서 로봇팔이 떨어져서 비행기가 추락했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 짐 싸. 우리 여, 여기 못 있어. 빠, 빨리. 너 오디션 주, 준비한 거, 종이, 있어?"
성은 어느새 난장판이 된 집구석 곳곳을 돌아다니며 큰 캔버스 재질 가방에 에너지바와 옷가지, 탐폰, 비누, 현금 등을 챙겨 넣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좋아하지도 않는 오디션 자소서를 왜 찾는데? 뭐야, 정문 방향으로 비행기 떨어지던 건 봤어?”
대답 대신 ‘바쁜 와중에 무슨 헛소리냐’, 하는 듯한 표정이 돌아왔다. 완도 더는 캐묻지 않고 침대 밑의 오디션 접수증과 자소서, 연습 대본을 담은 파일과 휴대폰 원격 충전기, 보조 배터리 등을 챙겼다. 어느새 가방을 꽉 채우고 지퍼까지 잠근 성이 완의 팔을 잡아끌고 현관을 나섰다.
추락 직전 완의 창문을 지나고도 한참 더 지난 지점에 떨어졌는지, 마을 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의 길에는 먼지만 자욱할 뿐 비행기나 ‘로봇팔’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성과 완은 사람들 사이를 달렸다. 기분 탓인지 땅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완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끄는 성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완은 앞만 보고 뛰었다.
도착한 대피소에는 이미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익숙한 얼굴들의 단지 내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마자 성은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다며 완에게 가방을 맡겼고, 완이 잠시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동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추락을 목격한 사람은 완뿐은 아니었다. 완의 집 맞은편에 사는 아주머니는 비행기가 부동산과 편의점이 있는 단지 내 상가를 지나 단지 뒤로 이어진 논두렁에 처박혔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폭발 현장을 보러 가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있었음에도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구행성에 변두리 지역이기까지 한 17구역이지만, 우리 단지 건물들이 내진설계가 꼼꼼히 되어있어서’ 임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으나 몸만은 어느 정도 ‘현실로 돌아온’ 완은 다시 휴대폰을 켰다. 문자함에는 재난경보를 전해 들은 얕은 관계의 지인들이 보낸 형식적 연락이 몇 통 와 있었다. 포털 사이트를 확인했지만 ‘5.0의 강도 높은 지진에서도 우수한 내진설계와 대피시설 덕분에 큰 인명피해가 없었다.’ 는, 그대로 복사해 넣은 것처럼 똑같은 내용의 기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SNS를 하나씩 열어 확인했지만 17구역의 추락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집에서 재난 경보 문자를 받고 완이 썼던 ‘17구역. 뭐야 이게’ 는 사라져 있었다. 피드는 온통 다음 시즌의 오디션과 유명 작가 제의 라이브프린팅 신작 소설에 대한 평 뿐 이었다. 뭔가 정말 이상하지, 근데 그게 뭘까.
그 사이에 익숙한 아이디 두비에게서 온 디엠이 눈에 띄었다. ‘eat_sleep_doshits’. 두비였다. 탈지구 오디션을 대놓고 반대하는 두비 때문에 타임라인에서는 오디션의 언급조차 하지 않던 완이었지만 정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괜찮아요?'
숨이 막혔다. 지워진 내 글을 본 걸까? 대피소 안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쥐까지 나서 얼얼한 다리를 붙들고 겨우 몸을 이끌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수선해진 책상 위에는 방금 전의 큰 충격이 무색하게도 잠잠한 홀로패드 모니터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둥실 떠 있었다. 기가 책상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자 잠금화면이 켜지며 통화목록이 표시되었다. 성과의 전화가 끊겨있었다. ‘전파가 끊긴 건가?’ 기는 불안감을 안고 휴대폰으로 이것저것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통신망은 무사했다. 기의 키가 지금의 반만 했을 때던가, 중형급의 상당히 큰 지진이 났던 적이 있다. 그때는 진원지가 기지국의 바로 아래쪽이라 근방의 통신망이 죄다 마비되었다. 벌써 이전 세기의 일이다. 요새는 모든 기지국이 위성통신으로 교체되어 웬만한 자연재해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기는 상황 파악을 위해 뉴스 피드를 확인했다. ‘일부 구역에 지진이 일어났으나 큰 문제는 없다’는 식의 거의 똑같은 기사만 몇 개 올라와 있었다. 이상하게 SNS 피드를 모아서 보여주는 트렌드 카테고리는 잠잠했다. 그러나 이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핸드폰과 홀로패드 화면이 순간 빠알개지더니 재난문자가 도착했다.
13:12 [긴급 재난 경보] 구역 17 및 전 대륙 곳곳에 규모 5.0의 지진 발생. 빠른 대피 요망.
문자를 보자마자 기는 17구역으로 파견 나간 파트너 서를 퍼뜩 떠올렸다. ‘이럴 수가, 왜 하필 오늘이었나.’ 기는 파트너와 둘이 13구역의 크지 않은 빌라에 살며, 아침마다 함께 12구역으로 출근한다. 다만 기는 오늘이 쉬는 날이라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엄쉬엄 업무 정리나 할까 싶었던 것이다. 일찍 일어나 아침준비를 해주고, 오늘은 17구역까지나 가야 한다며 투덜거리던 서를 도닥여 키스해줄 때만 해도 이럴 줄을 전혀 몰랐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기는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리는 동안 초조한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다행히 서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기는 애써 울먹이던 것을 삼키고, 괜찮냐는 짧은 질문을 겨우 뱉어냈다. 서는 방금 일어났던 사태와 지금 와있는 대피소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서가 생각보다 꽤나 침착해 보여서 기는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불편한 건?”
“음, 사실 지금 생리 중이라 아주 편안한 상태는 아니야. 당장은 나가고 들어오는 교통이 완전히 끊겨서 전부 17구역에 발이 묶였고, 어떻게 될지 확신이 없어. 복구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 그래도 여기 다들 모여있고, 대피소장이 정부 관계자랑 구호단체 봉사자들이 곧 헬기로 넘어온대. 괜찮을 거야.”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은 뭐 있어? 전자기기는 뭐뭐 가지고 있어? 거기서 충전은 어떡해?”
“평소 들고 다니는 소지품들은 다 있어. 대피소의 물자도 충분한 편이고. 전자기기는 지금 업무용 홀로패드 하나랑 이거, 핸드폰 가지고 있고, 미세먼지 충전단자가 있으니까 배터리 문제도 크게 없을 거야. 너는 괜찮아? 이 정도 규모면 거기도 영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응, 아까 여기도 크게 흔들렸어. 좀 놀라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어. 지진이라면 일단은 집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지? 여긴 내진설계인지 뭔지 잘 되어있다고 하니까, 내 걱정은 많이 안 해도 돼. 계속 연락해줘. 뉴스도 확인하고 있을게. 몸조심하고.”
기는 애 타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하는 동안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리의 쥐도 풀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조금씩 나와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기는 창문에 기대서서 휴대폰으로 가까운 대피소 위치를 대충 확인하고 캡처를 해두었다. 책상 위의 5번 홀로패드가 계속 깜박이는 게 눈에 띄었다. 확인해보니 반탈지구연합 메신저 단체방의 알림이 쌓여있다. 1초에도 몇 개씩 새로운 메시지 알림이 생겨 시끌시끌하다.
여러 SNS 피드에서 17구역 관련 글이 올라가는 족족 삭제되고 있는 현상이 단체방 내부에서 보고되고 있었다. 중앙지부에서는 이 사태가 신행성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 구역마다의 현황 제보를 수집하여 자료를 만들고 긴급 기자회견과 SNS 라이브방송 송출 건을 분주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기는 얼른 일을 받았다. 중앙지부에서 내려온 언론사 연락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전화를 돌리는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언론사의 전화상담라인 뿐만 아니라 기자 개인번호까지 전부 통화대기 중이었다. 기는 통신망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문제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는 메일 작성을 시작했다. 수집된 자료를 넘겨받아 첨부하며 빠른 보도를 촉구하고 반탈지구연합 기자회견 일정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메일을 대여섯 통 정도 썼던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는 아까 커피를 올려두고 마시지 못한 게 불현듯 떠올라서 물을 다시 올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방을 가로질러 걷던 중에 다시 세상이 쿵, 하고 흔들렸다. 아까보다도 더 큰 충격이었다. 기는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으나 겨우 좌탁을 딛고 일어났다. 좌탁 위의 커피포트가 엎어지며 물이 쏟아졌다. 잠옷 치맛자락 끝과 실내용 슬리퍼가 물에 젖었다. 와중에 아까처럼 펄펄 끓는 물이었으면 큰일 났을 거라 생각하니 기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주저앉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니 아까보다 거리에 사람이 많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붕붕 대는 통에 거리가 번잡하다. 기는 홀로패드를 접어들며 짐을 미리 싸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이 웅웅 울린다. 기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다. 서에게 문제가 생겼나 생각한 것도 잠시, 액정에 뜬 이름은 성이었다.
순간적으로 굳었던 어깨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이 풀렸다. 17구역에서 중심적으로 일어난 일이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가 17구역에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거기도 내진설계가 잘 되어있다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침착하자, 벌써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계속 울려대는 알림에 손짓으로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켜고 바닥에 떨어진 난장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기입니다.”
배경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소음에 성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려요? 들-----려요?]
“네, 들려요. 거긴 괜찮나요?” 수화기 반대편의 배경 소음이 잠시 멎고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의 가쁜 숨소리가 더 확실하게 들렸다. 카펫을 적신 물을 닦아내던 손길이 문득 멈췄다.
“성, 지금 17구역이에요?”
성이 17구역 사람이었나? 기는 황급하게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고, 처음 12구역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이후 인터넷이나 통화상으로만 연락을 나눴으니 알 리가 없다. 아무리 좋은 관계가 아니더라도 재난 경보가 뜬 지역에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서도 지금 거기에 있을 텐데-
[네, 네-그런데 그건 지, 지금 주-중요한게-아니고-요] 턱턱 끊기는 성의 목소리로 보아 뛰면서 통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탈지구 오, 오디션 반대 서명-] 반대편에서 성이 작게 욕설을 뱉어냈다. [반대 서명 링크! 오, 오디션 세, 센터 앞에서 시위하기로 한 거! 그, 그거, 지금 보내줄 수 있어요?]
이 판국에 프로젝트 링크를 달라니, 그것도 아이디어 기획 단계에서 시원찮은 반응을 보인 성이 할만한 부탁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이유를 물었겠지만, 답지 않게 직설적인 성의 태도에 군말 없이 홀로패드를 다시 열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서명 링크와 공지사항이 전달되었다.
“보냈어요. 아직도 17구역이에요? 혹시 지금 대피소에요?”
[지, 지금은 대피소 아니고 -비켜봐요, 좀!- 이, 이 링크, 오디션 자, 장소 정확한 주, 주소랑 경로 나와 있는 거 맞죠? 1구역 주, 중앙구에 있는 CCBS 거기?]
“네, 그렇긴 한데-성씨, 무슨 일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기!]
그 말과 함께 돌연히 통화가 끊겼다. 기는 멍하게 꺼진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속속히 뜨기 시작했다.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들이 쌓여갔다. 쉴새 없이 뜨는 단체방의 메시지, 반탈지구연합 건에 대한 답장 메일, 그리고 재난 경보 업데이트와 뉴스 속보까지. 어지럽게 떠오르는 알림으로 인해 휴대폰 배경으로 설정해둔 서의 얼굴이 가려졌다. 작년 이맘때쯤 9구역의 해변에 갔던 날, 윙크한답시고 두 눈을 꼭 감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기는 두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17구역에 대한 SNS 피드가 일괄적으로 삭제되고 있다. 17구역에 서가 있다. 지금 닿을 수 없다. 프로젝트는 계속되어야 한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모두 나의 반응을 지켜볼 것이다. 내가 당황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패닉 상태에 빠질 거야. 자, 정신 차리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이 지웠다고?
조금 텀을 두고 도착한 ‘오비완’의 메시지가 생각보다 더 심상치 않다. 원은 다시 포탈을 새로고침 한다. 여전히 기사 대부분은 지진에 대해 떠들고 있다. 방금 원이 목격한 검은 판은커녕 ‘오비완’의 피드에서 스치듯 보았던 추락한 파편 사진과 관련한 이야기 또한 하나도 없다. 원의 직감은 지진이 아니거나, 혹은 지진만이 전부가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 금방 평온을 되찾은 사무실을 고개만 들어 둘러보다가 휴대폰을 쥔 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까운 자리의 시선 몇 개가 따라붙었다가 금방 떨어진다.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선다. 어두워진 화면을 터치해 깨우고서 다이렉트 메시지 창을 띄운다.
대피는 했어요? 제대로는 못 봤지만 사진 보니까 뭐가 무너진 것 같던데.
구역 1에서도, 까지 덧붙이던 손이 멈춘다. 그 문장을 지우고 메시지를 전송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흡연구역으로 향한다. 회사 건물 거의 바로 뒤편으로 판 하나가 떨어졌으니 현장을 찾는 데에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무엇을 확인하려고 하는 건지, 무엇이 의심스러운 건지 원 본인도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든 이상 원은 움직여야 했다.
로비층에서 내리고 보니 사무실과 다르게 제법 어수선한 분위기다. 흡연구역과 연결된 뒤편 출구 바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원도 그쪽으로 가 보니 예상한 대로 바로 앞에 판이 추락해 있다. 경찰들이 주변을 둥글게 가로막고 있어 가까이 가거나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를 볼 수는 없지만 추락한 판을 치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중장비가 판을 들어올리면서 판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하고 넓적한 검정색 판의 끄트머리. 뭔가 반짝인다. 뭐지? 글자 같기도 하고, 문양 같기도 하고. 꽤 거리가 있어서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중장비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좀 더 명확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드러난다.
웅-
휴대폰의 진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던 원을 흔든다.
댚 ㅣ ㅈㅇ 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가 오비완으로부터 도착해 있었다. 괜찮아요? 원은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 창에 물음표까지 입력했다가 금세 지워냈다. 깜빡이는 커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은 결국 형식적인 걱정일 뿐이란 걸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비완의 상황이 괜찮지 않을 거란 건 너무 훤했다. 그는 그런 것보다도 뭔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고민하던 원은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선 바지 주머니 속으로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중장비는 판을 들어 올리던 상태로 멈춰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경찰이 판 주위에 쳐놓은 경계를 완전히 에워싸고도, 그 사이를 비집으려 애썼다. 저마다의 목소리가 섞여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싶어 했다. 믿고 싶지 않은 일들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원은 순식간에 불어난 인파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지 않으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중장비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판은 가히 거대하다고 할 법했다. 그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것은 오래 쳐다보면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검은색 판에 하얗게 칠해진 선들. 얼핏 보면 오래도록 발견되지 못한 고대문자 같기도 했다.
짧은 찰나 동안 몇 개의 문양이 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 행성 프로젝트가 최초로 세계에 발표되었을 당시의 그 로고, 이후 파장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진 루머, 그 루머 중 하나였던 로고의 몇 가지 초기 버전, 지구에 남은 사람을 구원한답시고 진행한 탈지구 오디션 프로모션에서 변형되어 발표한 로고……. 원은 신행성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의 기억을 또렷하게 갖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일련의 문양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판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몇 번이고 지웠다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판의 끄트머리에는 온갖 선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엉망으로 벗겨진 모양새 때문에 뚜렷한 문양은 아니었지만, 이 거대한 판이 어떤 방식으로든 신행성의 것이란 사실은 틀림없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기는 밀려드는 알림 확인을 아주 잠깐 미루어 놓고 홀로패드에서 어플 하나를 실행했다. 설정한 범위 내에서 특정 키워드가 언급된 게시물이나 댓글 등 모든 종류의 정보를 전부 아카이빙하는, 반탈지구연합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프로그램이었다. 외부에 유출해서도, 다른 용도로 이용해서도 안 된다는 내부 규약까지 걸려 있을 정도였다. 관리자 암호를 입력하고 단체 방에 통보하듯 메시지를 보냈다. 17구역 관련 게시물 삭제되고 있는 건 제가 모니터링하겠습니다. 사적인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기에게 그 정도 선택은 정당했다. 누구도 완전히 공익만을 위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프로그램에 “17구역” 키워드를 넣어 놓고 기는 고민에 빠졌다. 사진이나 영상의 일부까지 확인하려면 정확도가 높아지는 대신 삭제되기 전의 기록을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문자 정보만 걸러내면 자료의 양이 너무 방대해져 필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17구역에 있다고 하는 성의 다급한 음성과 평소 같지 않은 부탁. 탈지구 프로젝트가 비윤리적이라는 가치 판단보다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직관이 앞섰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켜 놓은 지 수십 분이 지났다. 다행히 진동이나 충격이 이어지지는 않아 팀원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등의 업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고 기계적으로 지나갔다. 겨우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홀로패드를 확인했다. 17구역 내에서 송신된 데이터는 주로 SNS에 현장 사진이나 상황을 올리는 게시글이었고 대부분이 삭제되어 있었다. 반대로 17구역 밖에서 송신된 데이터는 지진이 있었다는데 큰일이 아니었다니 다행이다, 하는 댓글 정도만 올라온 채로 남아 있었다. ‘관련 없는 자료를 제외하시겠습니까?’ 하는 안내창을 한참 보고 있다가 보이는 것 바깥에 진실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삭제하는 대신 따로 모아 놓고 보자 17구역에는 지진 외에도 로봇 팔이 비행기 한 대를 감싸고 추락한 사건이 있었다는 문장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왜 이 소식을 알리지 않지? ‘5.0의 강도 높은 지진에서도 우수한 내진설계와 대피시설 덕분에 큰 인명피해가 없었다.’ 다급한 목소리의 성을 떠올렸다. 큰 피해가 없는 상황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홀로패드에 켜 놓은 채 휴대폰으로 검색 엔진을 켰다. 비행기 실종, 비행기 추락, 로봇팔, 실종자 명단. 굵직한 키워드 몇 개를 추려 검색을 이어나가자 상상하지 못했던 이름들이 보였다. 이번 일과 직접 얽힐 것 같지 않았던,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 오늘 신행성으로 떠날 예정인 제2회 탈지구 오디션 선발자들의 이름이었다.
경찰이 기어이 구경꾼들을 흩트려 놓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입맛을 다시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원만 제외하고. 아까 보았던 신행성 프로젝트의 문자가 뇌리에 박혀 원의 시야를 내내 떠다녔다. 그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홀로패드를 쥐었다가, 놓고 대신 머그컵을 들다가, 그것마저도 다시 놓았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가 몇 갠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 문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판에 새겨져 있었는가? 그 판은 대체 무엇인가?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하필 이럴 때만 불길한 직감이 고개를 쳐든다. 몸의 신호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원은 이를 신경 쓰는, 오히려 맹신하는 축에 속했다. 온갖 좋지 않은 생각들이 점점 빨리 도는 쳇바퀴처럼 머리를 점령하더니 결국 심장이 두근거리고 뱃속이 울렁거려서 원은 서랍에서 안정제를 찾았다. 불길한 생각에 한번 강박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면 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결국 공황 발작까지 가고 마는 오래된 병이었다. 꾸준히 약을 먹고 치료를 병행하여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나 옅은 수준의 증상과는 평생 같이 살아야 했다. 원은 약을 삼키고 물을 몇 모금 더 넘긴 후 의자에 길게 늘어졌다.
그때 원의 머리에 번뜻 한 단어가 스쳤다. 불안과 강박.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통원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이 증상 때문이었다. 한때 저장 강박증까지 있었을 적에는 제 방을 다 헤진 옷, 너덜거리는 베갯잇, 고장 난 홀로패드, 쓸데없는 파일 때문에 용량이 꽉 찬 디스크로 가득 채우고 또 채웠더랬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리고 그때 집착했던 정보의 목록 중에는 신행성 프로젝트도 있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불안 장애도, 강박적 저장 증세도 조금씩 나아져서 쌓아두던 쓰레기들도 같이 버렸으나 방대하게 아카이빙해둔 몇몇 자료만큼은 아까워서 추억을 전시하듯 벽장에 모셔두었던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이 불길함의 정체에 대하여.
그리고, 신행성 프로젝트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뭐, 뭘 그렇게 보, 보고 있어?"
아무렇게나 꾸려진 가방 속을 뒤지던 성이 대피소에 들어와 처음으로 던진 한마디였다. 물론 그사이에도 갈퀴질하듯 헤집으며 ‘아, 먹을 것을 조금 더 싸 와야 했는데.’, ‘비누를 내가 챙겼던가?’ 따위의 말을 중얼이기는 했다. 그러므로 방금의 말은 성이 제 옆에 앉아 연신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는 완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생사가 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에도 마냥 태연한 듯 보이는 그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성이 바라보는 완은, 조금은 대책 없어 보여도 항상 어딘가 단단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만 궁금했다. 말을 하느라 멈춘 손이 다시 깨작깨작 움직였다. 오랜 습관이었다.
완이 성의 질문을 알아듣기까지, 성은 두어 차례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저들처럼 경황없이 밀려온 사람들이 쌓아놓은 소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똑같이 목소리를 높여 답하려던 완은, 잠시 고민하더니 들고 있던 핸드폰에 무언가를 쓴 뒤 성에게 건넸다. 소음을 뚫을 효과적인 방법임과 동시에, 더 빠르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성의 경우엔 그랬다. 한시도 손에서 떨어진 걸 본 적이 없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인스타그램의 디엠 창이었다. 괜히 반가웠다. 최근의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관심이 없었던 성도 인스타그램은 모르지 않았다. 이걸 아직도 하네. 스크린에는 짧은 대화가 올라와 있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올려보아도 그만큼이 다인 게, 둘만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괜찮아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완의 알 수 없는 말로 어물쩡하게 끝이 나 있었다. 자판 위를 바라보니 채 보내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성은 그것이 저더러 읽으라는 문장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시각 원은 컴퓨터 앞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컵을 매만지고 있었다. 빛나는 스크린에 글자가 몇 줄 채워져 있었다. 마우스 커서는 ‘전송' 버튼 위에 놓인 채, 손가락 한 번이면 단숨에 보낼 문장들을 바라며 깜빡였다. 원은 눈을 감고, 시린 형광등 불빛에 번쩍이던 붉은 기 도는 머리칼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시에 건조한,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말투가 떠올랐고, 원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왜.’ 같은 질문은 한 시간 째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면 모든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원은 자신을 심적으로 괴롭히는 지난 몇 시간 사이의 사태에 대한 확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장을 받을 사람은 누구보다도 신행성 프로젝트에 대한 식견이 높은 자였다. 제법 강단진 의견을 낼 줄도 알았으며 행동 또한 빠른 편이었다.
엄청난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도리어 힘겹게 끌어안아왔던 일을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요. 이 부탁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요, 그게 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만 부탁할게요. 원은 단지 잠금만 풀어주면 돼요. 나머지는 알아서 할게요.
일주일 정도 전에 온, 짧고도 강한 문장. 원이 보기에는 여전히 무모한 기였다. 그는 자신의 정보를 바랐고 저 또한 그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이 망설임을 거듭하는 이유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도망치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기 전에 얼른 전송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당장 내일 기는 CCBS 건물 앞 반탈 시위에 설 것이었고, 자신은 갈 수도 없을 것이었다. 오늘의 사고, 그리고 갈수록 의뭉스러워지는 신행성 프로젝트의 속을 읽어내는 데 제 아카이브가 필요하다면 더 고민할 수 없었다.
사무실은 업무 이야기뿐이었다. 너무나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원 역시 신행성 아카이브고 뭐고, 사무실의 다른 사람들처럼 관심을 끄고 싶었다. 메일 창을 밀어두고 업무로 관심을 돌리려는 순간, 꺼둔 홀로패드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다시 메일 알림이었다. 벌써 기의 답이 도착했나 하고 발신자를 확인한 원은 생각도 못 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발신자 : 제
제목 : 야 당장 봐라
원과는 연락을 끊은 지 오래인, 친-탈지구 작가 제였다. 메일에는 37초짜리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당장 재생하지는 않았지만 멈춘 화면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원의 아주 어릴 적 기억에 있던 21세기 풍 건물이었다. 기억 속의 밝고 선명한 건물들과 달리 화면의 배경은 어둡고 더러워 보였다. 건물 옆으로는 흐릿한 인간의 형체도 보이는 듯했다.
원은 홀로패드를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칸에 들어가서야 이어폰을 꽂고 영상을 재생했다.
기는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고 창틀에 기대서 담배를 피웠다. 서가 담배 냄새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둘이 같이 살게 된 이후에는 담배를 거의 끊었지만, 머리가 복잡하면 가끔 찾으려고 서랍 한쪽에 늘 한 갑을 넣어두었다. 서도 그 정도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래된 담배라 쓴맛이 강하지만, 잠시나마 기분이 환기되는 데는 도움이 되는 듯했다. 아래층은 시끌시끌했다. 기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문자 수신함을 연신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원의 답장을 속으로 되뇌였다.
14:41 답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회신합니다. 메일 통해서 클라우드를 공유해둘 테니 확인 부탁합니다. 자료는 외부 공유나 배포를 해도 괜찮지만, 대신 내가 했다고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14:42 반탈 사람들이랑 같이 있나요? 거기는 무사한가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기억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는 담배 연기를 삼키며 오랜 친구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
“반신련을 그만둔다고요?”
“사무국장님이랑도 얘기된 상태예요. 이것과 병행하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어려울 것 같아요.”
원의 사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그가 이 일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지는 한참 되었다. 그러던 참에 먼저 출판업계에 가 있던 제가 자리를 소개해주었고, 원은 이 제안이 상임활동가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라 생각하여 붙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원은 기가 반신련, 그러니까 반-신행성연대 국내 지부에 처음 들어온 작년부터, 한참을 함께 일해왔다. 기는 열정적이고, 어리지만 자신의 일과 신념에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원은 기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전을 떠올렸고, 그가 잘 적응할 수 있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줄곧 곁을 지켜주었다. 기는 그런 원을 잘 따랐고, 원도 기를 보며 많은 힘을 얻었다. 사실상 원의 반신련에서 보낸 마지막 몇 개월은 기가 아니었으면 없었을지도 몰랐다.
“담배 피우고 올게요.”
“우산 챙겨가요.”
급히 밖으로 나가는 기의 뒤에 원이 따라붙었다. 기는 짐짓 모르는 체 하며 사무실 뒤쪽 흡연구역으로 빠져나왔다. 원이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주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라 유난히 담뱃불이 잘 안 붙지 않았다. 원은 담배를 하나 달라는 손짓을 했다.
“담배 안 피우잖아요.”
“나도 폈었어요. 활동가로 살면서 어떻게 담배를 전혀 안 피우겠어요.”
원은 농담조로 답하더니 기가 건넨 담배 한 개비에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는 기가 입에 문 담배에도 불을 붙여준다. 그리고는 라이터를 돌려주며, 다시 입을 연다.
“사실 굉장히 오래 고민한 문제고, 가능하다면 지금이 손을 뗄 적기라고 생각했어요.”
원은 담배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눅눅한 여름비만큼이나 연기도 눅눅했다. 그는 담뱃재를 툭툭 털며 말을 잇는다.
“사실 신행성이 런칭된 직후에도 그만둘까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거대한 국제 자본권력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고, 많은 친구들이 반신련을 떠났죠. 그때 나도 가고 싶었어요. 주변을 둘러싼 상황들이 벅차게 느껴졌거든요. 패배라고 생각하지 말자고, 이제 시작이라고 함께 얘기했지만, 그렇게 쉽게 털고 일어날 수는 없더라고요. 그러나 떠난 만큼 새로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왔고, 그들 덕에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정말 나도 전환이 필요할 때예요. 더 망가지기 전에.”
기는 묵묵히 연기만 내뱉었다. 빗줄기가 우산에 거칠게 떨어졌다. 기의 앞머리에 맺힌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직 반신련을 그만둔 이후의 삶이 잘 상상가지 않아요. 대학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벌써 십 년도 넘었죠. 내 인생에서도 큰 결정이었어요. 아예 외면할 생각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네요.”
“그렇게 오래 고민한 거였으면 나에게도 이야기해 줄 수 있었잖아요. 내가 서운한 부분은 그쪽이라고요. 하지만 원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해요. 내가 감히 말릴 수 없을 거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기는 축축하게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애써 차갑게 말했다. 원이 기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기는 활동 계속 할 건가요.”
기는 담뱃갑을 계속 만지작대다 원의 질문에 굵은 글씨로 크게 적혀있는 문구를 흘긋 바라보았다. 담배는 중독과 수명 단축을 유발합니다.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하고 싶어요.”
.
“앗 뜨거.”
담뱃불이 필터까지 타들어가서 손을 데이고 나니 정신이 반짝 들었다. 지체해서 좋을 건 없다. 기는 담배를 창틀에 비벼끄고 무의식적으로 꽁초를 아래로 던졌다. 아차,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꽁초가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거 하나 줍자고 내려갈 순 없는데. 기는 하는 수 없이 창문을 닫았다.
기는 책상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원의 문자에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14:50 감사합니다!!!
14:50 오늘은 휴일이라 집이었습니다. 충격은 꽤나 컸는데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요. 원은 괜찮나요? 지금 1구역인가요? 일단 그쪽 집회 정보 공유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필요한 정보라도 있나요?
기는 2번과 3번 홀로패드에 반-탈지구 아카이빙 프로그램과 원의 자료를 나란히 띄워두고 찬찬히 뜯어보았다. 가지런히 분류된 기사자료와 복잡한 코드들, 그리고 신행성의 사진들. 기는 원의 자료에서 탈지구 오디션 비공식 스폰서 기업들의 목록을 발견했다. 여러 유명 기업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책을 발행하기만 하던 출판사에서 확장되어 이제 자체적으로 월정액 전자책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도, 국내에서 시작되어 거대 다국적 문화산업 유통체로 성장한 기업도 보였다. 각각의 후원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많은 돈을 지원하는가? 기는 책장에서 노트를 들고 와 자료를 토대로 사건 전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톡 두드리며 마우스를 분주하게 딸깍이던 중,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원에게 온 문자였다.
14:56 이거 확인해봐요.
14:56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자 백여 년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의 낡은 건물을 공중에서 바라본 장면이 펼쳐졌다. 영상 속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와 대조적으로, 회색 시멘트 외벽의 건물 분위기는 어딘지 서늘하고 우중충한 인상을 주었다. 건물 옆으로는 사람이 몇 지나다니는 게 보였고, 카메라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눈을 피해가며 건물을 한 번 비잉 돌더니 열려있는 창문을 찾아 조심스럽게 건물 내부로 잠입해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공장 기계음이 기괴한 화음처럼 섞여 들렸지만, 안은 상당히 어두워서 정확하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카메라는 더 안쪽으로 들어와 디지털 파일철이 여럿 꽂혀 있는 책장 선반 위에 안착하여 은은한 불을 비추었다. 두꺼운 파일에는 하나하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제1회 탈지구 오디션 선발자들의 이름이었다. 드론은 작은 잭을 꺼내 파일의 아래쪽 연결구멍에 꽂아 넣었다. 화면에는 연결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네트워크 전송 상태가 나타났다. 0%.... 9%..... 14%.... 27%.... 기는 숨을 죽이며 화면을 응시했다. 52%.... 65%.... 뒤에서 작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송 수치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81%... 93%......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와장창! 하고 금속이 무너지는 큰 소리와 함께 화면이 뚝 끊겼다.
기는 파일 속성에 들어가 영상 촬영기기를 확인했다. 기기 모델은 초소형 무소음 드론 UX-AC08로 쉽게 확인되었다. 기는 원의 클라우드와 반-탈지구 아카이빙 자료에서 UX-AC08모델로 전체 검색을 돌려, DRM잠금이 걸린 알 수 없는 확장자의 파일이 하나 찾아냈다. 기는 반-탈지구 디지털 전담반에 원에게 받은 영상과 새로 발견한 파일을 전송해두고, 의자에 머리를 꾸욱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기는 다시 펜을 들고 시곗바늘이 어느 정도 움직이는 지도 모르는 채 노트에 자료 정리를 계속했다.
16:01 요청하신 파일, DRM 해제해서 다시 보냅니다. 끝부분이 깨져있어 온전한 복구는 어렵습니다. 방금 자료는 본부에도 보내두겠습니다.
잠금 해제가 된 파일은 드론이 전송하던 자료였다. 자료를 확인하는 기는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기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집어 올렸다. 모든 경위가 들어맞았다. 신행성은 과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지속가능성이 낮다고 관측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많은 부자와 유명인들이 입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 있었다. 신행성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생명공학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탈지구 오디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생체 표본 수집이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결국 이 잔인한 계획의 희생양이 될 실험 대상을 대대적으로 모집하는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료에는 오디션 선발자들이 각각 어떤 신행성 사람에게 배정되었는지가 코드명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기는 차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의 여러 사람과 사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심한 멀미가 나듯이 속이 메스꺼웠다.
[고마워요, 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탈지구 오디션 정보를 묻던 성의 목소리가 머리를 뎅 울리는 듯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던 거지.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는 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한참 울리더니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는 안내멘트가 들렸다. 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런, 서에게도 연락해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하지만 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묻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폰 화면을 바라보는 성의 표정은 완이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그으래….. 그래서 이, 이게 왜?”
완은 눈을 부릅뜨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시 잘 읽어봐, 라는 강조하는 의미로.
사실 두 번째로 작성하는 글이다. 성을 기다리는 동안 할 것도 없겠다, 대피소 사람들의 목격담을 듣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모은 정보를 메모장에 기록하고 있는데 다시 땅이 흔들렸다. “여진일 거야”, “괜찮아”, “원래 지진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라며 주변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안을 건넸지만, 완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분 동안 폰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어야 했다. 17구역의 내진설계를 자랑하던 아주머니도 입을 다물고 두 손을 꽉 쥐어 잡았다. 정상적인 속도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완은 다시 폰을 꺼냈다.
여진 때문에 폰 화면이 제멋대로 눌렸는지 메모장 대신 디엠 창이 열려있었다. 키보드를 마구잡이로 눌렀는지 두비에게 외계어가 보내져 있었다. 메세지 창을 닫고 타임라인을 흩어보았다. 새로운 게시글은 계속 쌓였다. 신행성 꺼 아니야? 새로고침하니 없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 로고 본 사람?? 탈지구 아님?? 없어졌다. 17구역 XX 쪽 아예 접근금지 됐네요. 새로고침. 없다.
SNS를 닫고 뉴스 페이지를 열었다. 여진 소식은 뉴스에 뜨지도 않았다. 지진 얘기로는 가장 가까운 16구역 상점가에서 진동으로 유리가 깨지는 영상, 7구역에서 일어난 연속추돌 사고, 9구역의 해일 가능성에 대한 우려, 1구역에 떨어진 태양관 판 추락 사고. 사람들의 고통을 비교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인구 밀집도도 높고 지진의 핵심 발생 지역이라는 17구역 소식은 왜 속보로 뜨지 않는 건지.
한숨을 쉬고 글을 다시 적어나갔다. SNS 게시글이 삭제되는 경위, 직접 본 것과 대피소 사람들에게서 들은 간접적인 목격담을 포함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그토록 기다리던 성이 헐레벌떡 돌아왔을 때도 휴대폰에서 손과 눈을 뗄 수 없었다. 글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췄다는 만족감이 들었을 때 성에게 보여줬다. 상황 파악을 하라고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나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런 시큰둥한 반응을 보려고 귀중한 데이터를 써가면서 뉴스와 SNS를 뒤진 게 아니다. (대피소 와이파이는 너무 느렸다.) 완이 보는 성은 꼭 이럴 때만 자기 생각에 휩싸여서 큰 그림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완은 답답함에 폰을 내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행기 추락한 건 뉴스에 하나도 안 나오고! 내가 올린 글도 갑자기 내려가고! ‘17구역’이라 치면 실시간 게시물은 뜨는데 새로고침해도 안보이고! 다들 신행성이랑 관련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그것도 다 없어지고 있다고!” 대피소 어딘가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서 더 시끄러워지자 성의 어깨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상하다는 게 안 보여? 위에서 17구역 소식 묻어버리려는 거라니까?”
성이 눈알을 굴렸다. “어, 언니…는 이 와중에도 SNS에 그, 글 올려?”
“아니, 지금 그게- ” 완의 가슴팍에 성의 가방과 L자 파일이 안겨졌다. 파일 안에는 완의 오디션 자소서, 공지사항, 제출할 서류, 처음 보는 지도와 성의 비상 신용카드와 현금이 담긴 봉투가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뭐야?”
성이 완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1구역 오, 오디션장. 가자.” 성은 완이 제대로 된 반응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대피소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완은 손이 그대로 잡힌 채로 끌려갔다.
“이 상황에서 오디션은 무슨 오디션- 잠깐, 좀 천천히 걸어봐- 나 올해는 이름만 넣어보고 4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알바 구한다고-”
“그, 그건 올라가서 생각하자. 내 쪽 사, 사람들 시, 위한다고 교통편이랑 수, 숙소 같은 거 다 잡아놨어. 바, 방금 나도 시, 신청해서 정확한 시간이랑 경로 정보 바, 받았고 우린 모, 몸만 가면-”
“지진 났는데 어떻게 간다는-”
“16구역은 아직 대중교-대중교통 있어. 이, 입구까지만 가면 거기에는 버스-”
“이 상황에서 오디션을 할 리가-”
“오디션 취, 취소될 거면 이미 헤드라인 떴-”
“이거 때문에 자소서 챙기라 한 거야?” 답이 없다. “언제는 내가 가는 거 싫다며? 싫어서 반탈 한거잖아!”
오늘 하루 동안 평생 겪을 이상한 일은 다 겪은 듯한 완이였다. 갑자기 지진이 나지를 않나, 비행기가 추락하는 걸 정면에서 보지를 않았나. 하지만 세상이 정말로 180도 뒤바뀌었다는 생각은 지금, 낯선 성의 모습에서 처음 느꼈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항상 일관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성이다. 허황된 꿈은 믿지 않는다며, 탈지구 오디션 따위엔 코웃음 치고 두 손에 쥘 수 있는 종이책만 고집하는 구시대적인 그런 사람이다. 그런 성이 오디션장으로 가자 하고 그걸 완이 말리는 이 광경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현실이었다.
“대피소 돌아가자, 응? 밖에 있으면 위험해. 지진 멈추면 집에 돌아가서 다시 얘기해보자, 응?” 성이 자기가 하자는 대로 곧이곧대로 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구슬려본다.
“집에 모, 못 돌아가.” 여태 침착했던 성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우리 집에도 파, 파편 떨어졌어.”
머릿속을 휘감던 수많은 질문들-
반탈을 이용해서 탈지구 오디션에 참가하다니 이런 배신이 어딨냐, 프로젝트 사람들은 아냐,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냐, 바로 오디션에 붙을 리가 없지 않냐, 만약 내가 합격해도 너는 어쩌려고 그러냐
-이 모두 사라졌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기존의 신념을 저버리더라도 한 줄기 희망에 얼마나 매달리게 되는지. 신기루임을 알면서도 쫓아가는 이유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인가.
“일단 1구역만 가면 여, 여기보다는 안전하, 할 거라고.” 성이 중얼거렸다. 완의 손목을 잡은 성의 손바닥이 축축하다. 반대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화면이 켜졌다. 대피소에서 적은 메모 화면이 밝게 빛난다. 그렇게 열심히 적었는데 결국 쓸모가 없게 되었다. ‘삭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나 퍼뜩 드는 생각에 버튼을 누르는 대신 디엠 창을 다시 열었다. 될 대로 되라지. 완은 두비와의 대화에 메모장의 기록을 모두 복사해 보냈다. 삭제되었던 첫 게시물의 로봇 팔 사진도 잇달아 보냈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먼지 속을 향해 성과 함께 걸어 들어갔다.
기는 고개를 파묻은 채 원의 자료 속에 있던 신행성 사진들을 생각했다. 신기한 점은 신행성 자체의 사진보다도, 신행성에 연관된 지구 사진이 훨씬 많다는 거였다. 그는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내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아카이빙 자료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원의 자료를 종합해봤을 때, 신행성은 이미 그 자체부터 적합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은 행성이었다. 관계자들은 어영부영 태양광 에너지를 통해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홍보했지만, 그 에너지를 적절히 이용하기에 행성은 태양과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들이 말한 대로 행성 위에 태양광판을 설치했다가는 전부 타버리고 말 터였다. 이에 신행성이 내린 선택은 지구였다. 폐허가 된 지구가 누구도 살 수 없을 만큼 황폐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여전히 완벽한 위치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신행성은 지구에 태양광판을 설치하고 신행성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한 채 신행성까지 안전하게 에너지를 보급하도록 떠받치고 있는 장치 중 일부가 로봇팔이었다.
이 모든 건 ‘위대한 기술의 발전을 통한 무한한 에너지의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실상은 그렇게 해서 얻는 에너지보다 무분별하게 설치해야 했던 로봇팔을 비롯한 유지 장치의 비용이 훨씬 컸다. 결과적으로 신행성의 자원은 매번 부족했다. 신행성 입주자의 자본을 통해 버티는 것도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낡고 오래된 지구의 땅 위로, 지구에 남은 사람들 눈앞으로, 로봇팔과 태양광판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부터, 아니면 우리 눈앞에 보여서는 안 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신행성의 붕괴는 시작되었다. 그게 하룻밤 사이에 전부 무너질 일은 아닐지라도, 일단 떨어져 내린 판이 제공하던 에너지 공급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모든 공급원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에도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신행성인데, 이젠 그마저 제대로 공급되지도 않고 있다니. 신행성이 얼마나 아수라장일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는 숨이 턱 막혀오는 듯했다. 이 모든 걸 알려야 해. 반탈 시위에 들고 갈 자료를 챙기는 손이 바빠졌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는 발을 옮겼다.
원은 제가 보내준 영상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제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사실 원은 도망치고 싶었다. 둔탁한 금속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듯한 소리로 끝나버린 영상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짓으로 꾸며진 신행성 프로젝트와 탈지구 오디션으로부터, 아니면 그 실체를 알게 된 자신으로부터,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게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로부터?
‘나 탈지구 오디션에 뽑혔다. 연락 안 하고 지낸 시간이 우습지만 그래도 당장 떠오르는 게 너더라. 너 반신련에서 활동했었잖아. 아직도 그런 일 하냐? …’
제로부터의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구구절절 쓰인 장문의 내용에서 그는 선발자가 모여 있는 공간에 있다고 했다. 합격 발표 이후 선발자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그러나 홍보에 비치는 모든 밝은 얼굴과 미소는 딱 합격 전까지의 일이었다. 선발자들은 각자의 상황과 사정 속에서 실종된 채 이 공간으로 집합 당했다. 그곳에선 외부인과의 접촉이 전부 차단되었다. 반나절 만에 휘황찬란한 ‘신행성’ 의 신화는 무의미해졌다. 그들은 단지 생체 표본으로만 취급당했다.
메일을 읽으면서 원은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삶을 꾸려가던 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멍한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마 외부에 무슨 큰일이 생겼나? 아침까지만 해도 잔뜩 군기 잡힌 사람들한테 물건 취급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관리인들은 전부 나가버렸고 사람들은 온갖 군데를 다 헤집어서 뺏겼던 핸드폰 찾고 이제 그것만 붙잡고 있다. 사람들이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는데 아직 아무도 여길 나갈 방법은 못 찾았어. 계속 잡혔다가 끊기는 위치는 CCBS로 나오는 것 같은데 이 메일도 제대로 전송될지 모르겠다. 난 이 상황을 누구에게라도 전해서 최대한 멀리, 가능한 한 넓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냥 내 안부나 전할까 해서 …’
원은 메일의 막바지를 눈으로 훑으면서 스스로의 움직임을 인지할 새도 없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일단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땀이 쥐어진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는 걸음을 빨리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비완으로부터 온 메시지들이었다. 그에게 닥친 상황에 대해 각종 사이트와 SNS에서 수집해온 듯한 내용이 메시지 안에 정돈되어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17구역 관련 이야기가 사라지는 속도를 생각해보면 이 내용을 전부 정리해 보내왔다는 게 놀라울 만큼이나 자세한 설명이었다. 원은 빠르게 메시지를 읽어내리곤 첨부되어온 사진을 클릭해 확대했다. 살짝 흔들린 채로 찍힌 로봇팔이었다. 닮은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아까 사람들 틈에서 확인한 검정색 판이 즉시 떠올랐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전부 신행성의 것이었다. 붕괴하는 신행성, 납치한 생체 표본을 무방비 상태로 두고 떠난 관리인들… 원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반탈 내에서는 오늘 있었던 비행기 추락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곳에는 탈지구 오디션의 두 번째 선발자들이 타고 있었다는 점, 17구역의 지진 관련 소식은 물론 지진과 무관한 사고들이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는 점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기의 아카이빙 프로그램은 데이터가 쌓여 갈수록 삭제된 SNS 게시글을 거칠게나마 정리해가고 있었다. 기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렇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받았다는 자료를 공유받은 반탈에서는 곧바로 기자회견과 시위 일정을 공지했다. 가능한 사람은 최대한 참석해 달라는 공지가 전체 연락망을 통해 퍼졌다. 동행인 한 명과 함께 참석한다는 성의 답신, 곧바로 출발한다는 기의 답신이 거의 동시에 닿았다.
16구역과 닿아 있는 17구역의 외곽은 구역을 오가는 버스의 환승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으나 평소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했다. 17구역을 드나드는 버스는 지진 이후로 수 시간째 운행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심부나 주거단지의 대피소 근처에 몰려갔고 다른 구역이 특별히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탓이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16구역입니다. 하는 건조한 표지판이 차도 위에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완과 성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저물어 가는 해가 세상을 물들이는 시각이었지만 한낮의 더위가 남겨 놓은 답답한 공기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1구역 중앙구에 위치한 CCBS 건물 앞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인파로 붐볐다. 두꺼운 종이로 만든 피켓과 각자의 홀로패드나 휴대폰으로 홀로그램 글씨를 띄워 올리는 사람들. 확성기를 든 사람까지. 문앞을 지키고 선 보안팀 이외의 출입이 전혀 없는 방송국 건물 현관 앞에 수 명을 둘러싸고 꽤 그럴싸한 포토라인이 만들어졌다.
처음 중앙에 나타난 사람은 1구역에 막 도착한 기였다. 원에게서 받은 자료로 내린 명백한 결론. 그리고 혹시나 서가 본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이유. 항상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먼저 앞에 나서는 일이 없던 기의 확실한 음성과 눈빛에 반탈 대외협력팀도 기자회견을 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와 시끄러운 주변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기는 적어도 남에게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보였다.
[작가 소개]
제1회 문우 작가연맹을 소개합니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8명의 아마추어 작가로 구성되어 함께 말하고, 쓰고, 출판하는 문우의 작가 모임입니다. 글을 이끌어가는 속도도, 글을 서술하는 방식도 조금씩 다르고, 경험도 생각도 모두 다르지만 함께 생각을 나누며 하나의 문학을 완성하고자 모였습니다. 쓰는 사람들이 즐겁게 집필한 만큼, 읽는 사람들도 즐거운 코너였으면 합니다.
찌부찌
날이 더워요. 자꾸만 무언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요. 뒤늦게 주워담는 여름입니다.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찾아내기를 바랍니다.
미나
학생입니다.
루
정교하게 인간을 싫어하며 필요 이상으로 비장하게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귀여운 친구들이 너무 좋아요.
애옹
어중간하지 않은 글을 써 보고 싶은 사람.
현오
글을 쓰는 동안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는 불가사의의 존재.
찰리
가끔은 내가 당신의 아무나가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or vice versa
어디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결국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끄적이.
날
내 미래보다 내 최애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어쩌지. 그치만 앞으로도 정세랑과 김보영과 최은영을 꾸준히 좋아하면서 살고 싶다. 생존 사이에 적당한 사치와 번영이 있기를. 나도, 여러분도.
[인물 설정]
이번 소설의 초기 인물설정을 소개합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으나 릴레이소설 연재라는 문우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작가들은 소설의 무사 완성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주요 등장인물 넷에게 각각 완,성,기,원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주의 탄생일에 방문하여 주문을 걸어주는 요정처럼 각 인물마다 설정 하나씩을 부여하였습니다. 이 중 어떤 특징은 서사에 영향에 끼치기도, 어떤 특징은 아니기도 합니다. 아래의 설정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독자분들도 재미로 참고하셨으면 하여 지면을 할애합니다.
완
- 술에 약하다
- 눈썹이 짙다
- 애착베개가 있다
- 더위를 많이 탄다
- 에너지바를 자주 먹는다
- 전자기기에서 눈을 떼지 못 한다
-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잘 추진 못한다
-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지만 자주 읽지는 않는다
성
- 말보다는 글!
- 말이 어눌하다
- 자기 주장이 강하다
-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 버즈 피규어를 가지고 싶어 한다
- 단 음식 좋아하는데 욕구를 누른다
- 종이책을 고집하고 e북을 거부한다
- 여름을 좋아하지만 햇빛 알레르기와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에어컨을 트는 여름에 항상 고통받는다
기
- 쥐가 자주 난다
- 이따금 무모하다
- 동물을 좋아한다
- 감기에 잘 걸린다
- 아침 일찍 일어난다
- 감각이 둔한 편이다
- 병원 잘 안 가고 민간요법을 따른다
- 시력이 굉장히 안 좋아 안경 벗으면 거의 아무것도 못 본다
원
- 무신론자다
- 먹는 걸 좋아한다
- 잠을 잘 못 참는다
- 가족과 사이가 나쁘다
-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 한다
- SNS에 피드 올리는 재미로 산다
- 이성보다는 감정과 직감을 믿는 편
- 길을 걸을 때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