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왜 병원에 오셨나요
우리 아들이 수학을 못해서 왔습니다.
예약된 날이 오기까지의 그 한 달동안 정말로 병원에 가야하나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물론 나 혼자 속으로 한 엎지락뒷치락이었고 아이에게는 딱 한번 물었다.
3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다. 수학은 60점대 4등급이었지만 국어 영어는 90점 내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것 봐라. 그냥 너랑 수학이 안 맞는 거지 네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냐. 이런데도 병원을 꼭 가야겠냐'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 엄마에게 조슈아는 '이젠 진짜 지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보니 또 미안해져서 '정말 네가 네 친구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니?'하고 묻자 아들이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처음에 안경 쓰던 날 기억나요? 나는 내가 눈이 나쁜 줄도 몰랐어요. 안경을 맞춰 썼는데 '아, 이렇게 선명히 보일 수 있구나, 이게 정상인거구나' 그제야 깨달았잖아요. 색맹들도 남들이 자신과 똑같이 보는줄 안다는 것처럼 저도 다른 아이들이 되어보지 못했으니 그 아이들과 저를 비교할 수 없죠. 그러니 병원에 가서 객관적인 지표를 가진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는 거 아니에요.'
하, 참 우리 아들 똑똑하기도 하지. 어떻게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냐. 넌 머리가 나빠 수학점수가 낮은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아들아.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예약한 날이 되어 병원에 가게 되었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앉자 '누가 병원에 오자고 했나요?'하고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제가 처음 가자고 한 것 같아요'라고 아이가 대답하자 '엄마는 나가 계셔라. 아이와 먼저 얘기하겠다'고 하셔서 나는 나왔다. 한참을 아이와 대화를 나누시곤 아이가 나오고 내가 들어갔다.
"어머니, 아이랑 얘기해보니 아이가 정서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이고 문제가 있어보이지도 않던데 병원에는 왜 오셨나요?"하고 물으셨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솔직하자 싶었다.
"선생님은 분명 웃으실 건데요, 저희집 식구들이 다 수학을 잘해요. 저는 수학, 아빠는 물리 전공이고 얘 누나도, 여동생도 모두 수학을 잘하는데 얘만 수학이 60점이네요. 어이 없으실 줄은 알지만 그래서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지셨다.
"어머니, 아이만 봤을 때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문제가 있긴 있네요."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아이에게 수학 잘해야한다고 푸쉬한 적 없습니다. 부모가 수학을 잘한다고 자식이 꼭 그래야한다는 법도 없고, 수학을 못해도 다른 것 잘하면 된다고 격려해줬어요. 누나나 동생이랑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 애들도 조슈아에게 그 문제로 무시하는 말이나 태도는 절대 보이지 말라고 당부해 왔구요."
"아닙니다 어머님. 그건 어머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조슈아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됐을 겁니다. 아이는 집안에서 자신만 열등하다는 것을 늘 느꼈을 거예요. 본인도 수학을 잘하고 싶었을 거구요. 그런 마음이 있는 아이에게 못해도 된다고 말하는건 도리어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다.
선생님은 ADHD 검사를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 아이를 아무 문제 없다고 이대로 돌려보내면 아이는 그 생각에 붙잡혀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뭐가 되었든 검사해서 까보자고. 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객관적 지표를 살펴보는 것이 조슈아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거라고. 조슈아가 바라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장장 40분 간의 검사가 끝난 후 의사는 엄마만 방으로 불러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문제가 있기는 있네요. 각각 20분간 청각적 신호에 대한 반응과 시각적 신호에 대한 반응을 보는 검사를 했는데 이 그래프는 그 정확도와 반응속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이한 점이, 청각적인 반응에는 정상적인 결과를 보이는데 시각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그 반응속도가 매우 많이 느린 것으로 일관되게 나타나네요."
정말 그랬다. ADHD 아이라면 눌러야할 때 안 누르거나 안 눌러야할 때 눌러서 정확도가 낮게 나오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중도가 현격히 떨어지며 정확도나 반응속도가 떨어지는 양상을 보일수 있는 반면 조슈아는 그런 문제는 없었다. 시각적 반응에 대해서만 그 속도가 극단적으로 느릴뿐이었다.
의사가 단언해준 것은, 일단 조슈아는 ADHD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시각적 정보에 대해서만 처리와 반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설명하지도 못했다. 일단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ADHD 약을 처방받을 수는 있는 상황이라고. ADHA가 아닌데 ADHD 약은 먹을 수 있다고? 이건 무슨 개뼉다구 같은 말인지.
"왜 이런지를 설명할 수 없는데 어떻게 특정 약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시나요?"
"저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먹어보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이게 강남에서 공부 잘하는 약이라고 애들에게 먹인다는 그 약 아닌가요?"
"맞습니다"
"아니, 선생님. 아이가 수학을 못한다고 약을 먹여 잘하게 만든다는게 그게 말이 되나요? 운동 선수들이 기능을 높이기 위해 불법적으로 약을 먹는거랑 이게 다른 건가요?"
"어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만약 조슈아가 ADHD가 확실했다면 저는 의사의 소견으로 ADHD 치료제를 강력히 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슈아는 정상과 ADHD의 사이인 의심군에 있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이 약을 먹어볼지는 어머님과 아이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약은 아이의 삶의 질을 높혀줄 수 있는 약입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현재 자신의 삶에 얼마나 어려움을 느끼는지와 부모님의 가치관에 비추어 먹이는 결정을 하실 수도, 안 먹이는 결정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약물이므로 부작용이 있습니다. 만약 이 약을 먹어서 생기는 부작용이 약으로 인해 얻게 되는 효과에 비해 너무 크다면 먹이고 싶어도 못 먹일 수 있습니다. 성장기 아이인데 이 약을 먹고 입맛이 떨어져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든가, 밤이 되어도 제대로 잠 들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약의 장점이 아무리 커도 먹일 수 없겠죠.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셔서 아버님과 아이와 잘 상의해 보시고 약을 먹어보고 싶다고 하실 때 다시 오셔도 됩니다."
"정확히 이 약이 아이가 느끼는 어려움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먹여보는 거네요. 선생님, 아이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 약이 거기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아이는 기억력이라는 단어로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저희가 검사한 테스트지에는 시각적 자극에 대한 반응속도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아이의 뇌 안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밝혀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알려진 이 약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먹어보고 관찰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있다면 다른 약들로 바꿔보거나 용량을 조절해보며 차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실 때 이 약을 먹어 효과를 느낄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요?"
"50퍼센트 정도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사실은, 이 약은 의존성이나 중독성이 없습니다. 오늘 먹어보고 부작용이 있으면 내일 안 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럼 내일은 아무 문제가 안 일어납니다. 12시간 동안 약효가 나타나고 그 시간이 지나면 그냥 사라지는 약입니다. 몇 년을 먹다 어느날 갑자기 복용을 멈추어도 그걸로 끝입니다. 그때부터 약 효과를 못 볼 뿐이지 금단현상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조슈아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너는 ADHD는 아니란다. 시각적 자극에 대해서만 비정상적으로 반응이 느리대. 어쨌든 정상범위에서 벗어나 있어서 약은 처방해줄 수 있고, 선생님이 생각할때 그 약이 너한테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50퍼센트 정도라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 약을 먹고 싶니?"
"엄마, 약을 먹어보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제가 봐야 그 약을 먹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거 아닌가요? 그 약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결정할 수는 없죠."
이 자식. 진짜 똑똑하잖아.
이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껏 삶이 괴롭고 힘들었던 건 나도 남편도 아닌 조슈아였다. 이 문제는 조슈아의 문제였고 그러므로 약을 먹을지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조슈아에게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어졌다.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갔다가 곧장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약을 달라고, 먹어보고 조슈아가 결정하겠다고 하고 두 주치 약을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왔다.